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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원
PKM GALLERY
서승원: 동시성-무한계
2021.9.8 – 10.9
서승원 화백은 50 여 년간 ‘동시성 Simultaneity’ 개념을 탐구하고 시각화하는 동시에 한국인의 정신 문화에 뿌리를 둔 현대 회화를 화폭 위에 구현해왔다. 1962 년 그는 엄격한 조형 구조와 밝은 색면을 전면에 내세운 기하학적 추상을 처음 선보인 이후, 국내 화단의 전환점이 된 비구상 그룹 ‘오리진 Origin’과 전위 미술 운동 ‘한국아방가르드협회 AG’의 창립인단으로 활약하면서 한국 미술의 확장과 세계화에 깊이 공헌하였다.
서 화백이 작가로서 평생 추구해 온 화두, ‘동시성’은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피안彼岸의 세계를 작가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동일하고 균등한 시공간 속에 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집안에 놓여 있던 소박한 백자 항아리, 책가도, 햇볕을 은근한 빛으로 투과시키는 문창살과 창호지, 빨랫감을 희게 하는 다듬이 방망이질 등과 같이 서승원의 화면에서는 그의 유년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옥 공간의 색色과 형태形, 비어있음魂과 그 정서가 끊임없이 걸러지고 개별의 경계가 허물어져, 이 모든 요소가 오묘하면서도 감각적으로 함께 존재하게 된다. 우리 전통미학과 정신을 세련된 현대적 감성으로 표현한 그의 투명한 예술 세계는 한국 현대 미술 역사에서 독창적 한 축을 담당하는 동시에 세계인이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
서승원, [동시성 67-2]
서승원, 동시성 67-3, 1967, 캔버스에 유채
서승원, 동시성 68-9, 1968, 캔버스에 유채
《서승원: 동시성-무한계》는 이와 같은 ‘동시성’이라는 대주제 아래, 서 화백이 거쳐 온 주요한 변화의 순간들을 되짚고자 기획되었다. 본 전시는 중성적인 컬러의 명료한 네모꼴 형태가 여백의 공간에서 미동하는 1960-70 년대 기하 추상에서부터 형을 완전히 해체하고 맑은 채색으로 무념과 침묵의 정신성을 지향하는 근작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변주를 통하여 구축된 서승원의 미술 역사를 압축적으로 조명한다. 나아가 그간 부수적으로 다루어져 온 드로잉과 판화 작업들에 전격 주목함으로써, 그의 작업 스펙트럼을 보다 다면적으로 펼쳐 보일 것이다. 전시 기간 중 평론가 윤진섭과 심은록이 필진으로 참여한 하드커버 화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서승원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33 년 동안 자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1963 년 오리진 그룹, 1967 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 1969 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를 결성한 주역이자 1975 년 도쿄화랑의 《한국 5 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展에 참가한 작가로서 한국의 전위 미술을 개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파리 갤러리 페로탕, 도쿄 센트럴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홋카이도 근대미술관 등 국내외 정상급 미술기관의 전시와 상파울루 비엔날레, 파리 청년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부산 비엔날레 등의 국제 미술 행사에 참여하였다.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광주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런던 대영미술관, 아부다비 구겐하임, 미에현립미술관, 시모노세키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기하학적 추상으로 풀어낸 단색화 원조, 서승원 ‘침정과 도전의 반세기’ 展
아트인포(artinfo) 기사 승인 2018.03.11. 16:35
[서울=아트인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피안의 세계에서 오는 것을 발현 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동시성이라고 본다."
한국 추상회화의 거목 서승원(77) 작가가 반세기 화업의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동시성'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개념을 설명한 말이다.
서울 삼청로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이 3월 8일부터 서승원 작가의 개인전 '도전과 침정의 반세기'를 마련했다. 서 작가의 50여년 화업의 중추인 '동시성'시리즈를 중심으로 총 23점의 작품이 전관에 펼쳐진다.
