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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묵상글 (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성령으로 꿰뚫어 보고 내다보는.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05:3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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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02 05:27
- 성령으로 꿰뚫어 보고 내다보는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무시어
성령으로 세상을 정의롭고 평화롭게 하시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서가 예언한 메시아가 오셨는데 예수께서 바로 그분이시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라고 얘기하면서
아울러 그것을 보는 눈이 얼마나 행복한지도 얘기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언젠가 저는 우울하다는 것은 무신론적이라고,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그 안에 아니 계신다는 표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독서와 복음의 빛을 받아 바꿔 얘기하면
그 안에 성령께서 머무시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우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정신질환자를 우울 마귀 든 사람이라고 잘못 진단하곤
악령을 쫓아내는 행위를 하다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그들과 같은 뜻도 아니고 같은 행위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우울감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면 그것을 심리학적으로도 봐야 하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울 마귀 짓이라고 경계하며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 계시면 우울 마귀가 우리 안에서 준동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우울 마귀는 꼭 악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우울케 하는 모든 악한 세력과 기운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 성령을 모셔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감히 말하건대 신앙적인 관점이란 성령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의 눈으로 고통 가운데서도 즐거움과 기쁨을 꿰뚫어 볼 줄 알고,
성령의 눈으로 우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희망을 내다볼 줄 아는 것입니다.
고통도 꿰뚫으면 그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울해도 내다보면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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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소서, 성령이여!”
성령의 인도에 따른 삶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복음 환호송))
어제 저녁기도후 김영전 레오 형제의 수련착복 행사가 있었습니다. 요즘같이 성소자가 귀한 때 수련자의 존재는 수도원의 큰 경사이자 축복입니다. 매 중요 전례 행사때 마다 부르는 “임하소서, 성령이여” 부르는 성령 성가입니다. 147장 1절만 소개합니다.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의 맘 비추소서.
창조하신 우리들을 은총으로 돌보소서.”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근거하는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탄생하실 구세주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류가 희구하는 <메시아와 평황의 왕국>을 노래하는 오늘 이사야서는 정말 환상적이며 성탄 밤미사 때마다 늘 제1독서시 노래로 부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위에 주님의 영이 마무르리니,
지혜wisdom와 슬기understanding의 영,
경륜counsel과 용맹strenth의 영,
지식knowledge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이다.”
이 여섯에 ‘자비의 영’(The spirt of piety)을 덧붙여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칠은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은총있어 온전한 인간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은 인류가 고대하고 희구하는 유토피아 이상향을 그리고있으며 이는 세세대대로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활짝 열릴 때 계시되는 이런 황홀하고 놀라운 평화의 비전이겠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이런 평화의 비전을 앞당겨 살아가는 성인들입니다. 바로 이런 하늘 나라의 유토피아의 꿈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오늘의 대림시기를 통해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는 돌아와 그 놀라운 성과를 기쁨에 벅차 고백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바치는, 공관복음에 오직 하나 나오는 감사기도문입니다. 바로 오늘의 작고 가난하고 겸손한 철부지 제자들인 우리들에겐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10,21)
우리의 철부지 복된 신원을 환히 밝혀주시는 성령충만한 예수님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희망이자 사랑입니다. 참으로 자나깨나 성령의 인도 따라 살 때 작고 겸손한, 진짜 지혜로운 철부지의 삶이겠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성령의 빛 안에서 자신의 정체를 환히 계시해 줍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로 예수님과의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아버지 하느님과의 우정도 깊어지며 명실공히 하느님의 벗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하닮의 여정이 되고 이는 우리 삶의 유일한 방향이자 목표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잠시 멈추고 주위를 살필수 있음도 성령의 은총이자 지혜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격하게 행동했을 때가 아니라, 잠시 멈췄을 때 오히려 길을 찾아낸다.”<다산>
“멈출 것을 안 다음에야 정해지고, 정해진 후에야 마음이 고요해지며, 그 후에야 편안해지고, 그 후에야 생각하며, 그 후에야 얻을 수 있다.”<대학>
이어지는 예수님은 행복선언은 시공을 초월하여 성령의 인도따라 한결같이 우직하게 당신을 따르는 철부지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들에게 주님께서 성령의 선물과 더불어 주시는 행복선언입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ㄴㄷ).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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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시기”을 시작하면서 <복음>는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기쁨과 감사를 지녀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는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뛰니.”(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찬양하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비록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뜻의 선하심’에 의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전부를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하는 이라야 알아듣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당신의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선하신 그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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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식사할 때입니다. 대부분의 식당은 직원이 주문받지 않고 식탁에 설치된 모니터를 이용해서 주문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웠는데 몇 번 하니까 익숙해졌습니다. 메뉴에 들어가면 음식, 음료, 주류가 있었습니다. 밑반찬도 있어서 주문하면 추가 비용 없이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문산에 있는 식당에서는 로봇이 음식을 갖다주었습니다. 정확하게 주문한 식탁으로 음식을 갖다주었고, 음식을 꺼낸 후에 노란색 버튼을 누르면 주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인공지능은 검색을 통하지 않고 우리의 궁금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메일을 정리해 주고, 일정을 조정해 주고, 원하는 물건을 주문해 주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이 로봇을 만나면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세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완전 자율 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눈부신 세상에서 문득 한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겨울입니다. 눈 내리는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불렀던 ‘다시 만난 세계’라는 노래입니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이 노래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노래였습니다. 우리 세대가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의와 자유를 향한 열망의 노래였다면, 오늘의 세대는 “다시 만난 세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유대 랍비 시드니 그린버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신뢰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한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미래에 대한 꿈을 품고 행복을 갈망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과거만을 회상하며 머무른다면 이미 노인이다. 남을 사랑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사랑받기만 원한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나이로만 생각했는데 랍비는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생각과 인식의 차이로 구분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60이 넘으면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인식을 바꾸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어도, 아마에 주름이 깊이 패었어도, 근력이 예전 같지 않아도 청년입니다. 꿈이 있다면, 신뢰가 있다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오늘 주어진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꿈을 위해서 거친 들판을 걸어갈 수 있다면 청년입니다.
