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웅이 이야기 -프롤로그-
글쓴이 the Beast
23 소 해 5월 30일
우리 상단은 지금 태미드를 지나는 중이다. 이 말도 안 나오는 대초원은 한낮이 오면 불타오르는 지옥 같은 열기로 사람의 육신을 너덜거리게 만들다가, 밤이 찾아들면 서늘한 바람에 실려 코에 닿는 콜리타스colitas 향기로 사람의 정신을 빼놓는다. 단장 말에 따르면 태미드가 더 멀기는 하지만 북령의 붉은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보다는 위험이 덜하다는 것이다. 쳇, 그렇게 치면 남쪽으로 빙 돌아서 주작대로를 타고 가는 게 훨씬 안전하겠다.
물론 우리도 단장이 왜 주작대로를 타지 않았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비싸서>일 테지. 주작 대로는 이용 기간만큼의 통행료를 무는 길이니까. 호위대도 약간이나마 붙여 주고 관문도 여러 개 설치되어 있어서 안전하기는 그지없지만 그만큼 비싸다. 비싸다고. 암. 장사꾼에게 에누리가 불가능한 비용이란 최대의 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과하마果下馬와 노새로 이루어진 우리 상단의 탈것들 역시 비용 문제를 최대한 고려한 구성이라 하겠다. 어쨌든 이 짐승들은 말보다 현저히 느린 대신 끈질기고 독하니까. 만일 노새를 끌고 주작 대로를 탄다면 그것은 경제 감각이 없는 자이거나 할 일 없이 모험을 즐기러 납신 부잣집 막내도령 정도 되겠지. 어쨌든 처자식도 노부모도 붙잡지 못했던 우리의 발목을 잡아채는 것은 돈이다.
태미드의 비현실적으로 푸른 초원 위에 태미드 콘돌이 날아다닌다. 저 거대한 날개를 보라! 그 위용에는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개척자 조상님들은 저 덩치를 보고 저 새가 망아지나 새끼 양을 잡아먹는다고 오해해 많이들 사냥했다지만, 저 녀석들이 덩치만 컸지 힘이 약해 사냥 대신 시체 청소부 노릇을 즐기는 놈들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오늘날에는 그저 저 놈들은 한가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태미드 콘돌의 날개가 아주 잠깐, 태양을 가린다.
서쪽에 있을 때는 울창한 소나무와 은행나무의 숲이 참 마음에 들었다. 너무 높지도 않고 야트막한 구릉과 언덕들, 가끔씩 지나다니는 성품 온순한 짐승들의 눈망울, 서늘한 바람. 하지만 이 곳은 북부와 서부의 중간 지역이며, 따라서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골짜기마다 전설이 맺혀 있고 산마루마다 영기가 서린 서녘의 신비스러운 산들이 그리워진다. 떠날 때 산신령께 무사 안녕을 빌며 치성을 지낸 조그마한 산이 기억난다. 돈모산이었던가?
23 소 해 8월 13일
날씨도 선선해진 요즘은 수도가 한참 호경기라 우리 단장의 입이 헤벌어졌다. 서령 곳곳에서 모아들인 인삼을 예상한 가격보다 3할 정도의 프리미엄을 더해 팔아치우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우리도 덩달아 헤벌어진 입을 하고 며칠 수도에서 놀다 가기로 했다. 물론 사냥꾼들이나 배달부들처럼 술에 절어 보내는 휴식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거상을 꿈꾸는 혜왕의 후예들이며, 따라서 경제 감각이 남다르다. 단장이 휴업을 선포하자마자 곧장 상단 전원이 급료를 들고 은행으로 향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수도에 오니 확실히 타족他族들이 많이 보인다. 낭인狼人이야 우리 상단에도 몇 있으니 신기할 것은 없지만 임프Imp 장사치들에 오셀롯Ocelot 모험가들도 보인다. 임프야 작달막하고 찌그러진 얼굴에 째지는 목소리로 <싸요, 싸요!>를 외치며 시청각 공감각적인 괴로움을 선사하고 있으니 다들 외면하지만 오셀롯은 -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오셀롯들은 다들 예쁘장하게 생겼다. 고양이 얼굴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며 돌아다니고 있다. 그들은 허리에 큰 칼을 차고 가슴에 묵직한 갑옷을 걸치고 목에 이상야릇한 목걸이를 걸고 팔뚝에 괴이한 문신을 한... 인간의 모험가들과는 다르다.
