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공지한 대로 박승한 고문님의 안내로 경상북도 문경시의 박열의사기념관을 10월 2일(수)에 탐방하며 답사를 다녀왔다.
참여인원은 정재억 회장님을 비롯하여 이대주 신북역사문화연구회 총무, 그리고 고문님을 따라오신 김천주 전 춘천그린벨트철폐위원장님 등 모두 5명이었다. 9시에 모여 이대주님의 승용차와 회장님의 차까지 2대로 출발하였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문경IC로 나갔으며 둬 번씩 쉬면서 산보하듯이 박고문님의 옛 이야기도 귀담아 들으며 다녀온 답사 행차였다.
박고문님의 생애는 <북한강> 수필집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약간 귀가 어두우셔서 대화보다는 주로 듣는 일이 되었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친구랑 몽골로 가려고 가출하여 서울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결국 징용에 끌려가 원산에서 해방이란 것을 맞게 되었지만, 중국에라도 갔더라면 아마 독립운동을 하게 되셨을 거라는 말씀도 하셨다. 학업을 이어 서울대 지리교육과를 나오시고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춘성고등학교로, 강원중학교, 원주 대성고등학교로 전전하시던 이야기와 일속자 장일순 선생과의 인연도 들려주셨다. 선생이 아나키즘에 경도하셨던 기간은 바로 교편생활을 하시던 기간과 겹쳐진다. 우관 이정규를 비롯한 쟁쟁한 한국 아나키스트 1세대 동아리 모임의 마지막 젊은이였던 선생께서는 특히 박열 의사의 부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년)의 추모비제막식에 일본 현지를 다녀오시기도 했었다. 기념관 옆에 묘를 옮겨놓았다고 하여 기대가 되었다.
박고문님이 이번 답사행차를 얼마나 두고두고 생각하셨던 건지, 이대주 회원님 차량에 붙인 '박열의사기념관 관람단(춘천)'이란 직접 써오신 표지를 보고 알았다. 그렇게 생각을 두고 계셨던 탐방이었던 데 비하면 좀 더 여러 분들이 참가했으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지난 답사 때 들러서 보았던 댁 담의 격양가 모습이 뵐 때마다 뇌리에 떠오른다. 만년에 이렇듯 후배들을 위해 펼치시는 마음 자락이 참 넓기도 하다고 여겨졌다.

문막휴게소에서의 정담 모습.

사진기가 부실하여 휴대전화기로 스케치하듯 찍은 사진이다.(좀 더 양질의 사진은 회장님 사진을 기대합니다!)
박열(朴烈:1902-1974년)은 인터넷 자료에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있다.
"박렬의 초명은 준식(準植)으로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그의 애인 가네코 후미코의 협조를 얻어 천황 암살을 실행하려던 직전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천황 암살을 위해 해외에서 폭탄을 수입하려 했다는 것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으므로 1926년 3월 25일에 가네코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4월 5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두 사람이 일본검찰의 문초를 받을 때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일본 판사가 촬영, 사진이 사회에 누출되자 정부에서 국사범(國事犯)을 우대한다고 야당에서 들고 일어나는 등,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두 사람이 복역 중 가네코는 형무소에서 자살하였다. 1945년 8·15광복으로 박렬은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저서에 《신조선혁명론(新朝鮮革命論)》이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네이버 백과사전)
이 오래 전 자료에 비하면 기념관에는 박열이 입국하여 해방공간에서 국무위원으로 활동한 내용과 전쟁 때 북한으로 이송되어 1974년 사망하기까지의 약력이 상당히 자세하게 소개돼 있었다.
12시가 넘어 문경IC로 나서자 기념관 측에서 마중을 나와 차량을 선도해주었다. 기념관은 함양박씨들이 살았던 문경시 마성면 생가터에 자리잡았다. 나중 찾아보실 분들을 위해 네이버지도에 표시를 해보았다.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보도록 올렸다.


아담한 농촌마을인 지부실 마을로 들어서자 바로 뒷산인 오정산 자락 아래 입구의 대문이 보였고, 생가를 복원해놓은 초가집과 기념관이 보였다. 기념관 정면 앞은 성주산이 뒤편의 백화산을 거의 가리며 마주보였다.