생각하니 대림 시기는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청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나눔, 예수님의 헌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시는 청년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대림 시기에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손을 잡고 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청년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청년입니다. 평생 성전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는 비록 나이가 80이 넘었어도 청년입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마리아는 나이 때문에 청년이 아닙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했기에 청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은 나이가 많았어도 청년입니다.
이 땅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꿈꿀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난과 시련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청년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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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 자신을 넘어 확장해 가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1일 월요일- 마흔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성모님과 "예"의 힘!
대림 시기는 무엇보다도 시작의 이야기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 스테파니 던컨 스미스(Stephanie Duncan Smith)는 마리아의 ‘예’가 하느님께 드린 응답으로서, 닫힘이 아닌 열림(expansion over contraction)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창조 안에서 하느님께서 친히 하신 ‘예’와도 닮아 있습니다. (마리아의 '예'는 자기 안으로 움츠러드는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자신을 넓히고 확장하는 선택이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만의 행복보다 당신 자신을 넘어서는 확장을 선택하신 급진적인 결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선택으로 세상이 태어났습니다. 대림 시기는 이 신적 선택을 다시 울려 퍼지게 하며, 세상이 새롭게 태어나는 때입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의 태중에서 생명이 시작되었고, 이제는 한 여인—곧 하느님의 어머니—이 행복뿐 아니라 개인적 안락, 안전, 명예마저 넘어서는 확장을 선택함으로써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확장은 곧 부르심이었고,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은 "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그리고 상상력을 넓히며, 지금 자신 안에서 자라나는 희망이 어떤 모습일지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만일 성모님께서 "아니오"라고 하셨다면, 그분은 당시 혼인하지 않은 채 임신한 여인이 겪어야 했던 사회적 비난과 육체적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로마 제국의 박해로 인해 가족이 추적당하고 난민처럼 도망 다니며 살아야 했던 고난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은 당신의 첫 아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참담한 순간을 목격하는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분의 "예"는 고난과 위험을 향한 길이었지만, 동시에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용기 있는 선택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사랑의 응답이었고, 그 응답 안에서 세상은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니오"라고 했다면, 마리아의 길은 훨씬 더 안전하고, 어쩌면 더 쉽고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분은 성장의 가장자리, 곧 우리의 참된 자아와 생명이 언제나 발견되는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그 선택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길을 열었습니다. 성모님의 "예"는 단순히 개인의 행복을 넘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문을 여는 응답이었습니다. 그분의 용기 있는 선택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세상 가운데 오셨습니다. [1]
던컨 스미스는 우리에게 이 시기에 어떻게 마음을 넓히도록 부름받고 있는지를 성찰하라고 초대합니다:
삶이 확장되는 길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여성의 몸을 통해, 곧 임신이라는 특별한 신비 안에서 확장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임신만이 확장의 상징은 아니며,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은유도 아닙니다.
배가 늘어나는 것은 곧장 마음이 넓어지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넓어지는 일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마음의 확장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시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뻗음으로써 확장됩니다. 홀로의 행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복수 대명사인 "우리" 안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은 길고, 잔치는 넓으며, 우리는 함께 지켜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근육과 같아, 연결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친교를 이루는 길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서로를 향한 작은 손길, 나눔의 미소, 용서와 자비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형제자매됨(kindred)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넘어 서로를 향해 용기 있게 다가갈 때마다, 각자의 대림을 살아갑니다. 확장은 곧 사랑의 노래이며,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깨뜨릴 용기를 가진 이들"의 찬가입니다. [2]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 때마다—그 위험을 헤아리면서도 사랑에 이끌려—우리는 그 찬가를 새롭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3] 대림은 바로 이 노래의 계절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넓히고 서로를 향해 나아갈 때, 세상은 다시 희망으로 태어납니다.
대림은 무엇보다도 시작의 이야기입니다. 혼란 속에서도 확장을 선택하시고, 행복보다 넓어짐을 택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는 우리에게 놀라운 광경을 보여줍니다. 곧,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멈추지 않고 손을 뻗으시는 하느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대림의 정신 안에서, 우리도 용기를 내어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4]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그 사랑에 응답하며, 우리 마음을 넓히고 희망을 받아들이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대림의 시":
새벽 전 어둠 속에서, 갈망하는 마음은 기다립니다. / 깨어 있음. / 어두운 밤은 공허와 고독을 말합니다. / 오실 그분을 기다리며. / 아홉 달 동안 성모님께서는 기다리며 묵상하십니다…. / 매 순간은 알 수 없는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우리도 기다리며, 묵상하며, 갈망합니다. / 태양은 조금씩 떠오르고, 아기는 날마다 자라납니다. /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감추어졌던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 우리 앞의 길이 열리며…. /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잠겨 있는 그 현존 안으로 들어갑니다. / 이제 우리는 더욱 빛나는 광채 속으로 나아가며, 더 이상 완전히 눈먼 이들이 아닙니다.
