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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 목 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낭만가객(浪漫歌客)
1.산수화(山水畵) <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자본담채, 40x211.5cm, 서울대박물관 장승업의 산수화 중 가장 이른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래는 횡권 형식이었으나 현재는 액자로 표구되어 있다. 가을철 단풍이 물든 숲과 이를 감상하는 인물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오른쪽 끝에 동자가 미는 수레를 탄 고사(高士)가 그려져 있으며, 화면의 나머지 대부분은 숲과 산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풍의 인물표현이나 호분(胡粉)을 바른 동자의 얼굴 모습, 그리고 수지법(樹枝法) 등 일부에서 장승업의 특징적인 면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초기적인 양상이 드러나 있다.즉 세부 필치에서 특유의 호방함이 전혀 보이지 않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되어 있는 점, 다양하기는 하나 다소 부조화된 나무들의 형태, 화면 중앙과 좌측 아래의 숲의 비례상 부조화 등에서 화보식(畵譜式) 남종산수화풍을 조심스럽게 익혀나가는 초기 습작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화면 왼쪽 끝 아래에 '장승업인(張承業印)'이란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다. <세산수도(細山水圖)> 자본수묵, 16x21cm , 서강대박물관 <세산수도(細山水圖)>자본수묵, 16x21cm , 서강대박물관장승업이 당시 유행하던 정형화한 남종산수화풍을 완벽하게 습득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아름다운 강변의 누각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담소하고 있고, 강 위에는 이들을 태우러 오는 듯한 배 한척이 접근하고 있다. 때는 가을인 듯 강 건너에는 갈대가 우거졌고, 이 쪽 나무들 중 일부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원 말 사대가 중 예찬식의 구도와 필묵법을 사용하여 깔끔하고 투명하며 쓸쓸한 가을의 정취를 잘 표현하였다.화면 가운데 접힌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작은 화첩이었던 것 같다. 전(傳)<산수도(山水圖)> 자본담채, 16.6x21.7cm, 국립중앙박물관 <방황학산초추강도(倣黃鶴山樵秋江圖)> 1879년(37세), 지본수묵, 22x21.4cm, 서울대박물관 1879년(37세), 지본수묵, 22x21.4cm, 서울대박물관 오세창이 편집했다고 전하는《근역화휘(槿域畵彙)》'지(地)'첩에 포함된 그림 이다. 이 작품은 위쪽에 "아무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혼자 외로이 작은 배를 띄웠네. 기묘년 가을 본관이 대원인 장승업이 황학산초(왕몽)의 가을 경치 그림을 본따서 그렸다는 글이 있다. 이를 통해 1879년 장승업이 37세 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원산과 근경 바위의 표현에 장승업의 특징인 꿈틀대는 듯한 생동감이 나타나 있어 그가 30대 중반 무렵에는 이미 자신의 산수화 양식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산수도의 기본 도상은《명공선보(名公扇譜)》에서 딴 것이다.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견본담채, 30.9x23.8cm, 서울대박물관 산간의 개울가에서 두 인물이 서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그렸다. 나뭇가지의 일부가 화면 경계에 걸린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큰 그림이었는데 가장자리가 잘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어떤 고사인물화였는지 지금 상태로는 잘 알 수 없다. 화법상 장승업의 특징적인 수지법 (樹枝法)인 옹이가 많은 줄기나 손바닥을 편 것 같은 가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년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무림촌장도(茂林村庄圖)>1884년(42세) 이전, 자본수묵, 26.8x160.5cm, 선문대박물관 이 산수도는 제목 그대로 무성한 활엽수림 속에 감싸인 시골마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넓은 강과 멀리 율동적으로 펼쳐진 산수 등이 전형적인 남종화풍으로 그려졌으나, 세부를 살펴보면 당시의 형식화한 화풍이 아니라, 붓질 하나 하나에 모두 생기와 활력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중간 강변의 바위 표현에는 서울대박물관 소장 <방황학산초추강도>와 유사한 표현을 볼 수 있다. 