차에서 내리자 박휘규 사무국장 이하 직원들이 인사를 하며 맞아주었다. 오미자차를 마시며 사무국장은 간략하게 2001년 이후 작년 개관하기까지 기념관의 연혁이나 궁금한 점들을 설명해주었다. 기념관의 도록은 아직 만들지 못했고 간단한 팜플렛만 있었다. 건립에 여러 문제가 복잡했으나 결국 57억이라는 기금의 보조로 개관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박물관은 홈페이지(http://www.parkyeol.com)도 있어서 참조해볼 수 있다. 올 7월에 있었던 개관1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도 여분이 있어 나눠받았다. 마을에 계시며 많은 자료들을 기증한 박정순 님도 나오시어 박고문님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관람하게 되었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걸쳐 많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1층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위주로 소개하고 2층에는 항일투쟁 과정과 법정모습 재현물을 전시하였다. 천황 암살기도라는 '대역사건'이었던 만큼 세계 최장인 22년 2개월의 옥살이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일 수도 있었지만, 가네코와의 관계나 그 전부터의 언론활동이 일본언론을 통해 파쇼집단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한 측면도 있어 보였다. 극악한 폭압의 적진 한가운데서 박열은 '운명의 승리자'가 되었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조선에 와서 살며 3.1운동을 보고 조선민족의 염원을 알았던 가네코는 박열과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1926년 옥중 자살로 의문의 종말을 고했다. 기념관은 이런 국경을 초월한 사랑도 한껏 보여주는 셈이다(박열은 해방 뒤 다시 결혼하여 아들도 있었으나 기념관은 이들과 선을 그으며 그 이전의 독립운동 시기를 대상으로 한다는 설명이 있었다). 아니 아나키즘이란 것 자체가 이미 국경을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던가!











위에 보이는 책들 중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는 박고문님이 기중 잘된 책이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최근 번역돼 나오기도 하여 따로 끼워 소개해둔다.(아래 사진)






아래는 해방 뒤 북한에서 활동한 자료들 및 박열,가네코 연구자들 모습들이다. 박열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상무위원으로 우리가 잘 아는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원세훈 등의 이름이 보인다. 특히 엄항섭은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의 최측근으로서 내내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납북 이후의 행적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여기서 박열과 함께 한 일들이 보여 흥미로왔다. 엄항섭은 납북인사로 별로 연구가 보이지 않았는데,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기 전 그는 바로 춘천의병장으로 순절한 직헌 이진응의 동생인 구초 이만응 선생의 제자였다. 습재 이소응 의병장의 사촌동생으로 춘천의병이 패산한 뒤 순절한 형님 직헌 대신 이만응은 모친과 집안을 솔가하여 양평으로 피신하여 서당에서 숙사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가르친 제자가 엄항섭이었다. 다만 엄항섭은 스승 세대처럼 조선의 사상적 문화적 전형만을 고집하지 않고 신지식으로 무장하고 스포츠에도 재능이 많았다고 전한다. 백범의 전기를 처음으로 추스린 사람이 바로 엄항섭이었는데 백범 암살 뒤로 그의 행적도 이제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행은 기념관을 나와 왼편에 있는 가네코의 묘소로 향했다. 기념관 앞에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고 그 위에는 정자도 보였다.



묘소에는 일행이 함께 묵도하는 것으로 참례하였다. 가네코의 유골은 박열의 형님이 수습하여 문경의 다른 곳에 안장하였다가 2003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하였다. 비문에는 1973년까지 생존하였던 쟁쟁한 아나키스트 1세대들의 이름이 보였고 박승한 고문님도 있었다.


한참을 관람하며 걷고 나니 점심시간도 많이 지났고 힘도 들었다.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르신들을 모시고 서둘러 지부실마을을 돌아나왔다. 도로변에 음식점이 보여 마성식당인가에 들어가 올갱이국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마침 내일부터 문경사과축제가 시작된다고 식당 앞에 안동에서 올라왔다는 트럭에서 사과를 내리며 사과상자를 쌓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 시간은 3시 반이 넘어 있었다. 이대주 회원은 어르신들을 모시고 먼저 출발하였고, 회장님과 나는 이왕 문경에 온 김에 운강기념관을 봐두고 싶어 가은읍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