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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롬 2:6-11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롬 2:6-11 /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ㄱ)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ㄱ. 시62:12(참조,잠24:12)) 7)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참을성 있게 실천하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영광과 명예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8)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고 악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9)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겠지만 10)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앞 단락에서는 이방인들을 정죄하면서 동일한 죄를 저지르던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경고하였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함에 따라 보편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6-8)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심판의 대상은 각 사람이며, 심판의 기준은 행함입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지만 오로지 하나님만이 심판의 주체가 되심을 분명하게 밝혀주었습니다. 이방인들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심판의 기준도 혈통이나 선민이 아닌 행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선을 행함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세 가지가 있으니 바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구하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싸움을 좋아하는 자, 제 멋대로 하는 자,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9-11) 6-8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행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일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9-11절에서는 각 사람, 유대인, 헬라인이라는 언급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불문하고 차별 없이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차별 없이 환난과 곤고로 심판하십니다. “먼저 유대인에게요”라고 말하여 유대인도 예외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는 환난과 대조되는 개념이며, 평강은 곤고와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평강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이것 역시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이 없음을 말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과 상급이 편파적이거나 차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심판과 상급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버릴 악이 무엇인지, 행해야 할 선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속이 가득 찼다고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악기는 비어 있기 때문에 들리는 것입니다. 한번 비워보세요 내면에서 울리는 자기의 외침을 듣게 됩니다.-전경일〈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우리는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는 데 많은 에너지를 허비합니다. 주저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뒤집어쓰고서 세상을 느끼지 못하고 또 다른 얇은 보호막을 뒤집어쓰게 되며, 이것은 외로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뒤집어 쓴 보호막 속에서 남의 실수와 잘못을 쉽게 비난하면서 자신에게 관대하십니까?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조건과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내가 쓰고 있는 보호막을 한 겹씩 벗어내는 그 시작이 되는 날이기를 소망합니다.
누구나 심판 받습니다
박조준 목사
제가 그 동안 여행하는 관계로 여러분을 얼마 동안 만나 뵙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이 될 때마다 말씀을 사모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시는 여러분을 생각하며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 뵙게 되니 매우 반갑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로마서 2장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저녁 계속해서 로마서 2장 5절 이하 의 말씀을 같이 생각하며 은혜 받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 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로마서 2장 첫 부분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집스러운 마음, 회개해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하는 그 생활은 결국 진 노의 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다고 경고 합니다. 여기 쌓는다 는 말씀은 은행에 돈을 저축하듯이 쌓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후의 심 판의 날에 한꺼번에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벵겔이란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 사람아. 너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축복을 쌓고 있다고 하겠지만 좌우간 사람은 어느 것이든 쌓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축복을 쌓지 않으면 저주를 쌓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지금 쌓고 있는 가 잘 살펴서 축복을 쌓을지언정 저주를 쌓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심판은 어떻게 행해집니까? 6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아셔서 적당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금에는 소위 인정과세라는 것이 있습니다.세무 서원이 어떤 가게에 가서 가만히 보고서 아, 이 집에서는 한 달 동안에 얼마의 수입을 올렸겠다. 생각하고 그가 인정하는 대로 세금을 부과 합니다. 그러니까 공평하기가 어렵습니다. 정확하지 못합니다. 이런 과세 방법은 원시적인 과세 방법입니다. 과학적으로 해서 돈을 많이 벌었으면 세금을 많이 내고, 돈을 적게 벌었으면 세금도 적게 내 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제가 듣는 대로 어떤 소위 요령이 있는 상인들은 세무 서원을 만나 서 뇌물조로 얼마를 주면 세금 액수가 적어지니까 그렇게 사전 교섭을 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비합리적인 것은 세무원 한 사람에게 너는 이 한 달에 얼마의 세금을 징수해라. 