—Christina V.
References
[1] Stephanie Duncan Smith, Even After Everything: The Spiritual Practice of Knowing the Risks and Loving Anyway (Convergent Books, 2024), 16.
[2] Cheryl Strayed, “Dear Sugar, the Rumpus Advice Column #64: Tiny Beautiful Things,” The Rumpus, February 10, 2011.
[3] Duncan Smith, Even After Everything, 19–20.
[4] Duncan Smith, Even After Everything, 3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ranish Shrestha,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앞으로 무엇이 닥쳐올지 알지 못하면서도 ‘예’라고 응답하는 것은, 단순한 현실을 넘어서는 용기입니다. 이는 마치 성모께서 어두운 밤 한가운데서 자신의 작은 ‘예’의 빛을 굳게 붙들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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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아이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
죄를 회개하고 사악함을 버리고 세례를 받아 정결해지고 나면, 아이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듯 우리는 영원한 빛으로 돌아갑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스승님께서는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는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며 제 눈을 가린,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어린아이처럼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서 아는 것 많고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작은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까닭
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알렉신드리아의 클레멘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5 우리의 신성
이것을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고 하셨다(사도 1,4).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시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나 역시 똑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존재는 고귀하지만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굳이 몇 푼을 들여 가면서까지 그것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노력하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만 하다면, 능히 그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물은 덧없는 것인 만큼,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그것들을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느님 안에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것은 모두 저세상에서 생명이 되고, 이 세상에서 물질의 속성을 띠는 것은 모두 저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깨끗한 그릇 - 흠이 없고 녹이 전혀 슬지 않은 그릇 - 에 맑은 물을 붓는다면,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얼굴을 갖다 대어도 그 그릇이 변함없이 깨끗함을 유지한다면, 그 사람은 그릇의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물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의 자유와 일치를 맛보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그가 평화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모셔 들였다면, 또한 그는 소음과 불안 속에서도 하느님을 모셔 들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하느님을 모셔 들이는 것만큼 떠들썩하고 불안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모셔 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나다. ”해가 댔는데도 슬퍼하고,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여, 하느님께로 돌아서십시오. 그분 안에는 따분함이 없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안식하고 있으나 말입니다. 누구든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의에 사로잡혀 정의 자체가 될 것입니다"(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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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 느끼신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겸손하고 순수한 이들이 그 뜻을 알아차릴 때 느끼는 하느님 안의 기쁨, 곧 영적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대체로 조건적입니다. 성공했을 때, 칭찬받을 때,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짧은 기쁨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기쁨은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기쁨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드러나는 순간에 느끼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어떤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피어나는 열매입니다. 그분께 마음을 열고, 순수한 믿음으로 바라볼 때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스며듭니다. 주님은 지혜로운 자들보다 ‘철부지들’, 즉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자들이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이 단순한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작은 선행 안에서, 기도 안에서, 누군가의 미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은총입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함께 나눌 음식을 만들다 보면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랬습니다.
몇 장의 김치전을 만들었습니다.
김치 자체가 느끼함을 잡아주지만….
조금 더 핫한 맛을 느끼기 위해서 청양고추를 썰어 넣었습니다.
전을 상에 올리고 둘러앉은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맛있을까? 입에 맞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던 중 무심코 손으로 눈을 비볐습니다.
아뿔싸~~~
청양고추의 매운맛이 바로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을 닦아야 했습니다.
조심하세요. 울고 싶지 않아도 울 수 있으니까요.
혹시 시원하게 눈물 흘리고 싶다면….
사용해 보세요. 청양고추 눈 비빔 김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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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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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오랫동안 특수 사목을 하던 신부가 정말 오랜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회사원처럼 사무 업무만 하다가 드디어 사목자가 된 것 같다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당의 사무적인 일들은 전문가처럼 처리할 수 있었지만, 강론하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강론을 하지 않았었기에 신자들이 원하는 강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강론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전혀 반응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고, 또 원하는 강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늘 미안했습니다.
지금 이 신부는 어떨까요? 누구보다 기쁘게 본당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니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고,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남의 문제점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전혀 문제없고 상대방에게만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발전할 수 없습니다. 불평불만 등의 부정적 마음으로 후퇴하는 자기를 만들게 될 뿐입니다.
남보다 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문제점은 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의 안테나를 세워야 합니다. 겸손해야 자기 문제점을 알고 또 해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와 마귀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직후에 이어지는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대의 율법학자, 바리사이, 그리고 스스로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과 교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고 배움이 짧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그렇지요. 하지만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겸손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이루려는 사람을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되려는 마음보다는 철부지들처럼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될 만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의 명언: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이기적인 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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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임마누엘의 약속~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신 제자들의 기쁨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드러나고 있음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아무런 자원도 없이,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진 어린 양들처럼"(루카 10,3) 세상으로 나아갔던 일흔 제자들이, 복음 선포의 열매를 가득 안고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겸손과 무력함의 길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기쁨과 환희로 외치시며, 마치 당신의 제자들인 작은 이들의 마음과 영성에 당신 자신을 일치시키신 듯하셨습니다."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총명하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신비가, 바로 이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 곧 작은 이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도 주님의 기쁨을 묵상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힘과 지력의 권세가 아니라, 겸손과 순명 속에서 당신 나라를 세우십니다. 우리 역시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로서,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는 지성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회 전체가 지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말하길, 부모에게 가장 끔찍한 말은 "이 아이는 머리가 나빠요!"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는 어떤 잘못된 행동보다 더 큰 수치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성을 등한히 여기거나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지성은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랑과 결합될 때 지성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큰 힘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지성은 탐욕, 증오, 잔혹함 등 어떤 본능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쉽게 에고의 무기가 되어버립니다. 사랑이 없는 지성은 모두에게 위험이 됩니다.
