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寧越)과 단종애사(端宗哀史)2
그 밖의 관광 명소(名所)들
관풍헌(觀風軒) / 자규루(子規樓) / 민충사(愍忠寺)
어라연(漁羅淵)
영월 동쪽을 흐르는 동강은 상류 12km 지점의 어라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두 줄기로 갈라지면서 어라연이 흐르는데 ‘고기가 비단결 같이 떠오르는 연못’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계곡은 하천지형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천혜의 보고(寶庫)로 2004년 12월, 대한민국의 명승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이 어라연 계곡은 상류, 중류, 하류에 3개의 소(沼)가 형성되어 있고 강 가운데는 세 개의 바위가 솟아있어 옛날 신선(神仙)들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삼선암(三仙岩)이라는 이름도 얻었고 다른 이름으로 정자암(亭子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고무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내려가는 래프팅(Rafting)의 성지(聖地)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영월부 관아(官衙)와 관풍헌(觀風軒) 자규루(子規樓)
영월부 관아는 조선시대 영월 객사(客舍)와 관풍헌(觀風軒) 및 자규루(子規樓)가 있던 곳인데 그 당시 영월은 부사(府使)가 없어 관리를 대신하여 이 지방의 호족(豪族)의 수장(首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가 호장(戶長)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훗날 이곳이 관아(官衙)가 되었다. 단종은 유배되어 동강변인 어라연의 청령포(淸泠浦)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홍수가 나서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이곳 관풍루에와서 기거하였다. 관풍헌(觀風軒) 옆에 있는 자규루(子規樓)는 정자각으로 원래의 이름은 매죽루(梅竹樓)였는데 단종이 이 정자각에 올라 자규시를 지었다고 하여 자규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단종의 자규시(子規詩)
一自怨禽 出帝宮(일자원금 출제궁) 孤身隻影 碧山中(고신척영 벽산중)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暇眠夜夜 眠無假(가면야야 면무가) 窮恨年年 恨不窮(궁한년년 한불궁)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 殘月白(성단효잠 잔월백) 血流春谷 落花紅(혈류춘곡 낙화홍)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 聞哀訴(천롱상미 문애소) 何乃愁人 耳獨聰(하내수인 이독총)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고/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밝은가
*자규(子規)-두견새
청령포(淸泠浦) / 보덕사(報德寺) / 방절리 선돌(立石)
청령포(淸泠浦)
청령포는 동강이 흘러내려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북·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흡사 작은 섬을 닮은 특수한 지형이다. 1457년(세조 3) 세조(世祖)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된 단종의 유배지인데 그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기 전까지 단종이 머물던 곳이다.
민충사(愍忠祠)
영월 읍내 금강공원로에 있는 민충사는 단종을 모시던 시녀 6명이 낙화암에서 동강에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뒤따르는데 그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그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사당(祠堂)이다.
보덕사(報德寺)
영월 북쪽 산골짜기의 있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고찰로 단종이 유배될 당시 노릉사(老陵寺)로 고쳤다가 단종 서거 후 장릉(莊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영조 2년(1726) 보덕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선돌(立石)
제천에서 영월로 이어지는 길목인 영월 방절리(芳節里)의 서강(西江) 가에 거대한 바위가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개어 세워놓은 듯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 돌이다. 선돌은 높이 약 70m의 입석으로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불리며, 푸른 강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명승이다.
영월 향교(鄕校) / 어라연 단종 어소(御所) / 봉래산 별마로 천문대(天文臺)
영월 향교(寧越 鄕校)
영월읍내 영흥리에 있는 영월 향교는 조선 태조(太祖) 7년에 창건된 향교로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던 곳이었는데 한국전쟁(6.25) 때 소실되어 다시 복원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본 건물인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그리고 향교로 들어가는 현관 건물인 풍화루(風化樓)가 우뚝 솟아있다.
그 밖에도 영월에는 수많은 관광지가 있지만 영월읍내의 북녘에 솟아있는 봉래산(蓬萊山) 정상에 있는 별마로 천문대(天文臺)는 어린이들의 천체관측 학습장으로도 좋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열월읍내와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이다.
단종(端宗)의 죽음에 대한 야사(野史)
정사(正史)로는 세조실록(世祖實錄)에 ‘노산군(魯山君: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고, 예절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지만 훗날 기록된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사약(賜藥)을 가지고 온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차마 단종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자 하급 관원이 활 끈으로 목을 졸라 세상을 떠나보냈고 시신은 강에 버려졌다’고 전해지지만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는 야사(野史)는 사뭇 다르다.
먼저 단종의 사망에 관한 내용인데 사약이 내려오기 전 유배지 청령포에서 기거하던 단종은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관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외부 사람들도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월 호족(豪族)의 수장이며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는 강가에 나와 강의 흐름을 살폈는데 나뭇조각을 띄워보니 소용돌이에 휘말려 떠돌다가 얼마 후에 청령포 강안에 나뭇조각이 가서 닿아 멈추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시녀 한명이 나와서 강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 나뭇조각을 줍는 것이 아닌가?
엄흥도는 그날 저녁 어스름에 작은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고기와 떡을 실어 보냈더니 시녀가 와서 냉큼 집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이따금 음식들을 실어 보내곤 했다.
그러다 사약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까워 밤에 몰래 배를 타고 건너가서 담장 구멍을 엿보다가 마침 시녀를 만났는데 단종께서 보신탕(補身湯)을 잡수시고 싶어 하시는데 마침 오셨다고 한다.
구멍 속에서 단종을 말소리가 들렸다. 개가 있는데 잡을 수가 없으니 개목에 줄을 걸어 구멍 밖으로 내보낼 터이니 힘껏 당겨라. 잠시 후 활 줄 두 가닥이 구멍 밖으로 나온다. 엄흥도는 줄을 잡고 힘껏 당겼는데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담장에 발을 버티고 힘주어 당겼더니 마침내 담장 밖으로 나왔는데 바로 목이 졸려 숨이 끊어진 단종(端宗)의 시신이었다.
또 한 가지는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한밤중에 몰래 거두어 산속으로 암장(暗葬)하러 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눈 속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사람을 보자 사슴이 달아났다. 마침 그곳은 눈이 없어서 그 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는데 이곳이 바로 영흥리 동을지(冬乙旨) 산기슭에 자리한 현 단종의 능이 있는 ‘장릉(莊陵)’으로 천하의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산속에 암장되어 있던 단종을 꿈속에서 만나 암장되어 있는 장소를 알고 찾아낸 이가 바로 조선 중종36년(1541) 영월 군수를 지냈던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