하는 배당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집에서 적게 받았으면 그 나머지 액수는 다른 집에 가 서 뒤집어 씌울 수밖에 없습니다.이렇게 되니 자연히 애매하게 희생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선진국처럼 세율을 정해 놓은 다음에 돈을 번대로 세금을 지불하게 된다면 이런 모순과 부조리가 없어지게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민 역시 탈세만을 일삼지 말고 벌었으면 번만큼 나라를 위한 의무를 감당하려고 하 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 하나의 부당한 이득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다른 사람이 그만큼 희생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사전 교섭이 필요 없습 니다. 뇌물이 소용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는 억울한 것도 없습니다. 정확합니다. 공 평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6장 7절에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 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 고 하였습니다. 평범한 말씀이면서도 매우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콩을 밭 에 심었으면 콩이 나고 나중에 콩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벼를 심었으면 벼가 나서 자라고 나중 에 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콩을 심어 놓고 벼가 자라기를 바라거나 벼를 거두기 원한다면 이 거 좀 잘못된 사람일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선을 심었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었으면 악 을 거둡니다. 의를 심었으면 의를 거두고 죄를 심었으면 사망을 거둘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행함이란 낱말 라는 말은 단지 나타나 보이는 일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품 고 있는 일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불교에서도 사람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소 위 업(業)의 교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러면 바울 사도의 근본 주장인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와는 어떻 게 상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것은 구원의 조건이요,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멸 망할 자리에서 구원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으로만 판단되지만 불신자 에게는 행함에 따라 형벌이 주어지는 길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 람에게도 그 구원의 선을 넘어선 후에는 그의 행함은 그에게 상급의 조건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 다. 이런 의미에서 행함은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보응을 가지고 옵니다. 이 뜻을 이해하고 예 수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읽어보십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 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 영혼이 구원받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15절까지를 보십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 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 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불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공력은 사람이 구원받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변함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변하고 타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믿음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 의 덕을 위해서 한 일, 그러니까 이 일을 해도 세상에서는 칭찬도 별로 받지 못했을는지 모릅니 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변하는 세상의 것을 의미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덕을 위해서 일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이미 세상에서 칭찬과 상급을 다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의 심판이 이를 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일했던 사람의 공력은 그대로 남아 있 지만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일했던 사람들의 공력은 다 타 버릴 것인데 남은 것이 없단 말입니 다. 글쎄요, 남는다면 재나 남을까요? 그래서 그 날에 그렇게 되는 사람은 내가 지었던 집은 다 어디 갔나? 내가 세상에서 무던히 하느라고 했었는데? 하면서 한탄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 상급은 네가 이미 세상에서 받았으니라 하실 것입니다. 물론 예 수를 구주로 믿었으니 약속하신 대로 구원을 받을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다 큰 상급, 면류관을 받는데 아무것도 받는 것 없이 우두커니 있으려니 문자 그대로 불 가운데 서 구원받은 것같이 얼굴이 화끈거릴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부끄러운 구원 이라고 말합 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믿음의 식구는 한 분도 빠짐없이 다 구원을 받되 부끄 러운 구원을 받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보세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였습니다. 여기 각 사람 이란 말씀에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단체로 하지 아니하시고 개인으로 하십니다. 아마 단체적으로 심판하신다면 우리 갈보리 교회 다니신 분들은 어느 다른 교회 다니신 분보다 앞서서 구원은 말 할 것 없고 상급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개인입니다. 네가 어느 교회 다녔느냐? 그런 것은 묻지 않을 것입니다. 네가 누구의 남편이었고 누구의 아 내였나? 그런 것은 묻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것을 참작하게 된다면 진실되고 충성된 부인 을 모신 분들은 상당히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성경에도 그 날에는 두 사람이 자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둔다 고 했는데 여 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경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부부 같아요. 그리고 올리 움을 받은 사람은 누굴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인일 것 같아요.