세상이 존경하는 것은 거룩한 사랑의 마음을 지닌 사람의 지성입니다. 과학자, 연구자, 변호사, 언론인… 이들의 사고는 논리적이고 비판적이며, 의심하고 판단합니다. 이런 지성으로 신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이와 같아야 한다." 곧, 하느님의 현존(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가려면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어린이의 마음으로만 하느님의 새로운 행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행위는 바로 한 아기로 오신 하느님, 곧 성탄의 신비입니다.
대림은 단순히 성탄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그 첫 시작을 기억하며, 동시에 우리 마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시는 주님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때입니다.
대림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시간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주님의 오심을 갈망하며 작은 시작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그 시작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어떻든 우리에게는 가장 큰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하느님의 현존을 물리적으로 잘 느끼지 못하더라도 어린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그 현존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은 그 순간 당신의 현존을 어떤 식으로든 드러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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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 묵상] 철부지들
철부지들
누군가의 말끝이
날카롭게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나는 왜 마음을 거기에 두었을까.
흔들리던 이유는
그 사람이 세운 그림자 때문이 아니라
내가 중심을
그에게 내어주었기 때문이었구나.
지혜롭다는 이들은
자기 확신으로 단단하지만
나는 모른다, 자꾸 흔들린다.
흔들 흔들 넘어질까
버스 손잡이를 꽉 잡듯
땅에 발을 단단히 딛고
한번 더 꽈악 잡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손잡이가 날 꽈악 잡고 있었네
많은 예언자와 임금들이
보려 했으나 보지 못한 것—
나는 지금, 여기서 본다.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철부지들
우리의 눈은 행복하다.
by 서하
여 백 — 시가 남긴 자리
"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철부지들, 우리의 눈은 행복하다. "
성령 안에서
철부지들은 묻고
지혜로운 자들은 답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묻는 자들의 눈이 더 빛납니다.
왜일까요?
질문은 열림이고,
답은 종종 닫힘이 되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많은 예언자와 임금들이 보려 했으나 보지 못한 것”을
우리 눈이 지금 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철부지의 눈은 그래서 행복합니다.
다 알지 못해도 괜찮고,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스스로 확신을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먼저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길 안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이 시는, 답을 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묻는 이들의 자리에서 그 눈길을 더듬어 보려는 저의 작은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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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서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표현을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을 같이 언급하시는 것은
오늘 말씀의 시작에서
하느님을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시고
즐거워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숨겨지거나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면서 다니셨습니다.
누구나 그 하느님의 나라에 다가갈 수 있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감춘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감추시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하느님의 나라를 사람들이 보지 않거나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즉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드러난 하느님의 나라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즐거움을 함께 느끼지 못하게 막으며
제자들이 느낀 행복을 함께 느끼지 못하게 막습니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그 지혜는 무엇을 말할까요?
우리의 즐거움과 행복을 막는 그 지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화려한 왕으로 생각해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한 십자가 위에 매달린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의 고정된 생각이
나의 고집이
오히려 나를 막고
나를 답답하게 만들지는 않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주장을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내 주장만 하다가 하느님의 나라를 놓치면서
즐거움과 행복도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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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21-24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선포의 소명을 띠고 예수님께서 가실 고을로 미리 파견되었던 일흔 두명의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고 돌아와, 예수님께 전교여행의 성과를 보고하는 장면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무사히 해냈다는 성취감과 보람에 한껏 고무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을 위해 해낸 일의 결과나 성과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의 참된 행복과 구원을 위해 준비하신 ‘선하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이유도 예수님과 같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룬 성과, 눈에 보이는 결과나 실적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나를 위하여, 나를 통하여, 나를 향하여 이루어졌음에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겠지요. 우리가 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오직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아신다고 하십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성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셔야만 알 수 있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주신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건 아니지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알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순명과 실천으로 들어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한쪽으로 쉽게 기울어지는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거나 들을 수 없기에,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들으려 하기에,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거나 오해하게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지혜롭다고 혹은 슬기롭다고 여기는 교만한 이들은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가 모든 걸 다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다르지요. 그들은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가져올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좋으면 좋은대로 자기 안에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불완전함을 알기에 그런 점들을 채워 주시고 완성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따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드러나지요. 그러니 주님 앞에서는 똑똑한 척 자신을 꾸미지도, 대단한 척 자신을 높이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온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며 주님 없이는 못 사는 영적 ‘철부지’로 머물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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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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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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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2.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보는 눈
오늘 복음 장면에 앞서 주님은 일흔두 제자를 선교의 길로 파견하셨으며, 그들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러니까 그들의 메시지가 사람들, 특별히 철부지와 같은 순박한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고 받아들여져 이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주님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완성하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그 순수한 마음의 눈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도록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우리가 보는 가운데 교회 안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뀌어나갈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이 교회의 건강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표지가 될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짧지 않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변화의 순간들이 때로는 하나의 위기로 다가와 혼란스러워도 했고 많은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들이, 한편 곰곰이 생각하고 인내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기회,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기회, 더욱 성실한 자세로 신앙생활에 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믿고,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을 향해, 특별히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 그 차가운 베틀레헴 마굿간에서 떨고 계신 아기 예수님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내려가고자 힘씁니다. 정의를 외치고 평화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거나 부당한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을 제대로 사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생생한 교육의 장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 고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짊어지고 나갈 수 있도록 고무하는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제대로 보기 위해서 마음의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과거만을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지양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고,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하고 이르신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큰 기쁨이고 행복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보는 것을 보는 눈으로 행복한 하루, 매사에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사랑 실천으로 드러내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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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울음, 하느님의 눈물 , 예수님 위로하기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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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근 [dimonz] 2025-12-02 ㅣNo.186622
