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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는 사람들
롬 2:1-5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1-5 /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당신은 왜 그렇게 끔찍한 사람들 얘기만 합니까?' 하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여러분 역시 그들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자들은 악한 사람들이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러분이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와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2)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정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3)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때는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지만 여러분이 저지를 때는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4)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오래 참고 계시다는 것을 정녕 모르십니까? 아니면 그런 것은 생각조차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즉각 벌하지 않고 오래 기다려 주시는 것은 단지 여러분이 죄에서 돌아설 시간을 주기 위한 것임을 왜 모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회개하기를 따뜻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5) 그러나 여러분은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져 죄에서 돌아서기는커녕 자기가 받을 무서운 벌을 쌓아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심판관으로 온 세상을 다스릴 형벌의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앞 단락은 타락한 이방인들의 범죄와 그 실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었습니다. 본 단락은 이방인들을 판단하면서도 동일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다른 것이 없으면서도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여기서 ‘남을 판단하는 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 반복하여 혹독하게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찾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그들의 고질적인 병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도 이방인들과 같은 일을 행하고 있기에 죄가 없다고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이 의인이라는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3) 이방인들처럼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비롯하여 초대교회의 믿음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바울은 죄를 범하는 이방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같은 일을 저지르는 자신들은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선민의식과 자신들만 구원받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며 책망하였습니다.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4-5)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인자하심이요, 둘째는 용납하심이요, 셋째는 길이 참으심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멸시하고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 때문에, 그들이 심판의 날에 받게 될 진노를 쌓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적용: 남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버려야 할 자신의 행동이나 습관이 있는지를 살피고 버리는 시간을 가집시다.
길을 걸어가려면 자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야 한다.-레프 톨스토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진정으로 필요한 물건은 시계가 아닌 나침반입니다. 아무리 빨리 도착하여도 그곳이 결승선 지점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생활도 직분이나 오랜 교회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결코 내 노력으로 그 죄를 벗을 수 없으며, 다만 주님께서 대신 그 죄를 속죄해 주셔야만 벗어날 수 있는 신분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없는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로마서 2:1-16 / 이규현 목사
로마서 1장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죄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만한지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었습니다. 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의식과 자부심으로 마음을 놓고 있던 유대인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을 합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 우월감이 매우 강했습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사람을 구분할 때도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당시 이방인은 지옥의 불쏘시개로도 쓰기 부족한 존재였습니다.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시는데 그 꿈을 통해 이방인을 만나게 하시고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해져야 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충만을 받고 복음 안에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유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은혜를 받았음에도 이 유대주의는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대주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특권으로, 언약의 증표로 삼아 그것이 구원의 보증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예수를 믿은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신분 자체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바울의 이 말씀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돌로 쳐 죽일 말입니다. 바울이 복음 증거를 하며 다닐 때 동족의 위험을 받은 것도 이 유대인들이 앙심을 품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유대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판단하는 그 죄를 똑같이 행하고 있는 것을 바울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이라면 특히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바라보는 일에는 밝지만, 자기의 문제를 보는 것에는 어둡습니다. 이것은 죄인의 특성입니다. 남의 죄는 잘 보지만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합니다. 죄인은 자기 눈이 가려졌기 때문에 자기 죄를 성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만, 더 나쁜 것은 자기도 그 죄와 동일하거나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판단하지만 그들이 이방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을 향해 비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 안에는 더 심각한 죄를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문제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려고 다른 사람을 더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졌던 착각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월의식이라고도 하는 의인의식이 생깁니다. 나는 구원을 얻을 만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가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일을 열심히 한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을 자기 의로 여기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에 서려는 태도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확하게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자신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신을 포장하고 다른 사람은 폄하하는 자리에 자신도 모르게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서 말세라고 말하지만, 자신을 보면서 말세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도 매몰찬 것이 죄인의 특성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왜 문제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 바리새인처럼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갈지도 모릅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을 의인화하게 되고 결국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이것이 당시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오류입니다. 인간이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악한 자인가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고는 십자가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미화하고 포장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자랑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죄인이라고 말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까지 나아가지 않았다면 엄밀히 말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고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와 연약함을 보면서 판단하기 보다는 나도 저 자리에 있었다면 실수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자기 겸손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깨달은 죄인과 깨닫지 못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은 선하다는 의인의식이 있는 유대인들은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갑니다. 아주 나쁜 태도입니다. 죄인의 특징 중 하나가 말씀 적용을 남에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예화를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그 악한 죄인의 이야기에 흥분합니다. 그런데 깨닫지는 못합니다. 나중에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이야기라고 말하자 그때야 깨닫습니다. 어떤 분이 설교 중에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하기에 큰 은혜를 받은 것 같았는데 어떤 부분에서 은혜를 받았느냐고 물으니 “김 집사가 듣고 크게 깨달았을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자기에게는 적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설교를 듣다가 옆에 있는 남편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사실 이런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믿어 왔기 때문에 자신을 정당화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와서 이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정죄의 눈, 판단하는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결국 그들 안에 수치감이 찾아왔습니다. 이전에는 사랑으로 바라보았는데 죄가 들어와 서로를 판단하게 될 때 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자신이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남을 정죄하고 판단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범죄를 볼 때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죄와 나의 죄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류 모두가 하나도 예외 없이 이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연약함이 내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나와 상관없다고 여길 때 남을 심판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내가 인간의 위치를 떠나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착각과 오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신도 그 죄를 짓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과 할례를 받은 것은 자랑이 아니라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집을 부리고 마음이 강팍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즐기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심판을 유보하시고 유보하십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하는 장면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라고 하셨다고 오해할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보낸 430년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인내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바로의 강팍한 마음을 하나님이 한 번에 끝낼 수도 있었지만, 열 가지 재앙을 내려서 유보하고 또 유보하십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 145:8)」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인간의 악독함입니다. 오늘 4~5절도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를 더 쌓지 말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거나 조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 행위에 따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 여기에서 외모는 국적이나 신분인데, 그런 것에 따른 구별이 아니라 그가 율법을 가진 자라면 율법을 가진 대로, 율법이 없는 자는 율법이 없는 대로 그 행한 것에 대해서 심판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재판관이십니다. 사람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공정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얼마나 우려먹는지, 바울이 이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3, 4대 째 예수를 믿는 집안이고, 교회에서 봉사를 얼마나 하는 가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여기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든, 얼마나 선행을 했든, 어떤 행위나 공적과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기보다 날마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판단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볼 때마다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횟수나 경력이 쌓여갈수록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랑거리를 쌓기 쉽습니다. 자신의 신앙적 자랑으로 다른 사람의 기를 죽이고 판단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과 정죄가 더 늘어가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은혜를 더 받았고 더 나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위에 서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율법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양심의 법에 따르지만, 구체적인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셨는데도 그들이 불순종하고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무서운 책임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를 받고 훈련을 받고 직분을 가진 것은 무서운 책임입니다. 알고도 왜 그렇게 살았느냐, 그 직분을 가지고 왜 그렇게 살았느냐 하실 것입니다. 모를 때와 다른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1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출소하는데, 교회 성가대가 와서 축하해주고 전도사가 두부를 주면서 이제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때, 금자씨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 “너나 잘하세요!” 풍자적인 말입니다. 감옥 밖에서 잘난 체하며 사는 사람들, 그러나 감옥 안에 있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면서, 성가대의 출연이나 전도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띠는 영화였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의인인 것처럼, 수준이 높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것처럼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은 들킨 죄인, 밖에 있는 사람은 안 들킨 죄인일 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자신을 정당화하고 스스로 의인이 되어, 더 이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것을 바울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는 나쁜 인간이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경계선을 그으면서 점점 세상과 구별되어 그들을 상종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며 자신을 미화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면 십자가가 아니면 누구도 구원을 얻을 길이 없는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고 누구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왔고 받고 있으면서 믿는 자로서 마땅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평가하고,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의 횟수만큼 성화된 모습으로 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점검한다면 결코 남을 쉽게 판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외적 행위나 신앙 경력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입니다. 존 칼빈은 전적인 타락이라고 말했습니다.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9~32)」 여러분 중에 이런 죄들이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고 있지만 여전히 불의하고 추한 죄악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그렇게 쉽게 제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포장하는 기술이 늘어서 더 은밀하고 교묘한 죄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지만 그 근거를 나에게서 찾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개척 교회를 많이 세웠어도 그것이 나의 자랑이나 의가 되어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깨닫는 것은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자라는 깨달음이 깊어져 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는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의를 얻은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을수록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 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눈곱만큼도 구원을 얻을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고 남을 평가할만한 실력도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왜 그토록 십자가를 강조하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나 자신에게서 자랑거리를 찾고 자신을 더 멋진 모습으로 포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삶을 산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잘못된 의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면이나 자랑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날에 인간의 모든 공력은 불에 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쓸수록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삼십년을 믿었든 이제 믿기 시작했든 동일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끊어지면 살 자가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믿으면 믿을수록 더욱 더 겸손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에서 살아가는 삶이 가장 안전하고 은혜를 유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잡고 은혜를 받은 만큼 더 책임 있는 자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살피고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판단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지금까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하나는 교회 내의 분쟁의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 사이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니 하는 파당들이 생겨나 같은 말을 하지 않고 마음과 뜻이 합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고전1:10-12).
