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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8일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으로 취임한 김행 전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4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신의 집무실에서 본지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청와대 대변인은 정치인이 아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김행(55) 전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2월 28일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원장에 취임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잠시 쉼표를
찍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며 청와대를 떠난 지 두 달 만이다. 진흥원은 여성가족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김행은
지난해 2월 25일 박근혜 청와대의 첫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대통령직인수위 대변인에서 청와대로 옮겨온 윤창중씨와 공동
대변인이었다. 그해 5월 박 대통령 미국 순방 중 인턴 성추행 사건으로 윤창중씨가 도중하차하면서 김행은 단독 대변인이 됐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오히려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직속상관 이남기 홍보수석이 물러나고 이정현 당시 정무수석이 옮겨온
뒤부터다. 김행이 마이크를 잡는 빈도는 눈에 띄게 줄었고, 중요 브리핑은 이정현 홍보수석이 도맡았다. 김행을 두고 "사실상
대변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수석들과 불협화음이 있었다"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연말 돌연 사표를 낸 것이다.
김
행은 여러 차례 인터뷰를 고사했다. "이젠 떠났지만 박근혜 정부의 첫 청와대 대변인으로서 당시 했던 일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인터뷰를 마다하며 그는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했다. '부재기위(不在其位),
불모기정(不謨其政)'.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울 중구 회현동 자택에 3번 찾아간 끝에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청와대 나온 뒤 드라마 폐인 돼
―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돌연 사퇴했다. 무슨 이유였나?
"밝힌 대로다. 재충전이 필요했다."
―사퇴한 뒤 뭘 하고 지냈나.
"집 안 대청소부터 했다. 며칠 동안 허리병까지 날 정도로. 그리고 드라마 폐인이 됐다.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와 도민준에게 푹 빠졌다."
―대변인으로 경험한 청와대 1년을 돌아본다면.
"대변인 시절 일을 구구절절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말 못 할 이유가 있나.
"
대통령에 대한 예의이자 공직자로서 자세다. 나는 박근혜 정부 초대 대변인이다. 1호 인사다. 다른 자리와는 달리 무게감이 있다.
무게감에 맞게 처신을 해야 한다. 역대 청와대 대변인 가운데 정권의 초대 대변인 말고 제대로 기억이 나는 사람이 있나. 이명박
정부를 보더라도 이동관 대변인 말고 기억이 나나?"
―청와대 안팎에선 "존재감이 미미했다"고들 하던데.
"
외모도 성실하게 하고 아침 일찍 나가고 대통령 말씀 하나하나 다 정리하고…. 나는 내가 스타 대변인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청와대
대변인은 스타 대변인이 돼서는 안 된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일개 비서다. 절대 권력욕을 가지면 안 된다.
정치인도 아니다. 적어도 대변인 자리에 있을 때는 그렇다. 그 선을 넘으면 안 되는 거다."
―청와대를 나오기 몇 달 전부터 브리핑하는 모습을 거의 못 봤는데.
"일부러 언론 브리핑을 피한 건 아니었다. 인사 발표 등을 포함해 이정현 홍보수석께서 브리핑을 많이 하셨다. 좋은 콤비였다고 봐 달라."
―그래도 대변인의 기본 역할이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되묻고 싶다. 대변인이 꼭 브리핑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브리핑 말고도 할 일이 정말 많다. 대통령 말씀 잘 듣고, 저녁에 나오는 가판 보고, 오보에도 대응해야 한다. 나는 가판 보고 대응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17초 사과, 진정성 더 담았어야"
그
가 대변인으로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가장 짧은 브리핑을 했을 때였다. 새 정부 출범 직후 장관 후보자들이 거듭 낙마하자,
허태열 당시 비서실장이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걸 대신 읽은 게 김행이었다. 그가 A4 용지 한 장에 적힌 '대국민 사과문'을
읽어 내려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7초. 다음 날 신문이 안 나오는 토요일 아침의 일이었다. 그건 '불통' 이미지의 한
상징으로 회자된다.
―17초짜리였는데.
"1분 정도 사과했으면 좋았을까? 내가 그런 게 부족했나보다. 좀 더 진정성을 담았어야 했는데 그게 부족했던 것 같다."
―스스로 판단한 것인가, 지시를 받은 것인가.
"대독(代讀)한 것이니까."
―그땐 왜 그렇게 짧게 말하고 나갔나?
"그게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어떤 사람은 구구절절 말하는 게 좋은 사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미안합니다'라고 한마디 하는 게 잘된 사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국민에게 질타 대상이 됐다면 반성한다."
―'명(名)대변인' 상을 갖고 있었나.
"기자들 입장에서는 기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걸 말해주는 사람이겠지.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삼갈 줄 아는 사람이 명 대변인인 것 같다."
―삼간다는 것은?
"대통령 철학을 잘 전달해야겠지만 모든 걸 다 알릴 필요는 없다. 나의 해석을 덧붙이는 건 최대한 자제하고 대통령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했다."
그
는 말했다. "나는 회고록도 안 쓸 거다. 나는 대변인 할 때도 그렇게 말했다. 기록은 대통령 사초에 다 기록된다. 대변인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나는 직원들에게 모든 메모를 다 파쇄하라고 했다. 모두 다. 그래서 지금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드나?
"누가 나한테 '그거 들고 나가서 책 쓰라'고 하더라. 소중한 경험이니까. 물론 메모는 다 했지만 메모는 적은 지 이틀 후면 다 파쇄했다."
