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내음 퍼지는 강변 / 임덕기
강변을 따라 걷는다. 멀리 보이는 산빛이 푸르스름하다. 맑은 기운이 솟아올라 산이 살아숨쉬는 듯하다. 겨우내 산은 잿빛으로 보이다가 봄이면 푸르스름한 색으로 여름이면 초록색으로 바뀐다. 강에서 불어오는 삭풍에 갈대의 외침이 잦아들면 봄은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땅밑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새생명들이 용틀임을 시작한다.
산책길 옆에 쑥이 다보록하다. 지난밤 한소끔 내린 봄비에 갈증난 목을 축이고 생기가 넘친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쑥밭이다. 머잖아 강가는 쑥과 갈대가 어우러진 쑥대밭이 되리라. 땅에 떨어진 누런 잎들과 시든 풀 사이로 쑥은 세상 구경하려는 듯 서로 발돋움하고 서 있다. 겨우내 마음의 문을 닫고 꽝꽝 얼어붙었던 대지가 포실포실한 흙으로 부풀어오른다. 넘치는 모성으로 씨앗을 받아들이고 움이 돋으면 보듬고 키운다.
며칠 전부터 쑥을 뜯으려고 눈여겨둔 곳으로 간다. 비탈진 언덕바지에 쑥이 지천이다. 쑥국과 쑥전, 쑥버무리, 쑥개떡 만드는 일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준비한 깔개를 펴고 쑥밭에 앉는다.
근처에 있는 제비꽃과 민들레꽃에게 정겨운 눈길을 보낸다. 따스한 봄볕 속에 앉아 있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싱그러운 쑥내음이 코끝에 스며든다. 포근한 햇살을 안고 강을 바라본다. 윤슬이 끝없이 파닥이고 적막감이 물위에 떠돈다. 햇살이 잘드는 언덕에 앉아 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순간이다. 더할 수 없이 마음이 안온해진다.
쑥을 손으로 뜯기 시작한다. 쑥과 교감이 전해지는 것일까. 겨우내 어두운 땅속에서 움츠리고 있다가 흙속을 빠져나온 쑥을 매몰차게 과도로 자르는 것보다 살포시 손으로 자른다. 쑥잎이 뽀얗다. 꽃샘추위를 이기려고 미세한 털이 잎에 나있다. 만지면 연하고 보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다.
쑥을 보면 배고픈 시절에도 자식들 잘 키워내신 어머니들 같고, 온종일 땡볕 아래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밭일하시던 시골 안노인들 같다. 그분들은 쑥이 곁에 있는 언덕에서 지금쯤 누워계시리라.
쑥은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냉이, 달래, 취나물 등과 함께 대표적인 봄나물이며 약초로도 쓰인다. 따뜻한 성질로 피를 맑게 하며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살균, 진통, 소염 효능이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며 산불이 나거나, 제초제 등으로 황폐해진 땅에서도 제일 먼저 쑥이 자란다. 자동차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공기 좋은 땅에서 자란 쑥이 좋다. 강화도 사자발쑥과 거문도 등 섬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쑥을 제일로 치고 유명하다. 자동차가 많이 지나다니는 도로가에서 자란 쑥은 중금속을 흡수한다. 독毒이 들어있는 식물인 투구 꽃잎도 쑥과 비슷해 조심해야 한다. 쑥내음이 나지 않으면 뜯지 말아야 한다.
쑥은 겨우내 땅속에서 뿌리로 웅크리고 있다가, 이른 봄이면 몸을 납작 엎드려 추위를 피한다. 사람들 발에 밟혀도 어떤 악조건에도 끄덕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쑥의 생존력은 놀랍다. 생명이 살지 못하는 땅에도 뿌리를 내린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에 쑥, 쇠뜨기, 유도화가 가장 먼저 싹이 돋았다. 환경에 적응을 잘해서 인류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식물이라고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질곡을 견뎌 생존의지가 강한 유전자로 진화하지 않았을까 싶다.
밭을 경작하지 않고 묵히면 머잖아 쑥밭이 된다. 첫해는 한해살이 식물이 차지하고 다음해는 쑥과 여러해살이 식물이 살다가 차츰 쑥이 밭을 장악한다. 그후 나무 씨앗들이 바람에 날아와 떨어지면 숲이 되어간다. 천이과정遷移過程이다. 쑥은 막강한 번식력으로 다른 식물들이 잘 근접하지 못한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보냈던 많은 이들은 고통을 잘 참아낸다. 삶의 의지력도 강하다. 그들은 고통에 단련되어 웬만한 상처는 예사로 여긴다. 큰 어려움없이 살았던 이들이 시련에 부딪히면 쉽게 무너져 안타깝다. 역경을 잘 이겨내는 이들은 어디서나 쑥쑥 잘 자라는 쑥의 강인함을 닮았다. 그들은 몰아치는 바람과 땡볕을 쑥처럼 견뎌낸다.
어린 시절 봄이면 어머니는 쑥과 멥쌀가루를 섞어 손으로 눌러 동글납작한 쑥개떡과 쌀가루에 버무려 찐 쑥버무리를 만들어주셨다. 여름밤에는 모기를 쫓으려고 화덕에 쑥을 태웠다. 매캐한 연기가 마당에 피어오르고 쑥내음이 진동했다. 평상平床에 누워 북극성과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은하수를 찾으며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보았던 깜깜한 하늘에 흩뿌려진 수많은 별들의 아스라함과 강렬한 쑥내음이 아직도 내 기억 저편에서 어머니와 함께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어느새 쑥이 비닐봉이 한가득이다. 쑥국과 쑥전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일어선다. 강변을 따라 계속 걸어간다. 길가 벚나무에는 꽃멍울이 벙글고 수양버들은 연둣빛 엷은 옷자락을 길게 너풀거린다. 머잖아 봄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강물에 오리떼가 노닐고 해오라기가 물속을 들여다본다. 다리 아래 개울물도 힘차게 소리내어 흐른다.
쑥내음 퍼지는 강변을 따라 봄이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