특히 올해 들어 제작된 푸른색 계열의 최신작품과 함께, 한국에서 공개하지 않았던 1960년대 기하학적 추상 회화 작품부터 작가의 1970~80년대 대표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서 작가는 한국에서 최초로 기하학적 추상화를 선보인 작가로 알려졌다. 그 시대를 일회성이 아닌, 오리진 창립 후 당시 화단의 실험 정신의 작품을 선보였고, 한 평생 추상회화만을 고집하며 우리 미술의 정체성에 대해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서승원 작가는 "60년대까지 서구의 미술인 앵포르멜과 액션페인팅이 지배하던 시절, 왜 이런 그림을 그려야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지성과 지각적 사고를 통해 우리 것을 찾아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1963년 홍익대학교 출신을 주축으로 '과거의 미술이 아닌 새로운 미술을 도전하고, 우리의 미술을 만들자'고 주장하며 오리진 을 창립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선배들로부터 '니들이 새로운 미술을 해'라는 비난도 많았죠, 하지만 4.19혁명과 같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자는 공감대를 형성된 상태라,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해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발표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분위기에 대해서 서 작가는 "'이것도 그림이냐'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먹을 것도 없이 가난했던 시절에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바보고 멍청하고 미친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며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별것 아닌 작업이지만, 그 당시에 오방색을 중심으로 한 환원적인 그림을 그리며 과거와 다른 새로운 그림을 그리자고 맘을 먹은 것이 오늘의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시발점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서승원은 1960년대 국내 화단의 주류였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중심의 사실주의와 비정형추상회화 운동인 앵포르멜(Informel) 사이에서 독자적 경향을 모색했던 추상 화가이다.
1963년 기하추상회화 그룹 '오리진(Origin)'을 창설했으며, 1967년 젊은 작가들이 파격적 시도를 대거 선보였던 '청년연립작가전'에 오리진의 멤버로 참여해 사각형과 삼각형, 색 띠 패턴과 빨강, 노랑, 파랑 등 오방색을 사용한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선보였다.
◆‘흰색보다 더욱 하얀 흰색’, 단색화 원조로 우리의 미감 선보여◆
"평생 추상만을 작업한 것 같습니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못 먹어 죽어도 오로지 내 그림만 쫓아온 작가로 봐 달라.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것이 진정한 예술이 아닐까 생각하죠."
수년 전부터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단색화'에 대해서 서 작가는 "최근 백자를 중심으로 풀어내는 한국의 흰색은 어불성설이다. 70년대 내가 추구했던 흐리면서도 희고, 희면서도 하얗지 않는 우리 선조의 정신이 바로 단색화가 아닐까 한다"며 "2016년 한국단색화전에서도 내 그림이 단색화의 원조라고 평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단색화 즉, 흰색 그림이 주목을 받은 것은 1975년 일본 도쿄(東京) 긴자에 위치한 동경화랑에서 개최한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白)'전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당시 전시에 참여했던 권영우, 허황,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등 한국의 5인 작가의 작품을 찾았던 당시 동경화랑 야마모토 사장이 "한국의 흰색은 일본에서 말하는 백색도 아니고 묘한 색이다. 어느 색에서도 볼 수 없는 걸러진 흰색이다. 오묘한 색을 지닌 것이 바로 한국의 흰색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서승원 작가는 "흰색은 백색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색상이다. 어린 시절부터 한옥에서 살면서 어머님이 빨래를 하시고 다듬이도 두드리며 보여주었던 그 흰색, 우리의 색을 거르기 위한 것 바로 수행과정이 함께할 때 비로소 과거의 살과, 영혼의 삶이 버무려진 것이 바로 오늘날 말하는 단색, 백색 바로 흰색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서 작가의 대표작 시리즈 '동시성'은 이지적이고 절제된 형태로부터 벗어나 점차 자유분방한 양상을 보여 왔다.