다른 하나의 문제는 참 지혜의 문제입니다. 참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미련한 것으로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야말로 참 지혜임을 확신시키는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 하는 자들은 멸망할 자들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로(고전1:18-24) 믿는 이들은 구원받는 이들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지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고전2:1-14).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가르침으로 얻게 되는 지혜>라는 주제 안에서 분쟁의 문제와 참 지혜의 문제를 하나로 통합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 하는 것도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지어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는 것도(고전3:3-4)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로 믿을 수 있는 것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서기 때문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하는 파당을 짓지 않는 지혜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성령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나뉘지 않고 하나 되는 것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에 연결시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이 그 안에 계셔야 하고,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믿는 지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나 되는 지혜가 있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혜가 있어야 하나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지혜가 없으면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론적인 입장을 먼저 본문 16-17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앞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쓰면서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했고 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3:3) 한 바 있습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이제는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본문 16절) 하는 것은 모순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변화와 그 열매가 하루 아침에 맺히는 것이 아니고 평생을 거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이해할 때 모순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고린도 교회는 그 안에 파당과 시기와 분쟁이 있으므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교회이고 하나님의 성전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교회라는 현실을 지적한 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무릇 교회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마땅히 성령께서 계셔서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터 위에 서고 그 어떤 파당과 시기와 분쟁이 없어야 할 것이라는 원론을 말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라고 한 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라기보다 집단적으로 교회를 가리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령께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나 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는 교회 안에서의 파당과 시기와 분쟁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가리칩니다. 다시 17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령에 거슬러서 교회 안에서 파당과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는 일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멸하시리라는 것입니다. 파당과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사탄의 본업이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한 말은 교회의 하나 됨이 그 거룩함의 본질적 요소임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수 없이 많은 갈래로 나뉜 한국교회가 얼마나 거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릴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 16-17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에 관한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사도 바울은 18절 이하에서는 다시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며 이런 저런 파당으로 나뉘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을 계속합니다. 먼저 18절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합니다. “이 세상에서”라고 한 것은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기준으로 지혜 있다 하는 자는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것을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택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와 성경적 근거를 이어지는 19-20절에서 제시합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은 미련한 것이라 하지만 사실은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라고 뒤집어 말하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다”는 것은 욥5:13에서 가져왔음을 말하는 것이고,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한 것은 시94:11에서 원용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21절 이하에서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요약하며 결론짓습니다. 21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합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 한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있다면 그로 인하여 만물이 다 우리에게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속하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만물이 다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만물이 우리의 것이기에 파당과 시기와 분쟁 같은 것이 우리의 삶에 들어올 자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다 소유한 사람들이 뭐가 아쉽고 탐이 나서 파당을 짓고 시기하며 분쟁을 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자랑해야지 왜 사람을 자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을 자랑하며 그 각각의 사람을 따라 또는 그들 각각의 이름으로 여러 당파를 이루는 것처럼 어리석고 하나님을 향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22-23절에서는 마지막으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가 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것이라는 말은 거꾸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말하듯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것이 아님을 강하게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각각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속한 자라.”(고전1:12) 하는 것은 사람을 자랑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을 자랑해야 하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22-23절을 이 말을 뒤에서부터 해석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의 주인이 아니라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생명체가 죽고 사는 일에 있어서도 주권자이시고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 모든 일도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그 안의 모든 존재와 생사를 다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모든 권세는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권세는 교회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한 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된 모든 신자는 더 이상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에 지배를 받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기 이전에는 세상에 속하여 그 힘과 논리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고 그 세상에 적응하느라 고되게 살았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세상이 다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기 전에는 생사의 문제가 늘 우리를 억누르고 그 문제에 사로잡혀 불안하고 부자유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기 전에는 현재와 미래의 삶이 다 불확실한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나라의 영원히 복된 삶에 대한 소망과 확신 속에서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같은 이들도 다 우리를 위하여 일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모두 우리처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한 분 하나님, 한 분의 터 그리스도, 그의 지체로서의 한 몸이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나 아볼로파나 게바파 같은 파당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일이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세상의 지혜를 따라가려는 불신앙적이고 무지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신앙과 교회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확실히 믿고 받아들였는가?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튼튼히 서 있는가? 우리 교회에는 이런 저런 파당이 없는가? 어떤 파당에 속하여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분쟁을 일삼지는 않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며 지내지는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행실을 철저히 반성하고 단호히 내던져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히 복된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외에는 그 어떤 세상의 사조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출신지역을 따른 것이든 출신학교를 따른 것이든 정치적 성향을 따른 것이든 교회 안에서 그 어떤 파당에 가입하거나 그 존재를 인정조차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진정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켜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4가지 핑계
로마서 2:1-16 / 피영민 목사
서 론
로마서의 전체 주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지,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받는 것인지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인간에게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인종, 성별, 종교,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나는 내 힘으로 천국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천국에 가려면 죄가 호리라도 없어야 하는데, ‘호리’는 ‘먼지’를 가리킵니다. 먼지만큼도 죄가 없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력으로 천국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외래적인 의’가 있어야 천국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없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1장 18~32절에 바울은 첫 번째 집단인 이방인 불신자들, 부도덕한 불신자들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이들은 경건치 않고 불의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이고,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로마서 2장 1~16절에 두 번째 집단인 도덕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고, 세속적으로 형통한 사람들이고, 지성도 탁월하고, 돈도 많고, 심지어 얼굴도 잘 생긴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유대인 중에도 많이 있고, 이방인 중에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명 ‘금수저’입니다. 이들 중에는 유교, 불교, 회교 등 종교를 가진 사람도 있고, 종교를 갖지 않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 즉 도덕적인 불신자들을 향해서 부도덕한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천국에 들어갈 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 앞에 세워놓으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노숙자와 같은 신세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의 옷이 없는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도덕적인 불신자들 역시 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1장의 죄인은 추악한 죄인이고, 2장의 죄인은 깔끔한 죄인입니다. 로마서 1장의 죄인은 공개된 죄인이고, 2장의 죄인은 은밀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갖는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 모두 하나님의 의가 없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기록된 부도덕한 불신자들에게 “너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네 죄에 따라 심판받아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그러려니 생각할 것입니다. 저질러 놓은 죄가 많다보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2장에 기록된 도덕적인 불신자들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충분히 깨끗한 삶을 살았는데, 내가 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심판 받고 지옥에 가야 하느냐?” “나를 왜 죄인이라고 부르느냐? 나를 왜 지옥에 보낸다고 겁을 주느냐?”고 항변하고 하나님과 논쟁하려고 할 것입니다. 뭘 잘못했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항변을 받아들여서 도덕적인 불신자와 대화하고 논쟁하는 방식으로 로마서 2장의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판단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께 변명하고 핑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생각에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부도덕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불신자들은 자기들이 부도덕한 불신자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부도덕한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용서해 줄 구주가 필요하지만,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우리게는 구주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너희 역시 죄인이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웅변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불신자들의 변명은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Ⅰ. “나는 불의한 삶을 살지 않았다!”(I am not unrighteous!)