| 2025-12-02 ㅣNo.186622 *** 사람의 울음, 하느님의 눈물 , 예수님 위로하기 오늘은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셧을때 울으셨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복음 말씀을 살펴봅니다. ------------------------------------------------------------------------------------ *요한복음 11장 32절 ~ 35절 : 나사로 죽음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누가복음 19장 41절 ~ 42절 :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울고계신 예수님을 만날수 잇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나사로가 죽어서 그런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미리 말했기 때문 입니다 오히려 나사로의 죽음이 가져온 마리아와 주변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우신것 같습니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의 나약함에 동정하시는 울음인 셈이지요.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루살렘을 보며 우시는 예수님을 만날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게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아무튼 두가지 경우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적인 분이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좀더 묵상을 해봅니다 직접 예수님이 우셨다고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예수님 께서 우신것 같은 상황이 있습니다. ---------------------------------------------------------------------------------- *마태복음 14장 10절 ~ 13절 : 세례요한의 죽음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누가복음 22장 42절 ~ 45절 : 겟세마네의 기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마태복음 27장 45절 : 십자가에 못박힌채...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이다. ------------------------------------------------------------------------------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목잘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홀로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잔혹함을 슬퍼하시며 울으셨을것 같습니다 물론 성부 하느님께서는 위로와 평안을 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에도 눈물을 흘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천사가 힘을 돋아주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크게 울부짖으시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을 생각해 봅니다 인간의 눈물 이지만 또한 신의 눈물 즉 하느님의 울음 이기도 합니다 ------------------------------------------------------------------------ 오늘은 한발자국 좀더 나가 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여러분들.. 요즘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실것이란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홀로 조용히 시간을 내시어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예수님께서 몹시 슬퍼하고 계시는것은 아닐까? 만약 슬퍼하시는 것이 느껴지신다면 그분을 위로해 드리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이시지만 우리들 나약한 인간에게 위로를 받고싶어 하시기도 합니다. 어떻게 위로를 하냐고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한 희생을 묵상하시면 됩니다 ------------------------------------------------------------------------- ** 덧붙여서 : 오늘은 예수님의 눈물을 묵상해 보았는데요. 나중에 예수님의 웃음에 대해 묵상해 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때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고됨과 세상의 악함에 대해 슬퍼하셨지만 그럼에도 실제로는 즐겁게 긍정적으로 사신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먹는것을 즐기고 자주 잔치에도 참여하시고 어울리는 장면을 여러번 보게 됩니다. * 마태복음 11장 19절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기원후 1세기 목공인이자 일용노동자의 삶은 절대로 녹록치 않았겠지만 예수님은 삶 생활을 긍정적이고 활기차게 살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공생애 활동 즉 순회 설교자이자 유랑 종교집단 으로서의 삶도 마찬가지일듯..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다가서면 비극 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저는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태도 마음가짐은 <인생의 희비극을 인정하는 삶의 명랑성> 이라 생각합니다 삶의 고충 슬픔을 기꺼히 감수하고 즐겁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마음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야의 최고봉이라 생각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수난의 죽음을 예측하시며 피땀흘리며 기도하셨지만 기꺼이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십자가 수난의 길을 가시고 구원을 이루신것 처럼요. 기도의 힘? ========================================= *항상 은총상태를 유지하십시요 자주 미사 드리십시요. 매일미사 좋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십시요 묵주기도를 드리십시요 수호천사를 위한 기도를 하십시요 ==================================== * 개인 체험 예수님, 울면서 기도하심. " 아버지, 인류를 용서하소서 " 한숨을 쉬시면서 말씀하심. "나를 위로해다오. 아버지의 정의를 나는 막을수 없다" ==================================== https://www.youtube.com/watch?v=SRF_uLhWecc&t=336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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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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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25
12월2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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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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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전병권 보나벤투라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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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온 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통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그 누구도 천상잔치에 소외되거나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평한 곳입니다.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축복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기쁨의 장소입니다.
언젠가 한 수녀원 본원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참으로 잘 준비된 전례였습니다. 모든 성가는 장중한 그레고리안 성가였습니다. 빛의 예식에 이어,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었는데, 일곱 개 독서를 모두 봉독했고, 독서 끝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사제석에 앉아 있는데,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이겠지. 성삼위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성모님을 비롯한 천상의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둘러 계시고, 거룩한 무리에 든 사람들과 함께 끝도 없이 말씀이 선포되고, 찬가가 울려 퍼지고..
그러니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 그저 세상 좋은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천상잔치 그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겠구나, 정말 지루하겠구나, 거기 있는 그 자체가 지옥이겠구나. 그러니 지상에 있을 때부터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오늘 이사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살짝 설명해주십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야 예언서 11장 6~8절)
보십시오. 혼자만,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어떤 편법을 써서라도 목숨 걸고 돈을 모으는 사람들, 독식(獨食)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에 없을 것입니다. 틈만 나면 분노하고 무력을 일삼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침묵 속에 헌신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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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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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기쁨을 누리는 법: 네비게이션을 보지 말고 아버지 손을 잡아라>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 세상과 단절된 채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녀의 가정교사 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손바닥에 글씨를 썼습니다. 인형을 주며 'D-O-L-L'이라고 썼지만, 헬렌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손가락장난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데리고 펌프가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펌프질을 하여 시원한 물줄기가 헬렌의 한 손에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다른 한 손바닥에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썼습니다.
