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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양치기 출신의 64세 사우디아라비아 기업인이 13세 소녀와 58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14세 때 첫 결혼을 한 뒤 4명의 부인과 36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이 기업인은 앞으로 두 번 더 결혼해 60번을 채우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해외토픽으로 오른 이 사건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이겠지만, ‘이슬람 문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일부다처제라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2005년 현재 2명 이상의 여성과 결혼한 중동 남성의 비율은 2~10%로 추산된다. 『이슬람』의 저자들은 일부다처제는 전쟁에서 많은 남자들이 사망해 생겨난 과부와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해 비롯된 것으로 겉보기와는 달리 공평성 원리에 입각해 이뤄지고 있으며, 다른 면에 있어선 여권(女權)이 오히려 서양보다 앞섰다고 말한다.
“이슬람은 여성의 상속권뿐만 아니라 여성의 사유재산 소유권과 여성의 부동산 소유권도 여성들 스스로 이슬람 초창기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서구에서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인정하던 관행에 비추어 이슬람 여성들은 이미 엄청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또 방글라데시 수상 베쿰 칼레다 지아, 파키스탄 수상 베나지르 부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 푸트리 등과 같은 여성 정치인들의 활약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슬람의 여권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슬람 여권에 대한 과도한 오해엔 아무래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미친 악영향이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다. 96년에 집권한 탈레반 정권은 상상을 초월하는 여성 탄압을 저질러 악명을 얻었다. 여성은 아무 일도 못하게 했으며, 오직 집에서만 지내야 하고, 외출 시엔 남자보호자를 동반해야 하며, 어떤 남자 의사도 진료라는 명분하에 여자 환자의 신체를 만질 수 없으며, 젊은 여자는 젊은 남자와 이야기해선 안 되며 위반자는 즉시 그 상대와 결혼해야 하는 등 도무지 믿기지 않는 칙령을 강요했던 것이다. 세계인들은 탈레반이 이슬람 세계에서도 유별난 집단이라는 건 알았지만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다 텔레반처럼 구는 걸로 오해하게 된 점도 있었다.
오해가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보편적인 세계 기준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가장 용납하기 어려운 게 간음한 여자를 가족이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명예살인’일 것이다. 부모가 정해 준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결혼을 하거나 가족의 동의 없이 결혼했을 때도 명예살인이 행해지는 나라들도 있다.
2003년 파키스탄에서 명예살인으로 사망한 여성은 1,261명으로 집계되었으나 알려지지 않은 살인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 이상일 것으로 추산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선 2003년 약 300명의 여성이 남편의 구타를 견디다 못해 분신자살을 시도했고, 이 중 80%는 숨졌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으로 가정형편 때문에 돈에 팔려 시집을 간 여성들이었다.
2004년 10월 26일 파키스탄 하원은 명예살인을 저지르면 7년형 또는 최고 살인에 처하는 내용의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2004년에 43명의 여성의 명예살인으로 희생된 터키에서는 명예살인 철폐 광고를 방영하는 등 명예살인을 없애기 위한 전국적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여권(女權)은 나라마다 각기 다르지만, 어느 나라에서건 나름대로의 여권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비교적 보수성이 강하긴 하나 여성의 저항도 만만치 않은 이란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란의 여성들은 1936년 이란의 통치자 샤(왕)의 명령에 따라 베일을 벗었다가 79년 이슬람혁명을 거치면서 83년 다시 정부의 명령으로 베일을 쓰게 되었다. 93년 1월 이란 정부는 광고 사진에 여성이 등장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이슬람화에 역행하는 문화에 대한 규제에 정부만 나선 게 아니다. 바시지스(Bassijis)라고 하는 일종의 자경단원들까지 가세했다. 알리 모하마디는 『뉴욕타임스』 93년 7월 21자 보도를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차적으로 소수의 기업가가 테헤란과 전국 지방 수도에 지하 비디오 클럽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란의 남부와 북서부에 사는 젊은 고등학교 졸업자들이 이웃나라의 재미있는 영화와 텔레비전 쇼를 해적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수수료를 조금 받고 이웃과 친구에게 복사하고 빌려 주는 형태로 나아갔다. 해적판 비디오 사업은 점점 수지맞는 장사가 되었다. 해적판 비디오 사업은 정부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서구 문화가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시지스 집단을 풀 만큼 빠른 시간 안에 발전했다. 원래는 1980년 이라크와의 전쟁을 돕기 위해 결성된 바시지스는 14세에서 20세 사이의 턱수염을 기른 청년과 소년 집단인데, 이제 이들이 서구 문화와 이란의 이슬람 생활에 미치는 서구 문화의 영향에 맞서 싸우는 중이다. 그들은 서구의 내용을 담은 비디오카세트나 오디오카세트를 갖고 있는 사람 누구든지 압수 또는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바시지스까지 나서서 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맛본 서구화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로버트 케이플런은 96년에 출간한 『지구의 변경지대』에서 “테헤란에서 첫 번째 맞는 저녁인 이날 밤, 나는 다르반드강으로 향하는 길에서 많은 이란 운전사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들은 서슴없이 경적을 울리고 차창 밖으로 소리를 질러 다른 운전사를 놀라게 하면서 앞으로 내달렸다. 아랍 세계의 미국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는 아주 달랐다. 