그 리고 남편이 남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부인들만 구원하고 남편들은 구원하지 않는 것은 아닙 니다. 세상에서는 부부 일신으로 한 몸으로 지냈지만 하나님은 한 인격 한 인격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부부간이라고 해도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 니다. 한 사람은 상급을 받을 수 있고 한 사람은 상급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은 그 당시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는 너무 타격적인 말 씀이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 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어보는 대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저 선을 행한다 던가 악을 행한다던가 하지 아니하고 하나 하나에 설명을 가하고 있습니다. 여기 선한 사람에 대하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 라고 하 였습니다. 선을 행하는 데 참고 견딘다는 것은 얼른 생각할 때 좀 이상한 표현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데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그래 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할 때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 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 6장 9절) 하였습니다. 참고 견디는 인내가 없으면 계속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일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선을 행하다가도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 으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 또는 선을 행하다가도 도덕적인 우주에 대한 회의심이 생겨 낙심하기 쉽습니다. 시편 73편의 시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단편적으로 볼 때 그런 의심이 생길 수 있고 맥이 풀 릴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선을 행하는 데도 동정과 격려가 도무지 없는 냉정한 사회를 직면할 때 고독을 느끼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남의 얼굴이나 보고 선을 행해서야 그게 무슨 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내려오는 성현들의 말씀 중에는 덕은 외롭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고 했습 니다. 뿐만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데 오히려 비난하고 오해하고 배은망덕할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이 분들은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을 때 낙심하지 아니 하고 자기의 할 일을 했습니다. 옛날 모든 선지자들이 다 이와 같은 일을 당했다고 하면서 하늘 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선을 행하노라고 애쓰지만 무슨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선한 씨를 계속 뿌리노라면 반드시 거 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참음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인내 라는 말을 종종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내라는 말은 보통으로 생각하 는 참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바울이 인내라고 할 때는 언제나 희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4,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 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 다릴지니라 하였습니다. 왜 참아야 합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참을 수 있 습니다. 벌써 신앙 속에서 약속된 것이 환히 보이기 때문에 확신 있게 살아가게 합니다. 그런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이것을 결과적으로 말하면 인내에 틀림이 없으나 내용적으로 또는 동기적으로 말하면 역시 희 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영광과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 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인 내는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 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고 밝히 말했습니다. 여기 본문에 영광( ) 이란 말은 본래 의견 이란 의미입니다. 존귀( ) 라는 말은 평가 란 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을 행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썩지 아니함( ) 은 영원한 것을 뜻합니다. 변하고 없어지는 세상적인 것 이 아니고 영원한 세계에서 영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생명들입니다. 만일에 죽음 다음에 오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를 하면서 선을 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경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리라 (고린도전서 15:32)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어떤 사상보다도 철저합니다. 썩을 것을 구 하는 확신 없는 삶이란 인내도 없고 따라서 선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악을 행하는 자는 어떠합니까? 8절 말씀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절 말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겠지만 대표적인 일은 당을 지어 했습니다. 라 는 말인데 다툼 이란 뜻입니다. 본래는 , 즉 삯꾼 이란 말에서 온 것인데 삯을 받고 군사가 되었거나(傭兵) 정치 운동의 한 당파에 매수되어 무조건 그 파를 옹호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그래 서 당을 만듭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진리가 무엇인지 안중에 없습니다. 이미 1장 18절 말씀에서 생각한 대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불의를 좇는 사람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 신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선을 행하는 것은 언제나 고독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동관들과 있을 때 얼마 나 고독했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 표준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했더 니 사자굴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아니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외로웠는지 모르나 하나님이 함께 계 셨기 때문에 풀무불 속에서도 건짐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외롭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일에 따라 보응하십니다. 물론 이 말은 유대인이 좋아할 말은 아 닙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지위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언제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선을 행하는 사람과 악을 행하는 사람으로 구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는 다 똑같습니다. 누구나 악을 행하면 환 난과 곤고가 주어지고 선을 행하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편견도 없으십니 다. 차별도 없으십니다. 부나 지위나 교양이나 하나님 앞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외모 로 보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누구를 보나 십자가를 통해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을 때 아무리 죄인이라도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을 받았을 때만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가 기독교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게 된 것 은 너무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을 때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특권 의식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평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구원 앞에는 어느 한 쪽으 로 기울어지지 않는 평등, 참 평등이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 진리는 우리 인간에게 무한의 능력을 주는 동시에 이 진리는 우리 인간이 참으로 겸손하게 회개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시간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 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 평등합니다. 