우선 웬만한 검보다 예리한 발톱에 사슴보다 빠른 몸을 가지고 있으니 무기가 특별히 필요할 리가 없으며 온몸에 아름다운 무늬가 수놓여 있는데 장신구가 필요할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 중 상당수가 오셀롯들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갔다. 정말 몸매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검은 오셀롯도 보았다. 저 인종을 블랙팬더Black Panther라고 하던가? 오셀롯 특유의 화려한 몸무늬는 없지만 검게 빛나는 저 털빛은 정말 감탄스럽다.
상단의 친구 중 하나가 수도의 유곽에는 오셀롯이 많다는 신빙성 없는 소리를 했다. 에이, 설마... 하지만 정말 매력적인걸? 왠지 그 친구놈의 말을 믿고 싶어진다.
모레면 중추절이다. 집에서는 다들 쌈밥에 밀떡을 해서 넉넉히 즐기고 있겠지. 남령은 올해 밀농사가 대풍년이란다. 갑자기 남령의 서늘한 가을 들판이 그리워진다.
23 소 해 12월 5일
남령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내 고향과는 좀 다른 방향이라 집에 들를 수는 없다. 쳇. 어차피 떠돌이 인생이기는 하지만.
단장이 미쳤다. 단장은 인삼 판 돈으로 다이아몬드를 사들이려는 생각인 모양이다. 확실히 다이아몬드가 장사가 되기는 할 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같은 조그마한 상단에게 그런 귀중품은 무리다. 우리가 우려를 표명하자 단장은 <그럼 묵직한 물건 사서 갈까?>라고 되물어 여독에 지친 우리의 입을 닥치게 했다.
뭐, 확실히 한겨울에 남령까지 내려오는 미친 짓을 감행할 상단은 우리뿐이다. 산적들도 영업 안 되는 요즘 같은 철에야 장사 포기하고 마을로 내려가 월동 준비에 여념이 없을 터이고... 그만큼 안전하다. 최소한 괴물이나 정체불명의 위협이 아닌, 인간들에게는 안전하다.
단장은 광산의 그레이 트렌트Grey Treant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요술적 물품이 더 매혹적일 터였고, 그래서 단장은 수도에서 거금을 들여 구입한 말린 물꽃 가루를 - 난 처음 단장이 저 비싼 물건을 사는 것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물론 그 뒤에 다이아몬드 구입 계획을 말했을 때는 놀랄 기력도 없어졌지만 - 트렌트의 줄기손에 쥐어 주고 중저가 다이아몬드 한 상자를 구입했다.
난 보석으로서의 가치도 별로 없는 - 물론 상급품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 하급품 다이아몬드를 무려 한 상자나 구입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단장의 말에 따르면 이런 것이 요술사들에게는 오히려 잘 팔린단다. 음, 이렇게 계속 요술사들과 거래하다간 도방道房에서 천벌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
23 범 해 2월 10일
단장은 요새 똥 씹은 표정이다. 트렌트가 준 다이아몬드는 아무리 싸구려라도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수도로 돌아와서 요술사 협회에 문의해 본 결과 이 정도 다이아몬드는 같은 무게의 황 털 값을 - 사실 황의 깃털이 좀 가볍기는 하지만 - 쳐 준다고 한다. 그래도 손해는 보지 않았지만, 역시 단장은 '차라리 황 사냥을 나갔으면 더 벌었겠다. 제기랄, 그놈의 고목나무 새끼. 다시 만나면 불태워 버릴 테다!' 운운하며 며칠간 궁시렁거린다.