그곳에서는 여성에게 운전을 허락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테헤란의 여성들은 상대방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들의 눈길은 상대방을 아주 정면으로 마주 대한다. 카이로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이스탄불에서도 테헤란보다는 훨씬 덜하다. ······ 이란에서는 여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도 상관없다. 나도 여러 번 그렇게 했다. 그러면 그녀는 대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 그런 일을 하면, 여자는 도망가고 어떤 남자가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 테헤란 북쪽의 화려한 옷가게에는 여자들이 몰려들었으며, 다른 도시의 그보다 덜 화려한 다른 옷가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 밖에서의 똑같은 옷차림이 오히려 내면의 패션의식을 높이는 작용을 한 것이다. 이란의 여성들은 시골 여자들로 바뀌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그리고 공산주의 시절의 동유럽에서 내가 봤던 것처럼 사회생활의 제약을 보충하기 위해 사생활이 한층 더 화려해졌던 것이다.”
1997년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개방 욕구는 더욱 강해졌다. 하타미는 비교적 ‘친(親)서방’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어 이란 언론들은 하타미의 대통령 당선을 “79년 이란혁명 이후 18년 만의 혁명”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보수파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란의 정계는 아야톨라 하마네이를 정점으로 하는 보수파와 하타미를 정점으로 하는 개혁파로 양분되었다. 신정(神政) 일치 체제를 지향하는 이란은 국가의 종교지도자인 아야톨라가 실권을 행사하는 국가로 이란 헌법상 군과 경찰, 사법부 등의 권력 기관은 종교 지도자의 손에 있기 때문에 개방은 매우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다.
‘혁명’은 대중문화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남쪽 지역은 아주 가난한 동네로, 아직 TV가 없는 가정이 상당수 있었다. 내가 이 마을을 방문한 것은 1997년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때 TV를 갖고 있는 집들 가운데 일부가 의자 몇 개를 갖다 놓고 입장권을 파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를 무대로 한 드라마 〈베이워치〉가 방영될 시간이었다. 위성 덕분에 매주 이 프로그램을 볼 수 있게 된 이란의 일반 가정이 달동네 이웃에게 관람료를 받고 이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36-24-36의 몸매를 자랑하는 미녀들이 비키니만 입고 출현하는 이 TV 쇼는 미국뿐만 아니라 테헤란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이란 정부는 일반인들의 위성 안테나 소유를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친구들을 비롯한 많은 이란인들은 위성 안테나를 널어놓은 세탁물 사이에 숨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발코니에 키 큰 화분들을 늘어놓아 그늘을 만들어 숨겨 놓기도 했다.”
『뉴스위크』 98년 5월 6일자는 오늘날 이란의 혁명은 “바리케이드에서가 아니라 영화관 매표소와 경기장 관람석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한겨레21』 98년 7월 23일자는 〈타이타닉〉은 불법으로 복제되어 이란 암시장을 장악했으며 영화의 주인공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사진은 여성들의 안방을 차지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론 여성이 립스틱을 바르면 감옥에 갈 정도로 이란 사회는 경직돼 있었고, 여성들은 이에 저항했다. 99년 8월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교수 파르자네 밀라니는 이란 여성들의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7월 이란을 방문했을 때 겪은 일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그는 그 일을 통해 ‘립스틱의 정치학’을 깨달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구와 함께 쇼핑을 갔다가 시장 한가운데 있는 여성전용식당에 케밥(중동식 꼬치구이)을 먹으러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막 먹기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식당주인이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순식간에 식당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고 한 여성이 ‘자경단이 시장에 들어 왔대요’ 하고 소리를 쳤다. 난 그 순간 ‘도덕 경찰’을 자처하는 자경단원들이 시장을 공격한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여성의 복장이나 외양을 단속하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었다. 내가 겁에 질려 있는 동안 친구는 능숙하게 종이 냅킨으로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박박 문질러 지웠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한 다른 여성은 짙은 장갑으로 감췄다. 또 다른 한 여성은 머리에 쓰고 있던 화려한 스카프를 벗고 핸드백에서 검은색 베일을 꺼내 썼다. 샌들을 신고 있던 내 옆의 한 젊은 여성은 페디큐어 바른 발가락을 가리기 위해 무릎까지 오는 양말을 꺼내 신었다. 머리에 쓴 스카프 사이로 모양을 낸 머리 스타일이 엿보이던 한 중년여성은 ‘지긋지긋해 정말. 이제 마음대로 살든지 아니면 차라리 죽어 버려야지’ 하고 소리쳤다. 옆에 있는 남성용 식당에서는 강경파와 개혁파 남성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 그 무더운 여름날 아랍식 전통의상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린 채 땀과 공포에 절어 있었던 우리는 에어컨도 없는 갇힌 택시 안에서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시장통을 완전히 벗어난 후 옆에 앉은 친구를 본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30분 전 미친 듯이 립스틱을 지웠던 그가 다시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립스틱에 투자하는 속도와 기술, 열정은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이란에서 립스틱은 단순한 립스틱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를 주는 하나의 무기나 마찬가지야’라고 그 친구가 말했다.”