권세가 있고 없고, 돈이 많고 적고, 지식이 있고 없고, 가문이 좋고 나쁘고, 살색이 희든 노랗든, 남자든 여자든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선을 행했나 누가 악을 행했나 하시는 것만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을 의롭다 여기십니다. 주님은 아무리 죄를 범했어도 다 용 서하여 주십니다. 십자가는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나의 형편이 어떤지 살펴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선다면 악인 대접을 받을까 요? 그렇지 않으면 선인 대접을 받을까요? 아직까지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으신 분은 십자가를 의지합시다.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쉬임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생명 샘에 나가니 맘 을 씻어 주소서 4.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다
이영은 목사
평안하셨습니까?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니까 바쁘시죠. 로마서를 함께 벌써 3번째 나누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좀 딱딱합니다. 어떻게 하면 쉽게 나눌까를 목사가 고민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2장 6절에서 11절까지인데, 이 말씀을 가지고 최대한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같이 나눠보겠습니다.
옆 사람 얼굴을 잠깐 쳐다보십시오.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도 내가 낫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판단, 결정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전에 신문에서 목사가 본 것입니다. 감옥의 한 방에 살인범, 강간범, 절도범 세 명이 모여 한 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사람은 아동 성추행범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이 살인범, 강간범, 절도범이 간수가 나가자마자 폭력을 휘둘러서 그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신문에 났던 이야기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살인했고, 강간했고, 절도했던 이 사람들이 왜 아동 성추행범을 폭력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하나겠죠! ‘나는 살인했고, 강간했고, 절도했지만, 어린아이는 손대지 않았어! ‘최소한 나는 너보다 낫다.’ 재미난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다 이런 판단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죄인이고, 똑같은 죄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너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그런 예가 아주 잘 나오는데, 다윗이 나단과 함께 앉았습니다. 나단이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해 주겠다고 하며, 부잣집에 손님이 닥쳤는데, 그를 접대하기 위해 가난한 어린 양을 가져다가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결단코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고 있을 때, 나단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의 수하 장수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탈취한 사람,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그 죄인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바울이 21가지 죄의 항목을 다 정확하게 적어서 로마에 편지로 보냅니다. 바울이 보기에는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21개의 죄의 항목을 적어서 로마교회에 보내기 전에도 어떤 현상이 있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바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서가 도착하고, 로마서 1장을 읽고, 18장 이하의 21개 죄의 항목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맞아! 이방인들은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려고 그래!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어마어마한 죄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야!’ 정죄하고 판단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 2장 1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이렇게 시작합니다. 담대하게 바울은 이방인들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세워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정죄하고 심판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스리는지에 대해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만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비방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향해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욕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성경을 볼 때, 유대인만이 이방인을 공격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 그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향해 개 취급하고, 욕하고, 그들을 아주 천시했지만, 그러나 동일하게 이방인들도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판단하고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그것을 다 아울러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이곳에서 누군가를 판단하는 여러분까지 그 말씀 앞에 전부 다 끌어모읍니다. 그리고, 2장 말씀에 유대인들을 주 앞에 세웠지만, 더 나가서는 남을 판단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워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어쩌면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도 놀라운 교훈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남을 판단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 앞에 한 번 서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의 판단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세워주거나 그들을 격려하거나 그들의 영혼을 살려내기 위한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악의적이었고, 절망케하고, 좌절케하고, 어마어마한 상처를 주는 판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판단을 멈추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최소한 여기에 있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 이상 누군가를 판단을 하고 인생을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판단은 어떻습니다. 그들을 격려하면, 세워주며, 위로하며, 희망을 주는 판단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를 좌절을 주고 상처를 주며, 아프게 하며, 절망케 하는 판단이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판단하실 세 가지 규범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첫째, 2절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진리대로 판단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대로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판단했던 사람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기분이 나쁠 때 판단이 달랐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나쁜 사람에 대한 판단이 달랐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에 대한 판단과 이웃에 대한 판단이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첫 번째로 바울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판단한다” 우리처럼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인간관계에 따라, 내 기분에 따라,, 그렇게 판단이 흐려지거나 바꿔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은 진리대로 판단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판단은 옳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렇게 유대인처럼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목사도 그렇습니다. 