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은폐된 잉여
- 이현애의 시 세계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흔히 여백의 미를 얘기한다. 여백은 공간의 무한성에 대한 심상을 제공하고, 사색의 여유를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비울 줄 아는 어떤 경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의 전통적 문인화나 단형의 시조는 바로 이 여백의 미학을 잘 구현한 예술 장르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여백을 생각하면, 여백은 감추고 지우는 것이다. 잉여로 여겨져 사상되는 것들의 빈자리를 여백이 차지한다. 중심적이고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가치매겨지는 힘 있는 것들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여백은 존재하고, 그 자리에 있던 사소한 잉여들은 지워지고 만다.
이현애 시인의 시들은 바로 여백에 의해 감춰진 이 잉여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여백의 밑장을 들춰 우리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그의 시들은 우리의 의식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낙타는 안개를 건너 꽃잎을 한 줌 움켜쥔다
지하도에 갇힌 불빛은 슬그머니 등을 돌린다
한 다발의 가시나무는 스스로를 가지런히 다듬고, 햇빛은 가던 길을 멈추고, 어둠은 웃음소리 내려놓고, 함정은 젖가슴을 들어내고, 숨은 말들은 물음표를 들고 희끄무레한 하루를 가라앉힌다
조금씩 어긋나는 금빛 죽지 타고 남은 재 속에서 뼈를 추린다 껍질을 벗기면서, 모서리의 익숙한 맛을 뱉어내면서, 시장기는 관절을 꺾어 뿌리 내렸을까 그러나 낙타 눈에 물을 가둘 수 없다
가시나무 옆구리에 그물맥이 손을 뻗는다 눈물도 없이 낙타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 듣는다 모래 속에 빠지면서 껍질은 뻗어나간 길 끝을 막고 지나간 물길을 바라본다
그들은 상처 난 발굽이 없었다
낙타는 정말 가시나무를 먹었을까
- 「이렇게 새로운 껍질이 생긴다」 부분
사막에서 가시나무를 씹으며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내야 하는 낙타의 운명을 노래한 시는 많다. 하지만 이 시는 낙타보다는 낙타가 먹어야 하는 가시나무에 초점이 가 있다. 낙타가 전경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낙타가 먹어야 할 가시나무에 시인의 시선이 가 있다. 시인은 도시의 거친 삶을 사막에 비유하고 있다. 거기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은 낙타가 아니라 낙타가 먹어야 할 가시나무로 비유된다. 낙타는 이 도시의 삶을 이끌어가는 자본과 그것이 만들어 낸 여러 도구나 장치들이다. 우리의 삶은 그것을 위해 빻아져 바쳐진다. 그리고 주체가 대상이 되고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만든 거대한 문명에 의해 소외된다. 다시 말해 잉여가 되어 여백으로 지워진다. 시인은 이것을 “눈물도 없이” “상처난 발굽도 없이” 가시나무를 먹는 낙타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 시는 이현애 시인의 시의 지향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그러니 그의 손가락 위에 올라앉지 마라
안을 향해서만 드러내는 인간의 뿌리. 그 안에 거하며 거드름 피우며 파먹는 신이 부러워 그는 위에 살면서 밤낮없이 아래만 내려다보며 입을 오물거려 입맛을 다신다
그러니 그의 손가락을 조심하라
- 「그의 손가락을 조심하라」 전문
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리킬 수 있는 사람은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신이 되고자 “위에 살면서 밤낮없이 아래만 내려다보며” 사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손가락에 올라앉는 행위는 그에게 반기를 드는 위험한 행동이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고 그의 손가락을 문제 삼겠다는 불온한 행위이다. 이 손가락은 자신이 보라는 곳만 보도록 사람들을 지시한다. 거기에 핵심이 있고 중요한 것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다 여백이거나 잉여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지시하는 손가락을 문제 삼는다. 그가 가리키는 곳만 꼭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의 손가락 위에 올라앉고 싶어한다. 이현애 시인은 바로 이런 불온성으로 여백을 들춰내고 잉여들을 바라보고자 한다.