‘립스틱의 정치학’은 서서히 다른 영역에도 개방의 물결을 몰고 왔다. 연극에도 ‘숨통’이 조금 트이게 되었다. 『한겨레』 2000년 7월 19일자는 “이달 초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는 작은 ‘파격’이 일어났다. 강경 이슬람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이 나라에서 남녀가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연극이 공연된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 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 끝 무렵 줄리엣이 숨을 거둔 로미오의 뺨을 손가락 뒷부분으로 어루만졌다. 관객들은 놀란 듯 웅성거렸으나 막이 내리자 열띤 박수갈채를 보냈다. ······ 1979년 이슬람혁명 뒤 한때 미술 전시조차 금지됐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 테헤란에는 미술관과 문화 공연장만 100여 개나 되며, 박물관도 70여 개에 이른다. 표현의 자유가 가장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룬 곳은 영화 쪽이다. ······ 개펄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새들에게 ‘자유가 주는 느낌을 맛보기 위해 더 높이 날아보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도 나온다. 이런 표현의 자유가 가능한 것은 문화행정을 담당하는 문화이슬람영도부가 하타미세력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이란 최초의 여성 판사이자 인권운동가인 시린 에바디(1947년생)에게 돌아갔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퇴직을 강요당한 뒤 여성 인권운동을 해 온 시린 에바디는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이슬람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화”라고 밝혔다.
2005년 4월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 보도에 따르면, 이란 거리에선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남녀가 대화를 나누거나 신체 접촉을 하는 행위는 금지돼 있다. 또 비밀도덕 경찰이 암약하면서 여성들의 복장 및 화장 단속을 하고 있고 풍기문란을 단속하기 위해 카스피 해변에는 이동식 태형(笞刑) 부대까지 배치되기도 했다. 이 기사는 그러나 6월 총선을 앞두고 이란의 보수세력들이 젊은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규제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를 한층 누그러뜨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인지 거리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도 활보하고 심지어 ‘야타족’도 등장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젊은 여성은 평소에는 마스카라도 하고 남자친구와 키스도 하지만 언젠가부터 공항에 갈 때만은 한층 보수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 양말을 신지 않고 발목을 훤히 드러낸 채 출국 수속을 밟다 현장에서 체포돼 법정에 끌려가 벌금 150달러를 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 바시지(풍기문란 감시 민병대)가 당신을 잡아갈지 모른다’고 경계했다.”
2005년 들어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서 여성 인권이 크게 향상된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2005년 1월 이라크 총선에선 제헌의회 의석수 3분의 1이 여성에게 할당되었으며, 5월 17일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쿠웨이트 의회는 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을 보장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찬성 35, 반대 23, 기권 1로 통과시켰다. 방청석에 있던 쿠웨이트 여성운동가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뜨리면서 국가를 제창했다.
쿠웨이트의 여성 참정권 인정으로 중동 지역 국가들 중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가 여성에게 남성과 거의 동등한 정치권리를 보장하게 됐다. 팔레스타인은 이미 1946년부터 여성 참정권을 인정해 오고 있으며, 이란은 63년, 오만은 97년, 카타르는 99년, 바레인은 2002년 여성의 투표권과 입후보권을 보장했다. 전체 아랍 의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5%로 12.9%인 남미, 21.2%인 동아시아에 비해 한참 뒤처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의 월경이 정치적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여성의 정치 참여를 봉쇄하고 있지만, 그런 억압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조만간 이슬람 페미니즘의 바람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강타할 것이 틀림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 페미니즘 (세계문화사전, 2005.8.20, 인물과사상사)
첫댓글 이슈게로 가야할듯.
아무튼 이슬람 미친 놈들은 답이 없음 ㅌㅌㅌ
뭐라구요?
왠만하면 좋게 보고싶은데 저거 보면 진짜 답이 없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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