목사도 많은 판단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 보면, 유대인과 동일한 판단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기 위한, 격려하기 위한, 희망을 주기 위한, 그들을 살려내기 위한 판단보다는, 내 마음이 상해서, 내 기분이 상해서, 그들을 정죄하고, 좌절케하며, 상처를 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오늘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맞습니다. 그분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에 지금까지 변함없이 진리대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을 판단하셨던 하나님의 판단이 지금 우리와 동일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쁘기 때문에 다르게 판단하지 않으시고, 진리대로 판단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맞습니다. 당신의 진리대로 판단하시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감정대로 기분에 따라 판단하신다면, 이곳에 있는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는 진리 가운데 서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에 지금까지 변함없이 진리대로 판단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을 판단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내가 이제는 너희들을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너희를 판단한다.라고 하나님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유대인들, 그들은 율법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현상학적으로 그들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켜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 앞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현대사회의 죄처럼 드러난 죄가 아니라, 표면적, 현상학적으로는 죄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떳떳하고 거룩한 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유대인들,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그들에게, 그들은 사람을 살인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간음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그것을 철저하게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 문제가 되는 동성애? 그들의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죄입니다. 율법을 그렇게 지켜 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죠?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온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을 향해,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범죄 했다"라고 선포해 버립니다. 현상학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너희에게도 그 죄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네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그 마음이 이미 누군가를 살인한 것과 똑같다고 선포해 버립니다. 네 마음에 음행의 생각이 있는 것이 간음 죄와 똑같다고 선포해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죄 가운데 전부 세워버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유대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은혜를 구하지 않고, 그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우리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오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펜을 들고, 담대하게 로마서 1장부터 다시 한 번 유대인들을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세워버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감사한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진리대로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진리대로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져서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누구나 십자가의 그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그 어마어마하게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최소한 그 진리대로 심판하는 자리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의 죄는 뭘까요? 그들의 죄는 이런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해 본 적이 있습니까? 교사로 헌신하다 보면, 아이들이 갑자기 이럽니다. ‘선생님 재 기도할 때 눈 떴어요’ 막 일러바칩니다. 교사하면 그런 일이 허다합니다. ‘재 눈 떴어요. 재 떠들었어요. 재 뭐 했어요.’ 문제는 너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 합니다. 재가 잘못했다는 것만 자꾸 일러바칩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늘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 교활한 위선 죄를 오늘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어떻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의 잘못을 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죄와 연약함을 너무 쉽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대로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감추지 못하고 드러날 것입니다. 전부 다 드러날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마음, 내가 했던 모든 동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억울함을 호소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죠? 그분은 진리대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오늘 한 주간 살면서 그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진리대로 심판하실 아버지 앞에 서야만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그 자리에서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입니다. 그 은혜를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진행될까요? 6절 보십시오.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고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것이 은혜임을 아십니까? 우리의 행한 대로 심판하심이 우리에게 은혜이고 축복인 것을 아십니까? 인생을 목사보다 더 많이 산 인생의 선배님들도 여기 계시고, 어르신들도 있으십니다. 우리 인생에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 보지 않았습니까?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무고하게 정죄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행하지 않은 것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억울할 까요? 뉴스를 보면 목사는 그것을 느낍니다. 이 시대 가운데 얼마나 억울한 사람이 많습니까? 죄를 안 짓고, 그 말 한적 없고, 절도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사람의 한 마디 때문에 그가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그것이 너무 팽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를 보면서,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옳은지,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해요. 하나님이 진리대로 심판하는 것 너무 감사하고요. 하나님이 행한 대로 심판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최소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억울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행한 대로만 하시니, 거기에 더하거나 빼지 않고, 행한 대로만 심판하시니,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이미 그 삶을 살아내셨잖습니까?