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피안의 세계에서 발현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동시성이라고 본다"며 "형태와 색채 그리고 공간 세 요소가 동일 값으로 하나의 평면 위에 동시에 어울린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서승원의 '도전과 침정의 반세기'전은 1960년-80년대 절제와 엄격한 질서를 보이던 작품이 주관적 해석과 자기화를 거쳐 사색과 명상, 자유의 화면으로 변화한 궤적을 보여준다. 또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작가의 치열한 예술혼을 통해 작가의 고집스러운 탐구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작업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4월 29일까지.
화가 서승원이 담아낸 뿌리 깊은 나무에 비추는 햇살
마크 테토의 아트스페이스 58
뿌리 깊은 나무에 비추는 햇살
거장이 평생 동안 일군 색을 만나다. 파도에 바위가 깎이듯, 생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진 색은 가장 한국적이자 서승원만의 세계를 만든다. 거친 바위가 만질만질해질 때까지. 혁명을 꿈꾸던 작가가 접어든 명상의 세계.
영혼을 비추는 빛
색이 만든 햇살이 아른거리는 작업실. 벽면에 세워진 캔버스 위 색채들이 아침 햇살처럼 공간을 환히 비추고 있다. 따뜻하고 정다운 색이 넘실거리는 화폭을 보자마자 마음이 반응한다. ‘몽글몽글’이라는 부사를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다니. 이 온화한 곳의 주인은 화가 서승원이다. 주로 작은 규모의 작품을 그리거나, 학생들의 면담을 위해 활용하는 공간. 아담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작가는 취재진을 위해 작업 과정을 보여주었다. 팔레트에 물감을 섞고 캔버스에 칠한 뒤, 그만의 터치를 위해 맨손으로 캔버스 위 물감을 매만진다. 손에 묻은 물감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서 작업복 바지 위에 손을 쓱쓱 닦아가면서 말이다. 손으로 매만진 작품은, 그래서인지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젊은 시절엔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외치던 소위 ‘반항아’였다는 작가. 그 폭풍 같은 시절을 보내고 평온과 무념의 세계를 창조하는 현재의 서승원 작가를 만난 날.
1960년대 초반부터 작품을 발표해 온 작가가 모아온 작업 연구 자료가 작업실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작품 사진부터 신문 기사까지 꼼꼼히 모아온 자료들은 그 자체로 작가의 역사를 보여준다.
“예술가는 결국 무언적인 것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는 사람이에요.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는 자기의 철학과 논리,
조형적 언어가 있어야 해요.
아무렇게나 그리는 게 아니죠.
아무렇게나 그리고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나쁜 거예요.”
M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서울 태생이에요. 신촌에 있는 한옥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지금 이화여자대학교가 있는 동네예요. 그때만 해도 완전 시골 분위기였어요. 한옥의 기와, 창호문, 장독대, 마당의 봉선화 같은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그 장면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M 당시는 미술을 전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받고, 학교 복도에 제 그림이 붙어 있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가 6.25전쟁 이후였고, 보리밥 먹기도 힘든 시절이었으니,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정신 나간 놈 취급을 받았죠(웃음).
M 그래도 미술대학에 진학했으니 성공한 셈이네요. 전공은 무엇이었어요?
회화를 전공했습니다. 당시 미술대학은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가 양대산맥이었는데, 저는 추상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홍익대로 진학했어요. 그때 김환기 선생님이 일본에서 추상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계셨죠. 그 새로운 시도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M 어떤 새로운 것들을 경험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동양화, 서양화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을 것 같은데요.
회화를 한다고 하면 서양화 전공이었죠. 영어로 하자면 페인팅painting. 하지만 그것이 서양의 회화라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당시 저는 동양과 서양의 화법보다는 헤게모니를 바꾸고 싶었어요. 제가 1960년도에 대학에 진학했는데, 그 해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정치적인 데모가 있었지만, 저는 그게 정치뿐 아니라 우리 사회와 문화에 대한 데모였다고 봅니다. 사고의 혁명을 일으키고, 구습을 타파하고자 하는 젊음의 움직임이었죠. 제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이었고, 우리는 단체를 만들어서 우리의 생각을 세상에 알리기로 한 거예요. 그 시작이 ‘오리진’이었습니다.