화면 위의 제문을 통해 중국 원대의 화가 방종의(方從義)를 방(倣)하여, 민태호(閔台鎬;1834∼1884)에게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민태호는 민영익(閔泳翊;1860∼1914)의 생부로서 사대당의 핵심 인물이었다. <산수도(山水圖)> 견본담채, 148.5x35cm, 서울대박물관 (도 26 10첩 병풍 중제9폭) 산수도 1폭과 화조영모 9폭으로 이루어진 〈산수영모 10첩 병풍〉(도36) 중 제9폭이다. 지금은 액자로 표구되어 있다. 이 산수도는 양식상 장승업이 40대 말경 가장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전경 바위에 보이는 풍부한 먹빛, 손가락을 펼친 것 같은 특이한 나뭇가지, 빳빳한 가시잎을 가진 소나무 등에 보이는 힘차고 생기 있는 필선, 그리고 원산 허리를 휘감은 백면을 이용한 연운 효과 등에서 장승업의 뛰어난 필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산수도의 원산에 보이는 뭉툭한 산의 형태와 생략적인 필묵법은 만년의 걸작인 최남선 구장〈산수인물도 8첩 병풍〉에서 한층 더 진전되어 나오게 된다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견본담채, 143.5x35cm, 호암미술관 근경에 큰 나무숲과 정자가 있고, 중경에는 작은 나무숲과 건물들, 그리고 원경에는 주봉이 솟아 있는 전형적인 구도의 산수도이다. 같은 소장처의 〈방황자구산수도〉에 비해 수묵선염을 많이 구사하여 전체적으로 차분한 느낌을 준다. 세부 표현에서 장승업의 깔끔하고 생동감있는 필치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방황공방 산수도[ 倣黃子久 山水圖 ] 조선 19세기 후반 비단.수묵담채 / 151.2×31.0cm 오원(吾園) 산수도(山水圖)의 전형(典型)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吾園은 화첩의 소폭(小幅)보다도 병풍이나 종축을 많이 사용하였다.화면(畵面)을 지그재그식으로 구성하여 近*中*遠景을 구분하고 遠景의高山은 黃公望(子久)의 필법을 본받아 피마준으로 부드럽게 표현했으나中景의 나무에서는 그의 힘찬 筆力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약간의 과장이 있으나 그 깔끔함이 돋보인다.조선 말기 화단을 풍미했던 천재 화가로 유명한 오원 장승업은, 일자무식의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어깨 너머로 중국의 명화(名畵)들을 구경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었고, 임금에게 그림을 바칠 정도로 이름을 얻었다. 산수, 인물, 화조, 영모, 기명절지 등 거의 모든 화목(畵目)에 정통했던 오원은, 산수에 있어서도 각종의 남. 북종화법을 혼합한 개성 있는 산수화풍을 구사하였다. 중국 원말 사대가에 속하는 황공망(黃公望)의 필의(筆意)를 따른 이 작품도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원은 자신이 즐겨 사용하였던 좁고 긴 화면에, 경물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감상자의 시선이 화면 아래에서 위로 단계적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꼼꼼하고 차분한 필묵법을 사용하여 전.중.후경의 어느 한 곳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완벽하게 그려내었는데, 정교한 선묘와 깔끔한 담채가 그림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기타해설)장승업의 산수도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장승업은 세로로 긴 화폭을 즐겨 사용하였지만 이 작품은 비례상 특히 더 길다. 그래서인지 흔히 전경(前景)에 있던 무성한 숲을 중경(中景)에 배치하고전경에는 수면과 작은 언덕, 다리를 배치하였다. 또 전경과 중경 사이도 다리로 연결하여 멀리 후경(後景)까지 시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이 작품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은 후경의 주산(主山)이다. 안개에 싸인 높은 산의 모습을 아주 섬세한 필치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화면위에 "방황자구묵법 오원 장승업(倣黃子久墨法 吾園 張承業)"이라는 관서가 있고, 화면 아래에 다시 "오원의황자구의(吾園擬黃子久意)라는 제문이 있다. 