◇"내가 대변인 될지 나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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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3월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가 국회에서 지연되자 김행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속한 처리를 호소하는 모습.
/이진한 기자
김행이 박근혜 청와대 초대 공동 대변인으로 임명됐을 때 '의외'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그는 정몽준의 참모, 그것도 실패한
참모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이었다. 16대 대선을 코앞에 둔 2002년 11월.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간 후보 단일화 협상 때, 김행은 정몽준의 대변인이었다. 중앙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오픈 소사이어티'라는 사설 여론조사
기관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정몽준이 패했고, 정몽준은 노무현 지지를 선언했다.
선거 전날인
12월 18일 밤 대반전이 벌어졌다.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전격 철회한 것이다. 그가 내세운 지지 철회 이유는 "노 후보가
약속을 깼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정몽준을 대신해 이를 공식 발표한 사람이 김행이었다. 대선 판이 요동쳤던 대사건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지금도 적지 않다.
노무현이 당선되면서 정몽준의 선택은 오판(誤判)이 됐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 오판에 김행이 일조했다는 말이 돌았다.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행이 이를 정몽준에게 내밀며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건의했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려주자 김행은 "완전 사기야, 사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김행은 그 대선이 끝난 뒤 정치판을 떠나 지방대에서 2년간 강의를 했다.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2007
년 나는 의류사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직을 놓고 이명박 후보와 경쟁하고 있었는데,
전·현직 한나라당 실·국장 50여명이 박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나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 시절 잠시 당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었다. 당시 박 후보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때 (지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오며 가며 뵈었고, (대통령이) 직접
연락 주신 적도 있다."
―왜 박 대통령을 지지했나?
"'브레이브 우먼(brave woman·용감한
여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6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지방선거 유세를 하다가 서울 신촌에서 피습당하지 않았나. 담담히
대처하시는 거 보고 훌륭한 여성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지했다고 대변인이 되는 건 아니잖나?
"내가 대변인이 될지는 전혀 예상 못했다. 인사에 관한 얘기는 하는 게 적절치 않다."
―왜 정치권에 다시 들어왔나?
"나는 청와대 대변인은 정치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무직 공무원이다. 정치권에 들어온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윤창중씨와 공동 대변인이 된다는 건 사전에 통보받았나?
"아니다. 정식 발표를 보고 알았다."
―알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윤 대변인이 언론계 선배라서 잘 알고 있었다. 특별한 감정이나 생각은 없었다."
―윤 대변인과 역할 분담을 어떻게 했나?
"공동 대변인이던 시절은 짧았다. 명백히 업무가 갈리지 않았다. 목표는 똑같았다. 오보가 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두 대변인 다 언론에 오래 있었으니 네 일 내 일이 어딨나? 나는 가판을 확인하고 대응하는 쪽 일에 치중했다."
―두 대변인 간 불화설도 있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갈등이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대변인이 스타여서는 곤란"
―어떤 사람이 청와대 대변인이 돼야 하나?
"
정권마다 원하는 대변인상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 때에는 이동관 대변인이 좋았을 거 같다. 우리(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준비되지 않은 말을 불쑥 하시는 분이 아니다. 충분히 숙고하시고, 마무리 말씀까지 다 준비해오시는 분이다. 그런 분이니까 그
말씀을 국민에게 잘 전달하는 역할이 대변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패션에 신경 쓰일 것 같은데 코디가 있었나?
"화장은 거의 안 했고 눈에 잘 안 띄는 검은색이나 회색 계통으로 입었다."
―왜 눈에 안 띄려고 했나?
"청와대 대변인과 당 대변인은 다르다. 대통령이 보여야지 대변인이 보이면 어떻게 하나. 처음엔 대통령 말씀 잘 들으려고 하다 보니 카메라에 찍히더라. 카메라 기자 옆에 딱 붙으면 안 찍히더라."
―언제 보람을 느꼈나?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게 된다.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냐. 그런 경험을 누가 해볼 수 있겠나."
―가족들은?
"딸(31·회사원)은 하루도 안 빼고 모든 기사를 다 찾아봤다고 한다. 무슨 일이 또 났는지 하고. 이제는 안 그래도 돼서 좋다고 한다. 가족이라는 게 그런 거다. 운명 공동체니까."
―원래 꿈은 뭐였나?
"내가 원래 제일 원했던 것은 기자로 그냥 남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앞으로 정치할 생각이 있나?
"인생은 자기 원하는 대로 안 가더라. 말은 조심해야 한다."
언
론인, 정치인, 여론조사 전문가로 살아온 그의 이력과 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직과는 연관성이 거의 없다. 낙하산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6명이 참가한 공개모집 절차를 거쳐 임명됐다. 여성 관련 기관이라고 해서 CEO가 여성학자나 여성계
인사가 반드시 돼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국정 철학을 확실히 이해하고, 대외협력을 잘해서 기관의 위상을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에 상응하는 능력도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아름다운 낙하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청와대에 있을 때 가장 고마웠던 수석 비서관이 있나?
이 질문을 받고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다들 잘 도와주셨는데…. 차 태워주는 기사 아저씨. 매일 6시 10분 전에 딱 전화해 주신다. 정확하게 한 번도 안 빠지고….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래도 한 명만 말해달라. 수석 중에.
"너무 높은 사람만 하지 말고…. 여비서한테도 정말로 고맙다. 춘추관 직원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