'W-A-T-E-R' (물) 바로 그 순간, 헬렌의 영혼에 번개 같은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생생한 단어가 내 영혼을 깨웠다. 그것은 빛과 희망과 기쁨을 주었고, 나를 자유롭게 했다." 헬렌이 언어를 깨우친 것은 머리로 고민하며 땅을 팔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인도하심(손)과 위에서 쏟아지는 물(은총)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때,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참된 앎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빛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루카 10,21)라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공부'해서 얻는 지식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논리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체험되는 분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무신론적 지식인 형 이반과 신심 깊은 동생 알료샤가 등장합니다. 이반은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논리정연하게 나열하며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그의 논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악마이거나 무능한 거야." 이 차가운 지성의 공격 앞에서 동생 알료샤는 말문이 막힙니다. 그는 논쟁으로 형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알료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형에게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 단순한 사랑의 행위, 논리가 아닌 온기(입맞춤)가 닿는 순간, 이반의 견고했던 무신론의 성벽은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논쟁이 아니라 입맞춤으로 만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내가 운전대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비게이션을 끄고,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농사는 내 땀과 노력으로 땅을 파서 소출을 얻는 행위입니다. 대신 하느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하얗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안해서(내비게이션) 몰래 많이 거두어 저장하려 했지만, 그것은 다 썩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내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농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줍는 '거룩한 거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파는 것을 멈출 때, 하늘의 양식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 지식의 기쁨은 겸손하게 부여받는 것이지, 굴을 파듯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영적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 곡예사』 이야기에서 공중그네의 비밀을 말합니다. 공중그네에는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플라이어(Flyer)'와 그를 잡아주는 '캐처(Catcher)'가 있습니다. 곡예사는 말합니다. "플라이어의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공중에서 제가 맞은편 봉이나 캐처를 잡으려고 팔을 뻗어 발버둥 치면, 둘 다 손목이 부러져 떨어져 죽습니다. 제 할 일은 그저 팔을 뻗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캐처가 내 손목을 정확히 낚아챕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공중그네에서 내가 행복을, 내가 구원을 잡으려고(Digging) 아등바등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공중에서 힘을 빼고, 위대하신 캐처(하느님)가 나를 잡아주실 때까지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잡으려 하면 추락하고, 잡히기를 원하면 비상합니다. 이 모습이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위한 모습입니다.
작아집시다. 그러면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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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식사할 때입니다. 대부분의 식당은 직원이 주문받지 않고 식탁에 설치된 모니터를 이용해서 주문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웠는데 몇 번 하니까 익숙해졌습니다. 메뉴에 들어가면 음식, 음료, 주류가 있었습니다. 밑반찬도 있어서 주문하면 추가 비용 없이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문산에 있는 식당에서는 로봇이 음식을 갖다주었습니다. 정확하게 주문한 식탁으로 음식을 갖다주었고, 음식을 꺼낸 후에 노란색 버튼을 누르면 주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인공지능은 검색을 통하지 않고 우리의 궁금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메일을 정리해 주고, 일정을 조정해 주고, 원하는 물건을 주문해 주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이 로봇을 만나면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세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완전 자율 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눈부신 세상에서 문득 한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겨울입니다. 눈 내리는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불렀던 ‘다시 만난 세계’라는 노래입니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이 노래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노래였습니다. 우리 세대가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의와 자유를 향한 열망의 노래였다면, 오늘의 세대는 “다시 만난 세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유대 랍비 시드니 그린버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신뢰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한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미래에 대한 꿈을 품고 행복을 갈망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과거만을 회상하며 머무른다면 이미 노인이다. 남을 사랑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사랑받기만 원한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나이로만 생각했는데 랍비는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생각과 인식의 차이로 구분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60이 넘으면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인식을 바꾸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어도, 아마에 주름이 깊이 패었어도, 근력이 예전 같지 않아도 청년입니다. 꿈이 있다면, 신뢰가 있다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오늘 주어진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꿈을 위해서 거친 들판을 걸어갈 수 있다면 청년입니다.
생각하니 대림 시기는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청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나눔, 예수님의 헌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시는 청년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대림 시기에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손을 잡고 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청년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청년입니다. 평생 성전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는 비록 나이가 80이 넘었어도 청년입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마리아는 나이 때문에 청년이 아닙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했기에 청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은 나이가 많았어도 청년입니다.
이 땅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꿈꿀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난과 시련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청년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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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를 찬미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시는 친교 안에서 기쁨에 가득 차 계십니다. 우리는 대체로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리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기쁨이, 성령 안의 기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시는 까닭은 당신의 진리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기]”(루카 10,21) 때문입니다. 여기서 “철부지들”로 옮겨진 말은 그리스 말로 ‘아기들’을 뜻하며 흔히 ‘작은 이들’로 옮겨집니다. 이 표현은 겸손하고 단순하며 신뢰에 찬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계시는 바로 이 작은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작은 이의 길은 늘 겸손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작은 이는 자기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삶과 생각의 중심에 자신을 두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선택하신 이들은 바로 이 ‘작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
대림 시기는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 하느님을 마음 안에 온전히 모셔 들일 때,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이(이사 11,1 참조) 주는 기쁨과 평화는, 구세주께서 가져오실 가슴 벅찬 기쁨과 평화의 예언은,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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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21-24: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의 성과를 들으시고,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신다. 그 기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21절)
하느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드러나신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Adversus Haereses IV,20,7)이라고 표현했다. 곧 하느님은 인간의 교만한 눈에는 감추어지지만,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에는 드러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셨다.”는 말씀을 주석하며, “철부지들이란 단순히 배우지 못한 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그들의 순수함이 계시의 문을 연다.”(Homilia 38,3) 말했다.