북령으로 향한다. 북령은 요새 딱 좋을 철이겠지. 열대의 낭만인 것인가. 음. 이번에 가면 난 따로 계획이 있다. 은행에서 돈도 좀 찾아 놨겠다, 야자열매를 좀 사갈 생각이다. 야자는 잘 썩지도 않고 놔두면 알아서 나무로 커 버리니 부잣집에 관상용으로 팔기 딱 좋은 물건이다.
피숲을 지나야 한다는 애로사항이 있기는 하지만 - 물론 백호활로를 타면 안전하겠지만 역시 우리의 단장님, 유료 도로는 절대로 안 탄다 - 피숲만 안전하게 빠려나가면 아직 개척이 덜 된 북령은 우리 장사치들의 천국이다. 이곳 주민들은 순박해서 -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 돈 벌기 좋은 상대인 것이다. 뭐, 이 곳 물가가 좀 싸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어제는 피숲의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봉을 보았다. 왜들 <봉 잡았다>고 하는지 알겠다. 단장은 눈이 튀어나오도록 고함을 질러대며 '제기랄, 저놈 잡아! 잡으라고! 악악! 로텐! 시바인! 왜 못 잡는 거야!' '우리에겐 날개도 요술사도 없다고, 단장.' '으아아아악! 돌이라도 던져!' '단장, 확실하게 죽고 싶은 거야?' 어떻게든 황금빛 깃털을 휘날리는 거대한 거북새 - 조악한 이름이다 - 를 잡겠다고 악을 쓰다가 결국 우리의 당당한 낭인 버셋의 거대한 주먹을 뒤통수에 맞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단장을 후려패는 이 무도한 행위에 기겁한 우리들을 향해 버셋이 조용히 대답했다. '주위에 파워가 느껴진다.' 이 한 마디로 우리 모두는 일제히 침묵하고는 기절한 단장을 챙겨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음, 밀림에서 낭인의 감각 말고 믿을 것이 뭐가 있을까.
23 범 해 2월 12일
"이 녀석들, 은근히 가진 게 많은걸? 낭인들 데리고 다니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먹을 것은 별로 없군."
"뭐, 시체라도 가져가서 거름 줘야지."
"좋아."
곧이어 상단 전원을 몰살시킨 두 명의 그림자는 두 개의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로 바뀌었다.
달빛 아래, 식어버린 시체들은 싸늘하다. 한 소년의 시체는 죽기 전까지 일기장을 쓰다가 그대로 등을 맞고 등뼈가 부러진 듯, 비정상적인 각도로 자신이 쓰고 있던 일기장 위에 고꾸라져 있다.
안녕하세요. 유령회원 Beast라고 합니다.
가입한 지는 오래 됐는데 글을 올린 적이 없어서 민망하네요.
쓸데없이 오래만 붙잡고 있던 중장편 하나 올려 보려고 감히 여기 발을 들여놓습니다.
아무래도 제 개인클럽에 올리다 보니 가입한 지인들께 좋은 말만 듣는 것 같아서요.(폭정과 압제 때문인가 -_-;)
눈버리신다 싶으셔도 염치없이 프롤로그부터 올려보려고 합니다.
(꾸벅)
묵직한 곳에 올리려니 민망합니다.
재미있게 봐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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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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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프롤로그, 로군요. :) 영화에서는 시작 5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모든 정보를 다 싣고 있으니까요. 지웅이 이야기라는 글의 프롤로그도, 그런가보다, 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영화와 텍스트는 조금 달라도 괜찮겠지요. 건필하세요. :) (그나저나... 확실히 편집기를 쓰지 않는 글은 티가 나는군요. 쩝;;)
다음의 텍스트 정렬 방식은 좀 짜증나는 감이 있기 때문에, 글틀을 사용해주시면 참 좋을 텐데요. (먼 산)
사용법을 몰랐습니다. 적응중입니다;
장사치의 사정과 지역들의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아, 상단 일행을 죽인 것은 누구일려나? 잘 읽었습니다.
프롤로그라, 일기형식의 글이네- 하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상단 일행이 다 죽어버려서 약간 벙쪘습니다.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