송풍유수 [松風流水]족자 비단에 담채 137*32.2cm 장승업이 활동하던 조선 말기는 추사 김정희가 길러낸 중인 계급의 지식층 문인들이 추사 예술의 지극히 조선적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외형적인 형사에 급급하여 맹목적인 중국풍의 호상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자연 그의 그림풍은 중국 취향이 농후하게 되었다.그러나 다른 이들의 그림이 단순한 중국풍으로 외형만을 모방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비록 같은 중국풍이긴 하지만 그는 이응헌의 사랑방에서 어깨 너머로 보던 그림을 어느 날 갑자기 배우지도 않고 신들린 듯 그려낼 수 있었던 천재의 기질이 있었기에 그림 속에 번득이는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수백 길 벼랑 위에서 입을 열어 팔방으로 부딪치며 꺾어져 내리다가 마침내 아득히 쏟아져 내리고 마는 거폭 아래, 이에 맞서듯 창연히 솟아올라 검붉은 송린을 자랑하는 장송의 모습은 임금마저도 묶어 놓을 수 없었던 장승업의 호방불기한 기질을 말해 주는 듯하다.소나무 밑 너럭바위에 마주 앉아 잠방이 차림에 가슴을 드러낸 채 폭포의 굉음을 들으며 찻물 끓기를 기다리는 선객들의 소탈 간략한 모습은 용트림하며 치솟은 소나무와 거폭에 압도당한 눈의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화면에 숨막힐 듯 번득이는 박진한 생동감이 항상 넘쳐 흐르니, 이 점은 세간에 살면서 시속을 거부한 그의 대오한 자취일 것이다. 장승업의 작품은 현재까지 많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웅장한 스케일의 구도에 고도로 숙달된 치밀한 화법이 돋보이는 중국풍의 산수화다. 이는 장승업이 조선시대를 통틀어 웅장한 스케일을 화폭에 집약시켜 소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화가였다는 사실이다.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참으로 아쉬운 점은 탁월한 기량에도그 화풍이 중국풍이라는 취약점이 있다. 영모도 대련 [翎毛圖 對聯] 쌍치도(雙雉圖) 호취도(豪鷲圖) 종이.수묵담채 / 各 135.5×55.0cm 두 마리의 독수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모습의 우측 그림은한 마리가 화면 위쪽에 그려지고 나뭇가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세를 취하고 있고 또 한 마리는 나뭇가지에서 한 발로 앉아 뒤를 돌아다 보고 있다. 독수리의 형태와 움직이는 자세가 매우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 진한 먹과 엷은 먹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속도감있게 그어 나간 필선의 자신에 찬 움직임이 형상과 어울려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각적 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숙달된 대가의 기운이 흘러 넘치고 있다. 전(傳)<인물도(人物圖)> 자본담채, 36.9x16.7cm, 국립박물관 동원 기증품인 이 소품은 장승업의 초기 인물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인물의 균형 잡힌 자세나 속도감 있는 필선에서 능숙한 표현력을 볼 수 있으나 아직 장승업의 특징적인 면모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관서 외에도 빠르고 수직적인 필선을 평행으로 잇대어 표현한 의습선을 통해 장승업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습선은 중국 청대 양주팔괴에 속하는 황신(黃愼)의 인물화법과 통하는 것인데, 장승업도 이런 표현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왕희지(王羲之),노자(老子) 1879년(37세), 지본수묵, 각 100.5x27cm, 고려대박물관 이 작품들은 <인물영모 10첩 병풍>(도22) 중 두 폭(제9·5폭)이다. 매폭에 안중식의 화제가 있다. 이 중<왕희지>에는 1879년(37세) 연기(年記)가 있어 중기의 인물화 양식을 판단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 왕희지가 산음(山陰)의 도사에게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거위를 얻었다는 고사를 표현하였다. 황희지가 동자에게 거위를 안긴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해하는 장면이다. 인물의 모습과 의습선이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필치로 그려져 있고, 진한 필선 위에 옅은 묵선을 잇대어 강조하는 수법도 볼 수 있다. 