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에스라와 느혜미야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어느 정도로 말씀의 신앙이었고, 어떻게까지 말씀대로 결단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하고 엿볼 수 있게 하는 내용으로 실상 오늘 본문과 전후를 참조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복하고 돌이키며 전심으로 말씀대로 순복함에 있어서 당시에 적지 않은 힘과 세력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을 어떤 위협이나 위기들 등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구분하고 분리하며 쫓아내었던 것이고, 또한 재정적인 문제나 눈앞의 손해들 등을 각오하고서라도 안식일의 근본과 본질을 훼손하는 일들을 철저하게 막았던 것이며, 심지어는 오늘 본문이 있는 느헤미야서 뿐 아니라 에스라서 10장 등까지 참조하면 더욱 더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이방인과 결혼해서 이미 부부가 되었고 자녀들이 있는 상황에서까지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강조하신 말씀대로 거의 즉각적으로 헤어지고 냉혹하게 돌려보낼 정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때 당시와 같이 그들처럼 그대로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거나 무조건 율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사실상 구주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는 그 전에 율법 중심의 다양한 예표와 모형들, 약속과 계시들 등을 통해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했던 때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며, 특히 피 제사, 희생 제물, 성전 중심, 부정케 하는 음식, 안식일의 규례, 할례 등 많은 부분들에 있어서 다르게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면들이 있는 것이고, 실제로 통찰과 적용에 있어서 생각 이상으로 많은 변화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시간인 것이기에 모든 것 하나하나에 있어서 성경 말씀의 전후와 시대적 상황들 등을 분별하고 기도하며 하늘의 힘과 지혜들을 얻어 잘 알고 믿으며 결단하고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때 당시에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알게 하시고 강조하신 말씀들에 있어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힘에 지나도록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결단한 것을 명명백백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그렇게나 대단하고 가장 큰 지혜와 부귀와 형통의 왕이었던 솔로몬에 있어서까지 무조건적인 칭송이나 따름보다는 그의 과실들에 있어서 오직 말씀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분별하며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자복하고 돌이키며 제대로 된 믿음으로 섬에 있어서 반면교사로 삼는 것까지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도 그 어떠한 상황과 이유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일 수는 없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고, 오늘 우리들 또한 여러 모양의 문제와 손해들, 위협과 위기들 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말씀대로 자복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우리들이 생각할 때 이성적, 상식적, 현실적으로 곤란하고 버거우며 막막함이 보이는 사안들일지라도 다른 그 무엇보다 오직 말씀이 절대적인 중심과 기준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말씀의 신앙은 종종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게다가 세상적으로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들, 또한 세상적으로 대단해 보이고 많이 부흥한 것으로 보이는 초대형 교회들이라 하더라도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오직 말씀 앞에서, 오직 말씀대로 분별하고 경계하며 조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사실상 오늘 우리 안에 있고 벗하고 있으며 반복하고 있는 죄악과 세속과 정욕과 원망과 자기 소견과 온갖 불신앙들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과 영성과 삶들, 우리의 자녀들과 교회들과 나라 전체를 통째로 허약하고 위험하며 병들고 죽은 듯이 만들고 있는지, 그로 인해 결코 작지 않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들, 가시 덩굴과 엉겅퀴와 같은 현실들이 우리의 삶의 자리들, 이 나라와 교계, 온 세상 열방에 가득 차게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우리 믿음의 선조들처럼 하나하나 자각하고 발견하면서 더 늦기 전에 오늘 본문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과 같이 생각 이상으로 철저히, 힘에 지나도록 분명히, 내 눈에 비치는 것보다도 더 긴급하게 각성하고 애통해 하며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오직 말씀으로, 진정 다른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말씀을 절대적인 중심과 기준으로 삼아 각성하고 애통해 하며 두려워하고 의지하며 갈망하면서 결단하고 실천하며 몸부림칠 수 있어야 함을 내포하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피폐해져 있는 오늘날의 이 땅과 이 세대 한 가운데에서 처절하게 상기시켜 주시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만 따지고 보면 그러한 자복이나 돌이킴 그 자체부터 인간의 의지나 세상적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실상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 곧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며 구원에 참예케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에서는 돌이키며 그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 함과 함께 살아 있는 말씀의 신앙이 될 수 있도록 구주 예수님에 대해 미리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들, 약속과 계시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했든지, 또는 오늘날 우리들과 같이 이미 오신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고 있든지 간에 어쨌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며, 직접적, 경험적으로는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더 이상의 죄와 진노와 음부와 사단과 사망과 심판의 영적 노예 상태가 아닌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고, 본질적으로는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온전한 역사들에 있어 모든 우선과 전제와 근본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더 나아가 원론적으로는 그렇게 구원에 참예케 된 자로서 이 험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도 삶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들에서 더 이상 옛 사람과 같이 죄와 세속과 정욕들 등으로 인해 병들고 죽은듯한 신앙이 아니라, 또한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 능력과 방법들이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날마다 순간마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모하고 의지하며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죄악들과 싸울 수 있는 것이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주야로 더욱 말씀을 갈망하고 가까이 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믿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그와 함께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더욱 충만해 질 수 있는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말씀 그 자체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신 분일 뿐 아니라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시며, 게다가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단 한 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 특히 온갖 은혜와 은사와 응답들, 승리와 복과 부흥들 등이 갈수록 생생하고 강렬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느헤미야13:26)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3년 7월 7일(금)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