도덕적인 불신자들은 “내가 뭘 잘못했나? 내게 무슨 불의가 있는가? 나는 의로운 존재다. 그런데 나를 왜 지옥에 보내시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부도덕한 이방인들의 불의와 추악에 대해 반대하고 싫어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나도 부도덕한 불신자들이 저지르는 악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옥 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또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복음이 필요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1~12절에 기록된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는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가 아니라 나름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바리새인을 향해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죄 많은 세리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부도덕한 불신자들이 스스로 “나는 불의하지 않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 바울이 어떻게 답변합니까?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남에게 동성애자라고 판단하고 비판하느냐? 그런 너는 성적인 죄가 없느냐? 나는 네가 외도한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남을 윤락녀라고 비난하느냐? 너도 비슷한 짓 한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다. 네가 남을 불의하다고 판단하면서 너도 불의한 짓을 많이 하는구나. 교만하다고 정죄하면서도 너도 교만하구나. 타인을 향해 부모를 거역하고 학대한다고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너 역시 네 부모에게 옷 한 벌 사드린 적이 있느냐? 남이 하면 불륜이고 네가 하면 로맨스냐? 남이 하면 교만이고 네가 하면 공의냐?”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도덕적인 불신자들이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너도 동일한 잣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사람 앞에 네 죄를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숨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2장 16절에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3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우리 인생의 영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불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빨리 꼬리를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갈 의를 얻는 것이 천국가는 유일한 방법인 줄로 믿습니다.
Ⅱ. “하나님은 내게 진노하지 않으셨다!”(God is not angry with me!)
도덕적인 불신자들 중에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보다 현저하게 잘 살고 있다. 그들이 교회 다니며 받은 복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은 내게 진노하지 않으시는 분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깨끗하고 단정한 삶을 살기 때문에 가정이 평안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으니 가정이 평화롭고, 자녀들도 잘 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출세하기도 하고, 지도자로 추앙받고, 텔레비전에도 자주 출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 내게 진노하셨다면 내가 저주받은 인생, 형벌이 따르는 인생이 되었을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지옥, 형벌, 구원자 따위는 자신과 상관없는 표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지도 않지만, 혹시 하나님이 계신다 할지라도 나를 저주할 분은 아니시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바울은 답변은 “네 말이 옳다. 네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구나. 하나님이 네게 인자하시고 오래 참아주셨구나. 그러나 너는 하나님이 네게 인자하시고 오래 참아주신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너로 하여금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도록 하시기 위함임을 알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게 인자하셨는데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느냐?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오해하느냐?”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얼마나 친절합니까? 그런데 자식들이 장성한 후에 부모님이 여전히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 없습니다. 스스로 컸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이 어떤 고위직에 오르고, 어떤 부를 쌓았든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모든 것을 아낌없이 공급했고, 인자하고 용납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알고 무시한다면 그를 인간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4~5절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복을 받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모욕적인 반응으로 응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 있다는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Ⅲ. “하나님은 나를 특별대우 해 주실 것이다!”(I am a special case!)
도덕적인 불신자들 중에 “내가 일평생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것을 하나님이 잘 아시기 때문에 심판의 날이 도래한다 해도 나는 특별히 예외로 봐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꼭 믿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봐주시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있다 해도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황된 착각입니다.
우스갯소리로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교통법규를 어기고 경찰에게 붙잡혀 “한 번 만 봐주세요!”(Please, Look at me once!)라고 할 때, 경찰이 “국물도 없다!”(No Soup!)라고 대답한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선 도덕적인 불신자들이 아무리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해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국물도 없다고 대답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봐주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11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낯을 봐주지 않으십니다.
세상 판사들은 낯을 봐줍니다. 같은 동네 사람, 친인척, 학교 동문이면 좀 봐주고, 또 뒷 돈을 챙겨주면 좀 봐주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힘이 없으면 지는 것이 이 세상의 재판입니다. 권력을 잡으면 유죄도 무죄가 되는 매우 악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 모든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뇌물 따위가 통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신 후에 지옥에 보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 상태의 모든 인간은 이 심판을 통과해서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얻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행위대로 이뤄지지만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면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면해주겠다고 하시는데 왜 꼭 가서 심판을 받아야 되겠다고 합니까? 받으면 틀림없이 지옥행이 분명한데 왜 심판을 받으려 합니까? 자기 의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번 받아보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에 통과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봐주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그 마음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참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Ⅳ. “성경을 알았거나 또는 몰랐기 때문에 진노하시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I know the law, I don’t know the law)
성경을 중심으로 한 두 가지 변명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는 성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진노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이방인들은 “나는 성경을 본 적도 읽을 적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진노하시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13절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율법을 모르고 행치 않았으니 죄인이고, 유대인은 알고서도 행하지 않았으니 더 큰 죄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3~14절에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권능을 행하시고 많은 가르침을 주신 지역의 사람들이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이방 땅의 사람들보다 벌이 더 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내가 모세의 율법을 알았는데 설마 나를 지옥에 보내시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고서도 행치 않은 그들을 더욱 악한 자들로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 크다”고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의 경우 “나는 성경을 몰랐고, 읽어 본 적도 없는데 그런 나를 지옥에 보내시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세종대왕이 하나님 앞에 서서 “저는 성경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의 대답은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14~15절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몰랐을 지라도 내 율법은 너희 마음에 기록해 두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양심에 기록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살인이 죄인 줄 몰랐느냐? 간음이 죄인 줄 몰랐느냐? 도적질이 죄인 줄 몰랐느냐? 부모 학대가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느냐? 네 양심은 그것을 괜찮다고 하더냐?”라고 물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어찌 핑계하며 무죄하다고 책임이 없다고 항변하느냐?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었으나 행치 않았기 때문에 망하고, 이방인들은 양심에 기록된 율법을 행치 않음으로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결 론
사도 바울은 지금 검사가 죄인에게 논고하듯이 모든 도덕적인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대화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가장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경우입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불신자들, 이성적으로 탁월하고 공부를 많이 한 불신자들, 세상 명예와 권력을 가진 불신자들, 이런 사람들은 목사 알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만 가지 복을 다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주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불신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변명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미국에서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재판에 회부되는데, 가면 판사가 딱 한 마디 물어본다고 합니다. “Are you guilty?”(죄가 있는가?) 그리고 대답하지 못하면 벌금형을 내린다고 합니다. 복잡하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딱 한 마디 물어보는 것입니다. “죄 있습니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도덕적인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으시면 그 누구도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그래서 부도덕한 불신자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도덕적인 불신자들도 역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맹렬한 진노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지 못하면 결국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져 영영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의 좋은 소식,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아 천국 들어갈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결코 복음을 멸시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받은 의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늘 겸손하게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인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재물, 권력, 명예가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 모두 무너져 버릴 허망한 것들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소망이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복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항상 기쁨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택한 백성의 특권과 의무