다음 시는 좀 더 분명히 시인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긴 자의 자식이 아니고
패자의 아이, 사용 후 버려져도 좋은
잉여 전리품, 소모품이었다
…(중략)…
늦가을 바람결에 놀 빛 사위어 가고
여전히 나의 시간은 나와 상관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나도 따라 그 길을 잇는다
‘용서할 수 없음’으로 용서하므로
승자의 아이가 된다
- 「패자의 아이」 부분
길게 인용하지 않아 잘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시는 잉여의 시선으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고 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각자는 무시해도 좋은 잉여일 뿐이고 “패자의 아이”일 뿐이다.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했다. 시인은 그것을 “나의 시간은 나와 상관없이 발걸음을 옮”긴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주체가 되지 못한 잉여들에게 모든 고난과 고통은 떠넘겨 진다. 시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왜 우리에게만 용기 짐 지워 주는가
나와 이겨야 하고 타자와 타인을 견뎌야 하는
믿음 어느 구석에도 솟아날 틈 남아있지 않은데
내 나라 내 땅에서조차 이성체가 되는 것 아닐까
나도 나를 모르며 합류한 내 조국 알아봐 줄까
- 위 시 부분
내 나라에서도 이성체가 되어 겉돌거나 무시되어야 하는 존재, 그래서 역사책에서도 사람들의 의식에서도 다 지워져 공백으로 남은 존재, 이현애 시인은 바로 그런 존재들의 고통을 다시 상기하고 그들을 위한 진혼가를 부르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역사의 여백으로 지우지 않고 다시 불러냈을 때 그것은 “용서할 수 없음”의 분노가 되고 이 분노가 결국은 진정한 용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승자의 아이”로 바뀔 수 있다고 시인은 믿는다.
모든 잉여들을 지우고 은폐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은 세상을 빛과 어둠, 선과 악으로 갈라 세워 인식하는 이분법적 사고이다.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이 둘 사이의 많은 중간 존재들은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잉여가 된다.
그는 아리송한 채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들이 친구인지 이웃인지 아닌지 여전히 헷갈렸다
멀리 달아났던 눈 돌아오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짧은 통증과 함께 남아있던 체온이 눈을 뜬다
행인 1과 아가미의 깊은 뜻은 무엇일까 골똘하다가 책방에
들르기로 했으나 너무 멀리 있는 데다가 바람이 막아
섰으므로 단념하는 수밖에 없음을 알기 시작했다
…(중략)…
반만 켜진 전구처럼 반절만 보이는 세상에 반쪽 발로
뛰어가고 어떤 등장인물 그도 흐르고 있다
그들의 연대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이 어 어 하는 사이 재빠른 삭제를 선택했다
어둠 . . . 밝음
- 「어둠 . . . 밝음」 부분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리송한” 것들이다. 그런데 명과 암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이 아리송함을 파악할 수 없어 “아리송한 채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사고 안에서 우리는 모두 무의미한 것을 풀고 생각하는 “행인 1”의 존재가 된다. 애초에 진실은 어둠과 밝음이라는 이 양극단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양극단에서 방황하는 사이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는 현실은 모든 중간 존재를 삭제하고 어둠과 밝음만을 남긴다.
우리는 이런 식의 사고를 종교나 정치적 신념에서 자주 맞닥뜨린다. 자기편 아니면 적이 되고, 자신의 신념에 반하면 모두 악이 된다. 하지만 진실은 이 양극단에 있지 않고 그 사이 망설이는 수많은 주저함에 있음을 시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분법에 의해 정리되지 않은 이 흔들리는 잉여들의 세계를 이현애 시인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가 여백을 포기하고 그곳에 감춰진 잉여들을 들춰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밝혀진 잉여들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쉼표의 제어력과 마침표의 박자
섞기가 희미해질 무렵이면
오래도록 맴돌았을 실핏줄
안쪽 벽에 가득가득 피어있는
그도 그 알아 보았을까
- 「달빛」 부분
쉼표와 마침표로 지워버릴 수 없는 무한한 잉여들의 세계가 실핏줄처럼 살아가 “안쪽 벽에 가득가득 피어있는” 모습은 달빛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봐주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