여러분! 유대인들을 한 번 보자구요. 그들은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행한 대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누명도 씌우고, 억울하게 해서, 그들을 심판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었습니다. 항상 율법을 소지하고 암송했습니다. 율법을 묵상하면서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특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의 특권은 지금 여러분이 지금 성경을 가지고, 소유하고, 마음대로 읽고, 묵상할 수 있다는 것만큼 특권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는,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제들만 성경이 있었습니다. 평신도들에게는 성경을 볼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에게 성경이 주어졌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소유한 것처럼 어마어마한 축복이었습니다.
문제는 뭐죠?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과 율법대로 사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했지만,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크리스천이 성경을 소유했지만,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놀라운 것은 율법을 소유했는데, 내가 율법대로 살아가지 않을 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율법 안에 있는 그 말씀이 나를 정죄하고 심판한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 성경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성경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지만, 성경대로 살아가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진리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 얼마나 좋은 세대를 살아가고 계십니까? 핸드폰을 켜서 유튜브에 딱 들어가면 이 민족의 유명한 목사님들의 어마어마한 설교들이 유튜브에 딱 뜹니다. 굉장히 질 좋고, 영성에 대한 설교도 수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를 합니다. 그 질 좋은 설교를 들으면서 내 신앙도 그렇게 질이 좋은 줄 압니다. 이것이 오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지켜 행해야만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행한 대로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들고 있고, 성경을 들고 있는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 행하는 행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항상 율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율법만큼 거룩한 줄 알았습니다. 그만큼 인생을 살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성도님들이 그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어린 친구들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했습니다. 구구단 시험날이 다가왔습니다. 선생님이 문제지에 구구단 시험을 냈습니다. 8X7=56. 어떤 학생이 답을 썼는데, 58, 또 다른 학생이 46, 선생님이 채점에서 다 틀렸다고 X 표를 했습니다. 58이라고 적은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옵니다. ‘선생님 이것은 불공평합니다. 왜? 정답은 56이었고, 저는 58로 적어서 차이가 둘 밖에 나지 않습니다. 쟤는 46을 적었습니다. 10이나 틀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둘 다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따지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 사고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삽니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진리 가운데, 저는 그래도 가까이 있지 않나요? 아니요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행한 대로, 점수 메기는 대로 틀렸다고, 둘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이렇게 적는 교사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동일하게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 율법 하나님의 진리로 그들로 심판했다면, 이곳에 있는 이방인인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될까요? 성경에 그 얘기가 나와있습니다. 14, 15절에 양심에 따라서 우리는 심판을 받습니다. 목사가 이 생각을 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과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 무엇이 더 중할까? 목사가 볼 때는 양심에 따라 심판받는 것이 더 힘들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여기 보면, 이방인들은 양심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양심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 동기를 심판합니다.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고 우리의 말을 심판합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역사의 한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우리가 정확하게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왜요? 최소한 이곳에 있는 여러분만은, 행함 대로 심판하는 그 앞에 여러분은 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이미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시고 매장되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위대로 심판하는 그 보좌 앞에 서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의 은혜가 나에게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말 두려웠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그 많은 죄를 하나하나 심판하실 때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죠. 왜냐하면, 오늘 하나님이 행위대로 심판하는 자리에서 은혜의 자리로 옳기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 주간 그 은혜를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연약해서 쓰러질 수 있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행위대로 심판하는 그 자리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부어졌고, 부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 은혜가 흘러갈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 번째로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시는지, 16절, “은밀한 것까지 심판하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은밀한 것을 심판하십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아주 정확하게 숨겨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에 플러스, 한 계명, 십일계명이 있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에게 한 계명이 또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계명인지 아십니까? 11계명, ‘들키지 말라’ ‘모든 나쁜 짓 다해도 들키지만 마라’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 앞에 들키지만 않는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붓을 들고 담대하게 16절에 기록합니다. “은밀한 것까지” 네가 생각했던 네 마음속 깊은 구석쟁이에 숨겨있던 작은 먼지 털 같은 그 죄까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두려운 심판입니까? 