로마서 2:1-11 / 이필재 목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 참으시다가 마지막에는 내버려두겠다! 내버려두는 자체가 심판이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봤습니다. 그런데 2장에 와서는 이 죄를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장에 와서 1절에서 11절까지는 유대인, 즉 하나님의 택함을 제일 먼저 받은 자들에 대한 죄 책망! 이것이 오늘 말씀이고 다음에 볼 12절에서 16절까지는 이방들에 대한 죄의 책망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몇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그 첫째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타락이다.”라고 것입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동기는 유대인들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 상태는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인이기는 죄인이지만 이방 사람들보다는 깨끗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의 생각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시정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크리스챤으로서 간혹 오만한 생각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죄성에 있어서는 그래도 다르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측면에서 예수를 믿는 자아라는 그 자체 하나가 다른 것이지 죄성에 있어서는 똑같은 기회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학에 ‘죄론’이라고 하는, 어떤 면에서는 ‘기독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완전 타락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의로움이 조금이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는 많은 노력을 해서 내가 쌓은 의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도움이 되는 신학의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 구원관의 신랄한 비평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너희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갈라디아서 5장에 “그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 자신을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주어져있지 아니한 타락한 존재를 하나님의 완전 구원으로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뿐이지, 만약 인간이 구원의 요소를 1퍼센트라도 가지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런 결과가 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그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공로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지, 만약 내 의가 쌓여서 그것이 구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다면 십자가는 필요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완전 타락에서 완전 구원함을 받은 것이 십자가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아마 이것은 수천 년 내려오면서 교리적인 문제로 가장 심각하게 다루어져 내려온 교리입니다. 우리가 지지난주에 종교 개혁주일이 지나갔지만 종교 개혁운동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고난을 겪으면서 의를 쌓으면 그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는 그런 기쁨 때문에 라테라노 성당의 그 딱딱한 참나무로 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피를 흘리면서 고통을 뿌릴 때 이 의가 쌓여서 구원에 이른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그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렇다면 내가 공로를 쌓아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뭐하는데 필요 하느냐? 아무 쓸데없는 것 아닌가?’ 이제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기독교 기초적 진리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완전 타락에서 완전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점에서 이방인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냉철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헌신적 노력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몸을 바쳐 헌신적 일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선교사처럼 선교하러 외지에 나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헌금을 해서 하나님의 일에 결정적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자선 사업에 투신해서 고아들이나 장애인들을 돌볼 수도 있고, 때로는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지 내가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의가 되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우월감은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지옥 갈 생각을 아예 안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살던지 어떻게 믿고 있던지 아브라함 때 이미 선택 받았다는 그 한가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많이 한 사람, 즉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에 영향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태 신앙으로 출발해서 일평생 80~90년 긴 세월을 예수 믿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오랜 신앙생활도 구원의 조건은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이 택함을 주셔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긴 시간동안 예수를 믿은 내용이 자신의 의가 되어서 구원의 조건이 되는 교리는 절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말 한마디 잘해서 구원받은 강도나 80~90년 긴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나 영생의 구원문제는 똑같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말 한마디 하고 그 자리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런 구원을 받은 사람과 모태에서부터 평생을 신앙생활한 사람과 영생의 영혼 구원 문제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사람은 이런 때 구원해 주고 저런 사람은 저런 때 구원해 주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는 것이지 “네가 쌓은 그 의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이 우월감, 구원의 교리 우월감을 바울이 지금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시간 생각을 좀 수학적으로 계산하실 것 같습니다. ‘괜히 일찍 예수 믿어가지고 고생만 하고 말이야. 실컷 죄 짓고 좋아하는 일만 평생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목사님 좀 오라고 해!” 그 자리에서 세례 받고 그 자리에서 하늘나라 가게 해달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계획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면서부터 예수의 은혜 안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말 한마디 하고 구원받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도대체 세상의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 내가 해보지 않아서 몰라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웬만한 것은 다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간접 경험은 하니까 다 알 수 있는데 세상에 무슨 재미가 그렇게 많은지 저를 보고 목사 하면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봅니다. 이제 바울 선생은 유대인을 책망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네가 이방 사람과 다른 것이 뭐냐? 네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이방 사람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말하는데 다른 게 뭐냐? 너도 똑같이 살고 있으면서 무엇이 잘났다고 남을 판단하고 있느냐?”하고 1~11절은 유대인에 대한 책망입니다. “네가 네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만약 생활면을 따진다면 이방 사람보다도 네가 더 악하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착하거나 더 훌륭하게 산다는 무슨 보장이 있습니까? 착한 일만 따지면, 선행만 따진다면 마음 착한 사람이 세상에 더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깨끗하게 사는 사람, 정직한 사람 교회 안보다 밖에 얼마든지 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죄 사함의 은총을 얻게 된다면 오히려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너희가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합니다. 도덕적 양심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즉, 예수 믿는 자나 불신자나 다를 바가 전혀 없다고 죄성에 있어서는 똑같다는 겁니다. “너도 똑같은 죄를 짓고 다니고, 너도 똑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택함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다른 것이다. 네가 무엇을 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생각에 의해서 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뿐이지 네가 뭐가 달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다녀보면 죄의 개념이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문화적으로 죄의 개념이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굉장히 큰 죄가 되는데도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 죄도 안 되고 오히려 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경 하나만 넘으면 달라지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됩니다. 캄보디아, 베트남을 가보면 오토바이가 택시입니다. 여자들이 오토바이 택시를 많이 이용합니다. 그러면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타야 됩니다. 다리를 벌리고 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게 그 나라의 문화입니다. 만약 캄보디아에서 오토바이 운전하는 사람과 똑같은 동작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그 여자는 아주 품행이 나쁜 여자로 취급받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싹 넘어와서 베트남 사이공에서는 그렇게 한쪽으로 타는 여자들이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보신탕 얼마나 좋은 음식입니까? 그 좋은 음식을 못 먹고 사니까 의사들이 환자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도 봤습니다. 그러면 빨리 회복되고 영양적으로 좋은 거니까 먹고 건강하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자꾸 말이 많고 싸우느냐? 개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싸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개고기를 나쁘게 생각한다던지 먹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냥 식성상 안 먹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프랑스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식인종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이것이 문화입니다. 또, 이 죄의 개념은 문화적으로 다른가 하면 개인적으로도 다릅니다. 내가 어떤 가문에서 어떤 지역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은 이게 큰 죄라고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아무 죄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흑백 논리를 적용해서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틀리다.” 이렇게 하기가 힘듭니다. 죄론을 공부하면 매우 복잡하고 어떻게 말하기가 어려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텍사스에서 목회를 할 때 아주 우스운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졌었습니다. 한국에서 전혀 교회를 모르던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니까 그 시절만 해도 한국 사람이 얼마나 살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수십 명 모여 예배를 드리고 그랬는데 텍사스에 와서 예수를 처음 믿은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한국에서 아주 유흥가에 몸이 젖은 바람둥이였습니다. 미국에 와서 답답해 죽을 지경인 겁니다. 찾아보면 인간이 사는 동네에 다 그런 게 있게 마련이어서 어떻게 찾아냈는지 미국에 와서도 그런 생활을 그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나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그러면 주변의 남자들이 같이 다니는 그런 분위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국에서 모두 그런 곳에서 살았으니까 여자들이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거 이민까지 와서 가정이 파괴되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주범을 잡아내야 된다.” 여자 몇 명이 모여서 “앞장서서 주동자 역할을 하는 남자를 때려잡아야겠다. 이 사람 때문에 우리 남편까지 망가지고 이게 뭐냐?” 그래서 여자들이 무서운 정도로 독이 올랐습니다. 여자 5~6명이 어떻게 전략을 짰느냐 하면 “아무래도 이 사람의 부인되는 여자는 이걸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저렇게 태연하게 내버려두지! 우리가 그곳에 가서 이 일을 폭로해 버리자!”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자기 남편들도 이제 피해자가 되고 그러니 “이판사판으로 뒤집어엎어서 결정을 내야지 안 되겠다!” 그런데 그 부인은 충청도 아줌마인데 마음이 좋아 생긴 것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미국에 와서 그때부터 처음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이 나한테도 몰려와서 “목사님도 알고 계세요. 일이 이렇게 되어 가는데 이걸 어떡합니까?” “내가 그런 일까지 어떻게 합니까? 다 본인들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려면 하시고 나는 참견 안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들이 그 부인에게 몰려가서 “이 마음 좋은 아줌마가 남편이 그러고 다니는 것을 아무래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 부인에게 가서 “알아요, 몰라요?” “무얼 말이요?” “뭘 말이냐니? 당신 남편이 바람피우고 우리 남편들까지 다 물들어 간단 말이야? 만날 바람피우며 돌아다니는데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 뭐하는 거야?” 막 야단치면서 당장 어떻게 하라고 소리를 치는데 이 아줌마의 대답! 이게 유명한 휴스턴 사회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가만 두어! 메뚜기도 한 때여!” 죄의 개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 남편 재미나게 잘 사는데 왜들 가지고 그러는 거야?”