M 오리진에서 활동하며 주로 어떤 작업들을 선보였나요?
처음엔 주로 회화와 판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기하학적 추상을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생소했을 때였죠. 그때 제 작품을 보고, 그림에 자를 대고 그린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M 기하학적 추상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새로운 스타일의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무조건 말도 안 되는 걸 그릴 수는 없잖아요? 내 안에 체화된 무언가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기에, 제가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이 제 작품으로 만들어집니다. 제가 한옥에서 자랐다고 얘기했지만, 창살이나 대청마루와 서까래, 우리가 사용하던 목기들이 모두 기하학적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고 자란 많은 풍경들이 기하학의 한 부분이었고,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아요.
M 제가 한옥에 살아서 그런지, 작가님의 그런 경험들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니 반갑습니다.
작가라는 것은 결국 자라온 바탕과 체질이 그 작품을 만든다고 보거든요. 서승원의 바탕은 한옥이지요. 사람들에게 제가 자라온 문화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제가 살아온 바탕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M 기하학적 추상에서 한지를 중첩하여 붙이는 작업, 오방색의 추상, 그리고 지금의 부드럽고 여백이 느껴지는 작품까지, 작품의 흐름이 흥미롭습니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엔 해체하고자 했고, 또 그 후에는 확산을 꿈꿨고요. 그게 제 삶의 궤도와 일치한다고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나, 나의 인생을 작품에서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젊었을 때는 패기가 넘쳤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파도에 바위가 깎이듯 내 자신도 무뎌지더군요. 제 작품도 그런 시기들을 거쳐서 지금에 이른 거라고 봐요.
M 작품이 작가님의 삶을 닮아가는 거군요?
그렇죠. 저는 그 현상을 이론적, 이성적 체계에서 자유와 감성에 의한 확산으로 넘어가는 거라고 해석했어요. 소위 묵념의 세계로 넘어가고 있는 거죠. 나 스스로도 인생을 성찰하면서 명상적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거로 봐요. 이제 죽음을 앞두고 아무런 잡음 없이 나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거예요.
M 삶을 향한 깊은 성찰이 작품에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도 작가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특히 최근 작품들은 색감이 너무 아름다운데, 주로 그런 색들은 어떻게 떠올리세요?
아마도 제 추억의 색이 아닌가 해요. 저희 아버지가 편찮으셨던 겨울날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데, 그날의 하늘이 참 파랬던 것 같고요. 분홍색을 보면 어린 시절 마당에서 봤던 봉선화 꽃이 떠올라요. 흰색은 햇살이 어른거리는 창호지의 색이죠. 어머니가 곱게 발라 둔 창호지에 구멍을 뚫던 장난꾸러기 시절도 생각나고요. 그 색들은 오랜 시간 제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서 발효되거나 걸러지는 과정을 거치는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들이 빨래를 하고 다듬이질을 했던 것처럼요. 그냥 빨기만 해도 되는 것을 다듬이질을 하면서 더 공을 들이잖아요. 저는 그런 행위 안에 혼이 깃들고, 우리만의 색이 발현된다고 믿습니다.
서승원 SUH SEUNG-WON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한국 기하학적 추상의 개척자. 60여 년이 넘는 세월을 동시성’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1960년 대학에 입학한 이래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창의적인 미술을 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앵포르멜에 젖어 있는 한국 미술계를 뛰어넘고자 ‘오리진’, '한국아방가르드협회’를 창립하고 한국적인 미술, 새로운 미술을 주창해 왔으며,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MARK TETTO
JTBC〈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생활 14년 차, 북촌의 한옥 마을에 거주하며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매일 누리고 있다. 경복궁 명예 수문장을 역임하고, 한국 공예품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중 한 명. 매달 <리빙센스>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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