예수님은 이어서 “아버지와 아들만이 서로를 안다.”(22절 참조) 말씀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친밀한 일치이다. 그리고 그 친교 안에 성령께서 사랑의 끈으로 계신다.”(De Trinitate, I,4,7)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를 아는 길은 오직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만 열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들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다.”(23-24절 참조) 선언하신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옛 계약의 예언자들은 오실 분을 희망 속에서만 보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니 복된 자들이다.”( 63,2)라고 강조했다. 교회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구약의 모든 예언과 기다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계시 헌장도 “예언자들과 율법은 모두 그리스도를 지향하며,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15항)라고 가르친다.
대림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복음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첫째, 겸손과 단순함의 태도를 회복하라는 초대이다. 하느님은 학문적 논리보다 겸손한 마음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듯, “하느님을 알기 위한 가장 큰 지혜는 겸손히 무릎 꿇는 것이다.”(De Incarnatione Verbi Dei, 56) 둘째, 은총의 행복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사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고 듣는 은총을 받았다. 이는 과거 제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의 눈은 복되고, 우리의 귀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과 성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받은 은총을 삶의 제물로 드리는 일이다.(로마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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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철부지의 기도>
루카 10,21-24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철부지의 기도>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주님
저는
열렸으니
제게
오소서
주님
저는
모르오니
저를
깨우치소서
주님
저는
해맑으니
제게
스미소서
주님
저는
새하야니
저를
물들이소서
주님
저는
없사오니
제가
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제가
당신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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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절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기쁜 날’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1-24)
1) ‘철부지들’은, 인간 세상에서는 ‘낮은’ 위치에 있지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는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는 것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탄생 때 하늘에 울려 퍼진 ‘천사들의 찬미’가 연상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철부지들’과 천사들이 말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사실상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말씀은, ‘철부지들에게만’ 드러내 보이셨다는 뜻이 아니라, ‘철부지들만’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만 믿고 받아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들, 현세의 삶에만 만족하는 자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2)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부와 권력을 자랑하면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기득권층 사람들과 영혼 구원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을 그자들에게는 감추셨다는 말씀은, 그자들을 구원에서 배제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은 지혜롭다고 자처하면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원래, 구원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원하지 않고, 또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성탄절은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이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날인데도,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냥 ‘남의 잔치’일 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라는 말씀에서 ‘마리아의 노래’가 연상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마리아의 노래’는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찬양하는 찬미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한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구원받을 수 있고, 통치자들도 불의한 권력을 내려놓고 올바르게 살면, 또 부유한 자들도 혼자만의 부유함을 버리고 진심으로 자선을 실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3)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인간 구원’의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예수님께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니,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요한 8,42) <하느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섬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즘에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일부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들이 있는데, 그들도 역시 하느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자들입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이나 다른 진리나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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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된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이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란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눈과 귀가 소중하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 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왜 그랬을까? 자기가 이미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철부지들은 계산하지 않고 셈을 하고 따지지 않으며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셈이 빠른 사람들은 누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 한다. 철저히 자기중심이다. 그러나 철부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셈을 할 줄 모른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는데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고 하셨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하다. 사실 제자들도 자리다툼을 한 적이 있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확인된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는 인색하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하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 한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귀가 밝으면 뭐하나?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제발 주님께 집중할 은총을 갈망한다.
요즘 세상의 현실을 보자.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데 여전히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이 제발 백성을 위한다는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성령의 도움을 청한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야 삶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공덕이 없는 저희를 너그러이 보호하시며 도와 주소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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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랫동안 특수 사목을 하던 신부가 정말 오랜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회사원처럼 사무 업무만 하다가 드디어 사목자가 된 것 같다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당의 사무적인 일들은 전문가처럼 처리할 수 있었지만, 강론하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강론을 하지 않았었기에 신자들이 원하는 강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강론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전혀 반응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고, 또 원하는 강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늘 미안했습니다.
지금 이 신부는 어떨까요? 누구보다 기쁘게 본당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니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고,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남의 문제점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전혀 문제없고 상대방에게만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발전할 수 없습니다. 불평불만 등의 부정적 마음으로 후퇴하는 자기를 만들게 될 뿐입니다.