아주 우스운 얘기로 지나갔는데, “이방인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너희가 뭐가 잘났다고 남을 판단하느냐?” 유대인들 보고 책망을 가하는 겁니다. 간혹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 저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더 나쁘다는 말보다는 ‘똑같다’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더 나빠진 것은 아니다. 더 나쁜 사람이 예수를 믿은 것이다.” 이게 맞는 말입니다. 특별하게 더 잘난 것도 없고 특별하게 더 못난 것도 없고 사회인으로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다르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유대인들의 책임이 뭔가? “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이유는 그 은혜를 나누어주라는 뜻이다.” 예수 믿은 자가 뭐가 다른가? 먼저 예수 믿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먼저 택함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직 은혜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합니다. 죄의 개념도 예수를 안 믿을 때와 예수를 믿을 때 개념이 다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큰 죄가 뭡니까? 불신 죄입니다. 하나님 안 믿고 사는 죄가 가장 큽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알게 된 죄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나님 안 믿는 죄가 제일 큰 죄라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은혜를 입어 죄의 개념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것을 빨리 전해주어야 될 책임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이 일은 하지 않고 우리들만이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국수주의에 사로잡혀 막 비판하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죄 짓는 것과 모르고 죄 짓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 4~5살 어린이가 총을 가지고 놀다가 발사가 되어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아이를 재판합니까? 그 아이를 감옥에 보냅니까? 아닙니다.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인다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죄가 아닙니다. 그냥 모르고 장난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그렇게 했을 경우 일급 살인에 속해서 자기도 죽어야 합니다. 똑같이 총을 쏴서 사람을 죽였는데 알고 한 사람과 모르고 한 사람의 차이는 사형 죄와 무죄의 차이입니다.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겁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먼저 알고 있습니다. 먼저 알게 된 자는 그만큼 책임이 따른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알고도 지은 죄는 모르고 지은 죄보다 더 큰 죄인이 되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앙이 좋아질수록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겁니다. 마지막에 바울을 뭐라고 그럽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신앙이 좋아졌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겁니다.
인간은 과연 거룩하여 질 수 있는가? 그러면 인간의 거룩이나 성화와 중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 “거룩해졌다. 중생했다. 성화된 인간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의롭게 보인다는 것은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그나마 아름답게 보일 뿐이지 죄성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본성의 타락성은 똑같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만 의를 행해도 그것이 의롭게 보일 뿐이지, 본래의 인간은 다 의로워야 되는 것인데 너무 어두워진 세상 때문에 누가 무슨 조금 좋은 일을 했다든지 의로운 일을 했다든지 하면 그것이 밝게 빛나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30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제 대학원 동기생 한명이 “솔로몬”이라는 집을 오픈했다고 동기생들을 다 오라고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전도사 시절이니까 ‘솔로몬이라, 이게 뭐하는 집인가?’ 아주 관심이 많아서, ‘이 친구가 아주 믿음이 좋은 친구인데, 대학원 다닐 때도 동기였는데 내가 몰랐구나!’ 그러니까 동기들이 꽃을 하나 사들고 광교라고 하는 지역에 축하해 주러 모두 모였는데 ‘솔로몬’이라는 간판을 한 곳에 들어가 보니까 뭐냐 하면 최고급 룸살롱 술집을 낸 겁니다. 이 전도사가 꽃을 하나 사들고 갔는데 이게 앉아있어야 되는지, 나가야 되는 건지, “축하합니다!” 해야 되는 건지 “이거 집어치워라!” 해야 되는지 정말 혼란했습니다. 그러나 동기들이 “아! 오랜만이야!” 그래서 엉거주춤 거리며 “아니, 불이나 좀 켜! 왜 이렇게 컴컴해? 이거, 컴컴해서 잘 분간도 안 되네!”, 그 친구가 저를 보고 “우리 전도사님은 여전히 전도사님이구나! 세상을 너무 모르는구나! 이런 곳은 컴컴해야 돼! 그래서 컴컴하게 해놓고 불그스름하게 해 놓아야 사람들이 예뻐 보이는 거야! 주름살도 안보이고, 여드름도 안보이고, 주근깨도 안보이고, 흰머리도 안보이고 윤곽만 보이니까 뼈다귀는 누구든지 다 잘 생겼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사람들이 돈을 많이 쓰고 가는 거야!” 30년 전인데도 기억이 납니다. 사람의 의로움이란 세상이 죄로 어두워져서 그것에 묻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지 하나님의 의의 불을 밝혀버리면 다 죄인이고 다 드러납니다. 다 똑똑히 보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눈이 침침해지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잘 하신 겁니다. 부부 간에도 침침해져서 주름살도 안보이니까 옛날처럼 그냥 예쁘게 보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유대인이 된 죄! 더 크다! 너희가 더 죄가 많다! 왜? 먼저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랑만 하고 이방인 멸시나 하고 뭐하는 거냐? 너희가 죄가 더 많다! 왜? 먼저 알았으니까! 이방 사람들은 그게 죄인지 모르고 산다. 왜 알려주지 않았느냐? 먼저 알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책임이 있는데! 하나님이 너희들을 택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과 구원을 온 세상에 빨리 나눠주라는 뜻 아니냐? 왜 안하고 너희들 그렇게 사냐?” 지금 책망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먼저 받은 자는 나눠줄 의무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 두 달란트 받았던 자는 열심히 나가서 활동했다고 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보이지도 않게 감춰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심판 때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주었는데! 그 있는 것을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라!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왜 일 안하고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준 거 가지고 나가서 열심히 일해야 될 거 아니야?”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자꾸만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는 소비 기관입니다. 왜? 주라고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좀 걱정되시죠? 금년에 314명의 선교사를 1년 파송했으니 그 경비가 얼마입니까? 그런데 제가 우리 행정 목사와 지난 10월 말에 계산을 해봤습니다. 일 년에 헌금 얼마 들어왔고 얼마 냈느냐? 10월 말까지 금년에 새로 정해서 선교비 나간 거만큼 헌금이 더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또 그만큼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지혜롭게 생각해서 먼저 받은 자는 아직 그것을 받지 못한 자에게 주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나누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라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에서 가장 선교를 많이 하는 나라를 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나라가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도 한때 가장 강대국이 되었고, 독일도 한때는 그런 역사가 있었고, 영국이 그런 역사가 있었고, 근래에 와서는 미국이 그런 역사 속에 있고, 지금 21세기는 한국이 그 역사로 가고 있고 그런 것 아닙니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에 대해서 모르느냐 말입니다. 먼저 받은 자는 나눠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유대인을 그대로 두시는 것인가? “그 인자하심이 너를 회개케 하기 위하여 길이 참으시매 풍성함이 있는 것이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죄를 용납하시는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내용이 바로 기다리심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은 길이 참으십니다. 죄 짓는 현장을 금방 그 자리에서 때려잡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현장 심판을 해버리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끔가다 고삐를 잡고 계십니다. 가는 데로 두었다가 어느 한때는 잡아당기십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소를 부려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처음 송아지가 태어나면 자기 맘대로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가 되면 코를 뚫습니다. 불을 달궈서 사방을 다 묶어 놓고 새빨간 부젓가락으로 강제로 생살에 뚫습니다. 그러면 소가 얼마나 아픕니까? 소리를 지릅니다. “지~익”하면서 코를 뚫고 그것을 또 넓히기 위해서 막 돌립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코에 엄지손가락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 거기에 막대기를 깎아 낍니다. 그래서 딱 묶어 버립니다. 고삐를 매고는 뒤에서 그거 하나만 가지면 됩니다. 말만 안 들으면 뒤에서 잡아당기면 “으악”하면서 따라옵니다. 아프니까 꼼짝 못합니다. 그러니까 소가 말을 안들을 때는 그 고삐만 잡아당기면 꼼짝을 못합니다. 다른데 잡아봤자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다 고삐를 잡고 계십니다. 말 안 들으면 잡아당기십니다. 어떤 때는 그냥 둡니다. 넓은 들판에서 풀 뜯어먹도록 가만 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면 고삐를 잡아당깁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냐에 관심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한 대로 하십니다. “심판에 있어서 유대인이 첫째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헬라인이 나중이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네가 먼저 받았잖아?” 반대로 유대인의 특권이 뭐냐? “존귀와 영광도 너희들이 먼저 받을 것이다. 네가 잘하면 존귀와 영광의 특권이 먼저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받은 은혜를 선하게 사용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존귀와 영광이 먼저 오고,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는 심판이 먼저 오게 되어있다. 누구도 다 마찬가지이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우월감 버려라.”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선생된 자가 심판이 더 크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판이 더 크고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영광이 더 큰 것! 이것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의 하나의 위치다.”