이런 인물화의 묘법은 나중에 조석진과 안중식에 의해 계승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아직 장승업의 원숙기 인물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기이한 안면, 신비로운 미소, 과장된 날카로운 의습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노자>는 노자가 청우(靑牛)를 타고 함곡관을 넘어갔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노자가 소를 탄 도상은 중국에서는 송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와 말기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왕희지〉에 비해 아주 생략된 필묵법으로 그려져서 마치 선종의 감필체(減筆體)도석인물화를 연상시킨다.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2폭 견본담채, 각 137.5x28.3cm, 서강대박물관 앞의 고려대박물관 소장 병풍 중 두 폭의 인물화와 양식적으로 유사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두 폭은 인물의 기본적인 도상이 중국 청 말 상해(上海)에서 간행된화보인《시중화(時中畵)》에서 본떠온 것이다. 인물들은 유려한 선묘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는데, 나중에 안중식, 조석진에 의해 계승된다. 그리고 특히 이 두 폭에 사용된 도상과 동일한 것이 안중식의 작품에서도 남아 있어 흥미롭다. 도연명애국도(元亮愛菊圖) 자본채색, 128x37.7cm, 개인소장 이 작품은 국화를 사랑했던 시인 도연명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하늘색 옷을 입은 도연명이 책이 수북이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동자가 소담스럽게 핀 노란 국화 화분을 보여 주고 있다. 도연명의 얼굴은 광대뼈가 두드러졌고 턱이 넓으며 입술이 두터운데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다. 이런 인물의 용모는 장승업이 즐겨 그리던 것이다. 또한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동자는 더벅머리에 가는 눈매, 꼭 다문 입술의 재미있는 모습인데, 역시 장승업이 즐겨 그리던 인물상이다. 한편 도연명 옆에는 마른 나무, 혹은 괴석과 같은 기이한 받침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대나무와 난초를 심은 화분이 얹어져 있다. 이런 기이한 괴석, 혹은 나무 등걸은 중국 명대 진홍수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며, 이후 청 양주팔괴나 해상파 화가들에 의해서 계승된다그리고 당시 중국이나 조선에 퍼져 있던 일종의 서화금석(書畵金石) 수집과 골동취미와도 관련된다. 선인채지도(仙人採芝圖) 견본담채, 100.5x37.0cm, 선문대박물관 폭포 옆 물가에 한 노인이 영지(靈芝)와 약초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벼랑 위에는 장승업 특유의 짧고 힘찬 가지가 촘촘히 달린 키 작은 잡목이 있고, 아래쪽에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감돌아 흐른다. 노인은 머리가 벗겨지고 수염과 뒷머리는 백발이다. 좌우로 째진 날카로운 눈매, 풍성한 뺨과 턱, 두터운 입술 등은 장승업의 도석인물화에 자주 나오는 모습이다. 얼굴과 의습선 등 인물 묘사는 가늘고 정확한 필선을 사용하였고, 산수 배경은 대담한 필묵법으로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이처럼 그는 영모화·화조화에서 화면 위의 주된 요소와 부수적 요소를 잘 안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 무송반환도(撫松盤桓圖) 자본담채, 각 126.5x30.5cm, 선문대박물관 왕희지와 도연명을 소재로 한 고사인물화이다. 이 두 인물은 장승업이 즐겨 그렸 으나 이 작품 처럼 정세한 백묘법이 구사되어 있는 것은 드물다. 우선<왕희지 관아도>는 앞서 고려대 박물관 소장<왕희지>와 같은 주제를 다룬 것이지만 여기서는 왕희지가 물가 바위에 기대 앉아 부드 럽게 헤엄치는 거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그려져 있다. 왕희지의 얼굴에 드러난 신비로운 미소, 기대 앉은 자세의 자연스러움, 유려한 선묘로 묘사된 의습선의 아름 다움, 그리고 헤엄치는 거위의 생동하는 모습 등에서 장승업의 뛰어난 기량을 엿볼 수 있다. 뒤쪽에는 기둥이 유난히 높은 기와집이 있는데, 전혀 사실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오히려 과장과 단순화를 통해 생동감을 획득 하였다. 한편 이와 동일한 소재를 견본담채로 더욱 정밀하게 묘사한 작품도 소개된 바 있다. 화면 위에는 19세기의 화가 춘방(春舫) 김영(金瑛:1837∼?)의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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