남보다 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문제점은 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의 안테나를 세워야 합니다. 겸손해야 자기 문제점을 알고 또 해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와 마귀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직후에 이어지는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대의 율법학자, 바리사이, 그리고 스스로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과 교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고 배움이 짧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그렇지요. 하지만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겸손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이루려는 사람을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되려는 마음보다는 철부지들처럼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될 만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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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온 존재를 바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헤로데의 반대에 부딪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와 보고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10,21)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으뜸가는 이유는 주님께서 철부지들인ㅠ부족하고 무식하며 미약한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10,22).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고,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28)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삶은 거꾸로 가는 인생이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이와 달리 세상살이에서는 해박하고 탁월한 지식으로 남보다 앞서는 사람이 되어 출세하려고 피 튀기는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잘 나고 힘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들이 힘을 발휘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꾸로 어리석은 것, 약한 것, 비천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통하여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것은 곧, 생명과 선, 자비와 정의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드러나려면 내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힘을 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낮추어 진정 가난한 사람이 되고, 내 중심적인 애착들을 비워내어 영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을 뵙지 못하겠지요.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잡다한 지식과 남을 이기는 법, 나만 잘 사는 법,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사랑과 윤리가 결여된 지식과 힘에 의존하지 말아야겠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미천하고 율법에 무식한 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그들을 통해 이루어주신 하느님의 선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한없는 은총으로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소하고 보잘것없고, 어리석고, 천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도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고 평범한 나날처럼 보이고, 비참한 처지에서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만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행복과 사랑의 선물을 주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보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자신을 낮추고 비워, 철부지 제자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시고 선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 가운데 머물 수 있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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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초등부와 중고등부 아이들의 미사를 하다보면 아이들의 세대별 특징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일단 초등부 아이들은 성가를 엄청 크게 부릅니다.
주의는 매우 산만하고 그래서 다소 시끄럽기도 하지만 반주에 맞춰 크게 노래를 부르고 사제가 입,퇴장을 할 때에 혹은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에는 손을 뻗어 하이 파이브를 해달라고 난리입니다. 저는 초등부 강론을 인형극으로 하는데, 이 인형극의 주인공은 야고보입니다. 강론대에 서서, “얘들아 그럼 오늘도 야고보를 불러볼까?” 물어보면 아이들은 목청이 찢어져라 야고보의 이름을 외칩니다.
반면 중고등부 아이들은 성가를 부르지 않습니다. 매우 조용하고 주의력도 있는 것 같은데 반주가 나와도 크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제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찾기 힘듭니다. 인형극을 할 엄두는 내지도 못합니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춰서 강론을 하려 애쓰지만 반응이 없어서 퍽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눈에는, 초등부 아이들 못지않게 중고등부 아이들 역시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차차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면 뛸 뜻이 기쁜 것도 사실입니다.
농담을 하며 이리저리 건드려보면, 참다참다 “옛다” 하는 식으로 웃어보이곤 하는데 그 미소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초등부와 중고등부 아이들을 비교해 보면 이 나이대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초등부 아이들은 본인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직 배울 것이 많고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부모님과 같은 어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면 중고등부 학생들, 특히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은 주관이 뚜렷하며 자신이 독립적으로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어른들보다 자신과 친구들을 더욱 믿는 편이고 결국 이 아이들의 중심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즐거워하셨다”라는 표현이 제게는 매우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즐거워하셨다는 표현은 쉽게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로는 인간적 결함을 갖고 실수도 하지만, 성실히 예수님을 따르며 철부지처럼 당신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제자들이 실로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결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불리는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자기 스스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이끄심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자신이 주축이 되어 욕심대로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작고 어린 존재이며 철부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버지이며 스승이신 주님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러할 때에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라 행동하게 되고 우리는 서서히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 우리의 몸에도 매우 자연히 체득되어 있습니다. 성인들 역시 흔히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람들보다는 겸손한 사람, 자신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사람을 좋아하고 선호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려 애쓰게 되고, 남들 앞에서 더 나아보이고자 스스로를 학대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사람의 지혜와 슬기는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른들은 자기를 내세우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자신에게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어른들의 가르침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따릅니다. 이렇게 어린이와 같이 주님을 겸손되이 따를 때 더 큰 지혜와 슬기를 우리는 습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을 하느님께 겸손되이 고백하며, 당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내려주시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러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실로 ‘즐거워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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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예수님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뜻 안에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 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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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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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 10,21ㄱ)
<우리도 철부지들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 10,21-24)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 예수님에게 드러났다는 '계시(드러남)'와 제자들에게 하신 '행복 선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예수님의 이 감사기도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라는 일흔두 제자의 보고를 받고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시 하느님의 법인 율법에 능통했던 사람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철부지들'은 그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부터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자체가 곧 율법이요 계명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자칭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철부지들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두고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삶으로 재육화시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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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가장 맑고
참된 지혜는
철부지의
마음에
깃듭니다.
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문입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길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것이 깊다고
하늘 나라를
더 빨리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한 이들과
겸손한
이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철부지의 마음은
욕망과 계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 큽니다.
꾸미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억지로
부여잡지도
않습니다.
이 대림 시기는
세속적 지혜를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드러낸
철부지 같은
정직함이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낮추고
단순해지면
감사와
은총의 길이
열립니다.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은총은
교만과 지식의
많음이 아니라,
우리의
낮고 비워진
마음 속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는
오늘의 삶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신비는
지식이나
계산이 아닌,
마음의
순수함 속에서
드러나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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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우리의 가난함도 우리의 부족함도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신비입니다. 가난함도 부족함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이 됩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깨닫는 삶 또한 우리의 가난함과 부족함입니다.
가난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의 삶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는 신비의 맑은 눈높이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부족한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며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을 아드님에게 넘겨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로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의 실천으로 예수님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행복이란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받아들임의 기쁨입니다.
무엇을 받아들여할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사랑과 나눔의 인격을 보는 기쁨 또한 관계로부터 주어지는 관계의 신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보려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들을 수 없는 관계의 아픔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가난함과 부족함을 통해서 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의 가난함과 부족함 안에 행복이 탄생하길 기도드립니다. 행복은 사랑의 탄생인 가난함과 부족함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을 향하는 행복입니다. 막을 수 없는 신비를 거스를 수 없는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는 대림시기의 기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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