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 알아서 해라!” 그런 뜻입니다. 11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이 특별히 봐주시는 것이 없다. 목사라고 해서 더 봐주는 거 없다. 잘하면 영광이 클 것이다. 잘못하면 심판이 더 크다. 아느냐?” 그래서 우리는 존귀와 영광을 크게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아니면 심판을 더 많이 받을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먼저 된 자의 위치입니다.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을 아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축복의 결론은 고집을 버리고 회개하는 심령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죄인됨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가고 내게 주신 큰 구원의 은혜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서 아직 은혜의 개념 속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다! 너희 유대인들은 왜 안하느냐? 유대인에게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이방 나라로 보내셨으며 거기에서 온 세상의 구원의 빛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오늘도 흩으신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흩어놓으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하신다. 먼저 받은 자는 주어야 한다.” 이것이 책임입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80년 예수 믿은 사람이나 말 한마디 한 사람이나 똑같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그만두고 죽을 때 임박해서 회개하고 하늘나라 가자!” 약삭빠른 그런 길이 있고, “나는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을 지금까지 못했다. 나의 남은 생애는 내게 먼저 허락해 주신 은혜를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서 온 세상에 알려주는데 내가 협조하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믿음대로 선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로마서 2:1-16 / 조상호 목사
EX) BC.4세기경 당시 죄를 지으면 노예가 되어 배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말이 노동이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 노예선을 시찰하였다. 대왕이 지나가자, 이 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죄수들은 저마다 자기는 아무 죄가 없는데 애매하게 끌려와서 이토록 억울하게 노동을 하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대왕은 그 죄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대는 아무 말도 없느냐?" 그러자 그 노예는 "대왕 폐하,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 이 고생을 마땅히 해야 할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대왕은 "너 같은 죄인이 어찌하여 이 의인들 속에 끼어서 의인들을 더럽히겠느냐. 선장! 이 죄인을 어서 석방시켜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신의 결점이나 잘못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지난 1개월 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네 자신을 알라"고 할 것이다. 국어 선생님은 "네 주제를 알라"고 할 것이다. 수학선생님은 "네 분수를 알라"고 할 것이다. 지리 선생님은 "네 자리를 알라"고 할 것이고, 미술 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1) 착각은 자유다. 그러나 주제파악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고생한다. 주위에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 특별한 아이템도 없으면서 벤처기업이 뜬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삭막한 그곳에 뛰어든다. 머리는 따라가 주지도 않는데, 대학에 가기 위해 죽자살자 재수, 삼수, 4수를 한다. 운동신경도 특출 나지도 않는데, 삼성의 이승엽선수처럼 홈런왕이 되겠다고 야구 방망이들고 왔다 갔다 한다. 물론 "당신이 나에게 10불이라도 투자했소? 공부 잘하라고 책 한권 사다 준 적이 있소? 내 비즈니스에 상관하지 마시오"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남들에게 민폐를 끼친다. 부모님에게, 친구들에게, 형제들에게 민폐를 끼친다. 그러므로 착각은 자유이지만, 주제 파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 파악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뿐 아니라, 믿음 생활에서도 중요하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나의 주제 파악은 잘하지 못하면서 남의 주제만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다. 원래 오늘 본문 말씀을 받아야 할 대상은 유대인들이다. 지난주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들,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의 수많은 죄악을 고발했지만, 오늘은 유대인들, 즉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죄악을 고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생짜베기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들었고 조상 대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던 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남을 판단만 사람들이었다.
1절을 보자.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오늘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유대인을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는 의롭고, 남은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한다. 나는 문제가 없는데, 남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일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일은 잘못되었다고 소리를 치기도 한다. 말씀을 들어도 나에게는 적용을 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을 한다. 왜? 나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번의 설교는 점쟁이나 관상쟁이 만나러 다니는 사람에게나, 동성연애자들에게 해당하는 설교이고, 오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야”라고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저 설교는 이장로나 김집사가 들어야 할 설교인데, 그 김집사 오늘 예배에 왔나? 안왔나?"라고 하며 선포되는 말씀을 자신의 메세지로 받지 않고 주위만 두리번거린다. 또 "아이구, 그 친구가 꼭 들어야 할 설교인데, 우리 아이가 꼭 들어야 할 설교인데”라고 하며 타인에게만 적용하려고 하지 본인에게는 전혀 적용하지 않는다. 오늘 본문은 나는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남만 판단하는 유대인들, 아니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남을 판단하는 너 조상호야, 남을 판단하는 너 크라이스트처치 순복음교회 성도들아, 웃기고 있구나. 변명하지 마라. 너는 핑계하지 못한다. 판단하는 네가 똑같은 일을 하는 구나"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는 타인만을 판단하는 우리들에게 경고하신다.
2)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하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확실'이라는 발음을 잘해야 한다. '학실'이 아니고 '확실'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정확무오하다'라고 한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확실하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판단의 세가지 기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2절을 보자.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여기에서 나오는‘진리대로’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공의대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과 달리, 내면을 정확하게 보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의해서 판단하지 아니하신다. 구약 (삼상16:7)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로마서 당시의 유대인들은 분명 우상숭배자도, 동성연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도덕적인, 종교적인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고, 율법을 받았고,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경건한 척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과 할례라는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였다. 그들은 영적 교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정죄하였으며, 심지어 이방인들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너도 같은 일을 행하고 있구나’라고 밝히고 있다. 비록 유대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크나큰 죄는 저지르지 아니하였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너희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똑같이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정확하시다. 우리를 판단하실 때에 진리대로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공평하게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판단 잣대는 사람의 판단 잣대와 다르다.
EX) 지난 1월14일자 신문에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농사를 짓다가 85년부터 경기도 포천에서 결손가정 자녀 보호시설인「사랑방 쉼터」를 운영하는 원장 박모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TV의 각종 프로그램에 7차례나 <천사 원장>으로 소개된 사람이었다. 천사라고 소문난 그가 구속된 것이다. 그 이유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기 때문이다. 그는 93년 4월부터 초등학교 6학년 원생 김모양을, 중학교 1학년생인 최모양을 매주 2~3차례씩 성폭행하고, 또 다른 황모(17)양을 2~3주에 한차례씩 무려 6~7년동안 성추행을 하였다. 박씨는 이들이 반항하면 곡괭이 자루, 삽 자루 등으로 때렸고, 한 겨울에 3살 짜리 원생을 찬물에 담갔다 빼냈다를 반복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들을 천사표 사람이라고 TV에 출연시켜 박수 쳐주고, 또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성금까지 걷어 주었다. 웃기지 않나? 악마를 천사라니 말이 되나?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7년 동안이나... 이와 같이 사람들의 판단 잣대는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 잣대는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 늘어났다 줄어 들었다 하는 고무줄 잣대가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많이 배운 자나 전혀 배우지 못한 자나, 많은 물질을 소유한 부자나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나,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신다. 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을 마음대로 경솔하게 판단하지 마시기 바란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때문에 이웃을 정죄하지 마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모든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행한대로 판단하신다.
6절을 보자.“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판단하실 때에 행한대로 판단하신다. 이 말씀은 (갈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다.
7절에서 인내하며 선을 행하며 존귀함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들에게는 노와 분을 내신다고 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전달되어진 율법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율법을 들으며 살았다. 오죽하면 자신들의 집 문설주에 이 율법을 기록하여 놓기도 하고, 자신들의 옷자락 끝에 기록하여 달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율법대로 살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가 율법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요즈음 어느 사람들을 만나보면 “나는 4대째 기독교 집안의 자손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또“나는 모태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왔다고, 나는 주일학교 때부터 결석 한번 하지 않았다고, 나는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참석해서 수료증을 받았다”고 한다. 집안에 쌓아놓은 성경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성경말씀대로 산다고 착각을 한다. 그냥 매주일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크리스챤인양 스스로 생각을 한다.
EX) 저도 18년동안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에만 나오면 크리스챤이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생활기록부의 종교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어김없이 기독교라고 기입한 적이 있다. 저는 스스로 크리스챤이라는 생각 외에는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실 과거의 저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은 아니었고, 단순히 교회만 시계추 마냥 왔다 갔다 던 주일 교인이었다. 그러다가 만 18살 때 비로소 내가 죄인이며 나를 구속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신 것을 믿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여 크리스챤이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 분명하게 도전한다.
주님께서 판단하실 때에 우리가 성경책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우리가 몇 년 동안 교회에 출석했고,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는 것으로 판단하시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 앞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고 있느냐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대로 판단하신다. 그런데 혹시 이 말씀을 확대 해석해서‘율법을 행하여야 만이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물론 율법대로 항상 100% 행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 얻을수 있는 다른 길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을수 있다. 믿으시나? 오늘 본문은 율법만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듣고 삶 가운데에서 그 말씀대로 살라는 실천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대로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3) 하나님은 은밀한 것까지 판단하신다. 16절을 보자. “...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만이 알고 있는, 나의 내면을 주님이 아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누군가가 내 고민과 번민을 적어놓은 일기를 보았다고 하면 그 사람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의 가장 은밀한, 비밀스러운 것들을 다 알고 계시면서 후에 심판하신다.
EX) 옛날 중동지방의 유대인들은 경건을 추구할 때, 내면의 모습보다, 외적인 것에 신경을 더 썼다. 기도할 때도 일부러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큰 길가에서 큰 소리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였다. 그들은 걸을 때도 경건한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서 천천히 걸었다. 또한 오랫동안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곤 하였다. 그들은 마음상태는 무시하고, 단지 그러한 행위가 경건한 모습인 것처럼 착각을 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은 (마23:27)에서“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상상을 해 보라. 죽은 시체가 썩고 있는 무덤에 하얀색의 횟가루를 바른다고 해서 그 무덤이 바뀌어지나? 겉을 치장한다고 해서 무덤 속에서 나오는 시체 썩는 냄새가 사라지나? 아니다. 주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의 횟가루를 칠한 외면을 보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 내면의 은밀한 것을 보신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곳까지 꿰뚫어 보시며 판단하신다.
EX)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얘야, 어디서 그 사과를 얻었니"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과일 가게에서요" "아저씨가 주시던?" "아니, 안 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갖고 왔어요."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셔." 라고 어머니가 말하니까 애는,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못 보셨어요"라고 대답했다.
우스운 이야기 같이 들린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중국의 왕양명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모든 마음속까지 간파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소경 취급을 하여,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같이 여기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나? 캄캄한 밤에 검은 개미가 검은 돌 위를 기어가는 것까지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곳에 숨고 인간의 눈을 피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앞에선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불꽃같은 눈으로 꿰뚫어 보시며,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나의 모든 모습이 걸쳐진 것 없이, 벗겨진 상태로 심판받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는다.
우리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에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판단과 정반대로, 세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행한 대로, 그리고 은밀한 것까지도 판단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가겠는가? 또한 남을 쉽게 판단하겠는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스스로 판단하여야 한다. 남을 정죄했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향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죄된 모습을 돌아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게 된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다. 여기에 놀라운 축복의 비결이 있다.
여러분! 척하지 마라. 믿는 척하지 마라. 경건한 척, 착한 사람인 척하지 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앞에 노출되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죄 지은 모습 그대로 오셔도 상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용서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죄 지은 모습을 하나님 앞에 내 보이면 보일수록,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기쁘게 받아주신다.
판단보다 사랑과 격려를
로마서 2:1-8 / 김명환 목사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같이 어울려 사는 법을 잘 배워야 합니다. 내가 제일인 줄 알면 결국 혼자가 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부족한 존재입니다. 다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인 줄 알고 서로 격려해주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남을 격려하기보다는 남을 비판하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디 가도 비판하고, 칭찬할 것도 비판하고, 심지어 자기도 비판합니다. 그런 분들은 사랑과 격려가 넘쳐야 할 가정에서도 비판하고, 교회에 나오면서도 교회를 비판하고, 교인을 비판하고, 교회 일꾼과 중직들을 비판합니다.
그런 분들은 틀림없이 예수님도 비판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면 분위기는 어두워지고, 냉랭해지고, 그곳을 멀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격려하고 칭찬하는 분들이 있으면 분위기는 밝아지고, 그곳을 가까이하고 싶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살맛을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 살맛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 남을 판단하지 말라.
로마서 2장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에 1심에 승복하지 못하고 항소하는 피고인들을 앞에 세워 놓고 재판을 집행하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이미 1장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악을 범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판결에 승복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사형이라니 너무 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헬라인이라고도 하는데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자기를 양심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으면서 주변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가운데 의외로 죄인이라는 선언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보이는 예가 흔합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누가 뭐래도 '나는 남보다 선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말해도 놀라지 않습니다. 또 지옥, 심판에 대해 말을 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그런 곳에 갈 이유가 도무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교통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들으면서도 ‘나는 괜찮겠지’라며 막연한 기대감으로 액셀레이터를 밟는 운전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선언에 대해 불만 가득 변명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1) 남을 비판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결점에는 눈이 어둡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실수만이 클로즈업 되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자연히 남을 비판하게 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와 선을 드러내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는 그 눈으로 항상 나 자신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에게 덕이 되고 좋게 말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2) 자기가 범하는 죄에 대해 둔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비판은 잘하지만 자기도 똑같은 죄를 범하는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는 드러나는 대신 자기의 죄는 감추어지는 차이일 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는 죄가 없는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 은밀한 죄를 누가 지적합니까? 하나님입니다(2,3절). 간음한 자를 비판하면서 속으로 여인을 향해 음욕을 품습니다. 또 형제끼리 싸우는 자를 욕하면서도 자기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못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3) 자신의 형통함이 자기의 선으로 얻은 복으로 착각합니다.
불행을 당하는 자를 보면서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살지’. ‘양심을 바로 써야지’ 하며 남을 정죄하는 반면 자기의 무사함에 대해서는 선행에 따르는 결과로 여깁니다. 사실이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똑 같은 죄인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길이 참으심 때문인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준엄한지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판단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엄하게 질책하십니까?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잘못에 대한 핑계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꿈도 꾸지 말라고 합니다. 4절 말씀을 보면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용서를 멸시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5절 말씀을 보면 판단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돌아온 탕자를 정죄하는 맏형의 죄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께서 가슴을 노크할 때 ‘그래 바로 그게 나야’ 하면서 회개의 기회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2. 판단의 기준
우리는 자기 생각만으로 교만한 모습으로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살면서 판단해야 할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력과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더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열을 알면서 하나를 말하면 바른 충고가 되지만, 하나를 알면서 열을 말하면 판단이 됩니다.
판단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7장 24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판단할 때는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판단하지 말고 바르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알지 못하면 판단을 최대한 유보하고 더 많이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섣부른 판단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판단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따라 판단해야 합니까?
1) 진리를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2절 말씀에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여기서 진리는 하나님 말씀이고, 조금 확대 해석하면 성실함과 진실함도 진리입니다.
우리는 진리대로 판단해야지 자기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하면 기도로 판단하고, 자기가 봉사를 많이 하면 봉사로 판단하고, 그처럼 자기 잘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남을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입니다. 무엇보다 진실해야 합니다. 요즘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보다 진실해야 하고, 보다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판단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2) 행동을 통해 판단해야 합니다.
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판단하실 때에 행한대로 판단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 6장 7절의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가 말씀을 많이 듣고 아느냐?’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가 듣고 깨달은 말씀을 많이 행하느냐?’를 보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빨리 선행을 결단하고 행해야 합니다. 좋은 일을 알면서 행하지 않으면 인생 낭비요 죄입니다. 행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그 인생에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선을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특히 선행을 할 때 조용히 해야 합니다. 선행이 자랑이 되면 하나님의 축복은 사라집니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선행을 한 것에 있지 않고, 자기들의 선행을 자랑한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갈무리하려면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은근히 과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도로 가져가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봉사하고, 선행을 하고, 특별 헌금을 내면 그 봉사와 선행 자체는 좋은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모습은 아닙니다.
3) 판단하기보다 사랑과 격려를 주십시오.
사랑하는 후암의 성도 여러분! 가만히 앉아서 판단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서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합시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입시다. 그들을 사랑하고 격려합시다. 남을 판단하는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남을 실제적으로 돕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우리는 판단하는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더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사랑 없이 판단만 하면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부요를 남을 축복하는데 쓰지 않고 내 맘대로 쓰면 그것은 복된 삶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주님의 축복을 내 맘대로 쓰는 것은 죄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 4:6)" 라고 말씀하신 것은 못 배워 무식해서 망한다는 말이 아니라 죄를 죄로 인식 못하는 무식으로 망한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다음 막이 펼쳐질 때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더욱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해서 진노를 쌓기보다 남을 사랑하고 격려하여 축복을 쌓아야 합니다. 내가 남을 축복하면 그 축복이 돌고 돌아서 결국 나에게 축복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판단하면 그 판단이 돌고 돌아서 결국 나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옵니다. 판단은 반드시 판단을 낳고, 격려는 반드시 격려를 낳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 나를 판단하십시오.
우리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에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판단과 정반대로, 세 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행한 대로, 그리고 은밀한 것까지도 판단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남을 정죄했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향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죄 된 모습을 돌아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앞에 노출되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죄 지은 모습 그대로 오셔도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죄 지은 모습을 하나님 앞에 내 보이면 보일수록,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축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자연의 파괴범은 산불이나 홍수가 아니라 작은 해충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나 가정은 산불이나 홍수와 같은 눈에 보이는 큰 어려움으로 파괴되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 즉 판단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등으로 인해서 파괴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단점을 덮어주고 격려하면 그 교회와 가정은 반드시 살아나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겸허하게 서서 남을 판단하기보다 나 자신부터 성찰하고, 사랑과 격려로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롬 2:2-6 / 김양인 목사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이 선민의식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죄인취급을 하고 상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에 관해서도 왜곡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았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으므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성경은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들과 다름없이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아시아의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인데, 그 2장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말씀 가운데 “너희”는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을, “우리”는 유대인 신자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신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을 심판의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였고, 7절과 10절은 의인에 대한 심판을, 8절과 9절은 악인에 대한 심판을 언급합니다. 의인과 악인 모두가 심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여기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이 개인의 자격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하였고, 9절에는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그리고 10절에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민족 단위로나 가족 단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각 자가 개인의 자격으로 받습니다.
혹 부모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 자기도 천국에 들어갈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믿음이 자식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아내의 믿음이 남편을 구원할 수 없고, 남편의 믿음이 아내를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각 자가 자기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하십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절대 불변의 원칙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처럼,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를 거두고, 악을 행하면 악한 결과를 거두는 것이 만고의 진리입니다. 또한 이 원칙은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더니 이제 보니 행위로 받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곧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하신 말씀과 같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입니다. 세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까닭에 멸망을 받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절〜15절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합니다.
심판장이신 주님의 보좌 앞에 두 종류의 책들이 펴 있는데, 생명책은 하나의 책으로 되어 있으나 행위를 기록한 책은 몇 권인지 알 수 없으나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 받고,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는 사람은 불못에 던져집니다.
그러면 누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없으므로 불못에 던져집니다. 이렇게 볼 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위해 파송한 70인의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하였을 때,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러나 이 모든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더 기뻐할 것은 우리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각 자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믿음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말하며,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들은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신자들을 말합니다.
7절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믿음의 본질을 말해 줍니다. 믿음은 단지 마음속으로 ‘복음의 진리를 수긍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하였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가진 그러한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귀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이나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은 곧 복음을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입술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실생활 속에서 믿음의 실천과 순종이 없다면 그 믿음은 거짓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귀신들의 믿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비하시니까 구원을 주시겠지요.” 기독교인 가운데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배척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려면 참기를 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의 길임을 알기 때문에 다가오는 환난과 핍박을 참아냅니다. 참는다는 말에는 계속해서 인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으므로 우리는 핍박을 견디되 끝까지 견디고, 악한 세력과 싸우되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할 때에도 즉흥적인 기분으로 할 것이 아니라 결심을 하고 변함없이 충성해야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면 고난과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만약에 고난이나 핍박 대신에 번영과 축복만 말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지, “나를 따라오면 아무 어려움도 겪지 않을 것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이 추구하는 것은 세인들이 추구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도들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썩어질 영광과 명예나 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는 천국의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세인들은 타락한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지만, 성도들은 거룩한 욕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는 목적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릅니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는 진실한 신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짓된 자들도 있습니다. 8절은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당을 짓고 그들의 불의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불의를 좇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언행을 합니다. 이들은 교회생활을 할지라도 목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순종하며 헌신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을 빙자하여 자기 욕심을 만족시킬 목적을 위해 행동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큰 박해가 일어나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도들과 유대인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는 이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처럼 여긴 것을 감안할 때, 빌립 집사의 행동은 파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때, 시몬이라 하는 유명한 마술사가 빌립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마술을 행했지만, 빌립 집사는 실제로 능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도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와서 갓 믿은 신자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본 마술사 시몬이 조용한 시간에 돈을 사들고 두 사도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사도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 중 어떤 사람들이 그 이튿날 아침에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떡 문제를 해결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음료라”고 하시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서로 다투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니,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베드로처럼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에게 보응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악인에게는 그 영에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환난은 밖에서 오는 고통을 의미하고, 곤고는 심령 상의 고통을 말합니다. 영원한 불못은 감각적으로도 고통스럽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적으로도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면, 나사로가 죽자 그의 영혼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에 들어갔고, 부자는 죽어 그 영혼이 음부에 떨어졌습니다(눅 16:).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큰 소리로 호소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고민’이란 심령상의 깊은 고통을 말합니다. 영원히 고민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때가 이미 늦었을 때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관해 듣기를 싫어합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은 괜찮지만 지옥에 관해서 설교하면 무식하다고 말합니다. 개중에는 교회 나가고 싶지만 지옥에 관한 설교가 싫어 나가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신학자나 목사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옥이 어떤 곳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을 보면, 최후의 심판 때 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불신무리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아는 이상, 우리는 불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차 불꽃 가운데서 영원토록 고통당하며 고민하게 될 그들을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하신 말씀은 성도들이 영생에 들어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설 때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지만, 상급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구원만 받으면 족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갓난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젖을 먹는 것은 본능입니다. 아기는 젖을 갈망합니다. 이와 같이 영이 거듭난 사람은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하루하루 지나면서 누워 지내던 상태에서 뒤집기를 하고, 그 다음에는 방바닥을 기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돌이 다가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걸음마를 시작합니다.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포기하지 않고 제대로 걸을 때까지 끊임없이 걸음마를 계속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칙입니다.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은 믿음의 삶을 추구합니다. 때로 시험에 들기도 하고 세상 유혹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 나갑니다. 그런 가운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속사람이 자라고 강건해져 갑니다. 이것은 거듭난 성도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때로 쓰러지고 넘어지더라도 완전히 세상으로 가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썩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선수와 같습니다. 선수가 최선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선수는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상대 위에 서서 메달을 거는 순간을 생각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하였는가 하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을 보면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이 땅에 재림하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에 불 가운데서 건짐 받은 것처럼 간신히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될 것입니다.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언제나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심판 때에 천군 천사들과 앞서 간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름이 호명되고 주님께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썩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