그런데, 놀랍게 바울은 16절에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뭐라고요? 나의 복음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나의 복음은 도대체 무슨 복음입니까?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나를 구원한 복음, 거룩하게 한 복음,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워 낸 복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이 복음, 이 복음, 영원한 나의 이 복음, 여러분! 여러분에게 그 복음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나의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같이 담대하게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복음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한 복음이 나에게 있다. 나를 치료하고 나를 강건케 한 복음,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세울 수 있는 복음이 있다. 영원한 복음, 여러분! 그 복음이 왜 중요했을까요? 왜냐하면, 나의 복음이 내 안에서 빛을 발하면서, 내 안의 숨겨진 은밀한 죄를 전부 들어내어 하나님 앞에서 치유되고, 회복되고, 정결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안에 든 그 복음이 내 안에서 빛을 발해야, 내 속 구석쟁이에 숨겨져 있던 모든 죄악을 끄집어 내어, 하나님 앞에 해결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나의 복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나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 복음이 내 안에서 빛을 발해 숨겨진 모든 것들을 들어내어, 정결케하며, 깨끗게 하며, 거룩게 하도록 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그래서 나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의 복음,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은밀한 것까지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목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릴리 레즐러라는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남태평양 파푸아 뉴기니 하우나 족을 전도하기 위해 그 땅에 갑니다. 그리고 성경 번역사업을 해야 하는데, 죄라는 단어에서 걸렸습니다. 죄라는 것을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번역해야 하는데, 이 죄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갑니다. 하우나 부족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죄가 뭡니까? ‘우리 하우나 족에 있어서 죄는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살인하는 것입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는 것이고, 쭉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레즐러 선교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죄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즐러 선교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4-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자기가 선포했습니다. 복음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 그 양심 안에도 법이 있습니다. 양심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밖에 드러난 죄만을 정죄하고 심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은밀한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고. 여러분! 유대인들이 피해 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피해 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못 피해 갑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은밀한 모든 것들을 들어내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누가 감히, 핑계를 댈 수 있고, 어느 누가 감히 안 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은 다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은밀한 죄의 문제까지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진리대로 심판하실 때, 행위대로 심판하실 때, 은밀한 것을 드러내어 심판하실 때, 여러분은 그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너무 감사하고, 너무 그 은혜가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은혜의 삶을 기억하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결론을 낼까 합니다. 우리에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실수했던 문제, 다른 사람을 상처 주었던 문제,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어!’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방법이 없었어!’ 그런 친구들이 여러분 가운데 왔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그렇습니다. ‘이해해! 나도 사람인데! 이해하지,’ 그렇지 않을까요? 누군가가 목사를 찾아와서 그런 연약함을 이야기하면 목사도 똑같을 것입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목사도 연약합니다. 목사도 동일한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할 까요? 목사는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바라보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요? 참아야 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클까요? 도저히 너무나 거룩해서 죄를 바라보지도 못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참고 인내하셔야 한다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서 끊어진다면 이 땅에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끊어진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한 주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진리대로 심판하고, 행위대로 심판하시며,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실 것입니까? 아니요.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십시오. 그분을 정확하게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모든 죄 짐을 벗어놓으십시오. 그리고 진리대로, 행위대로, 숨겨진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와서 자유한 축복의 삶을 넉넉히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동안 하나님 감사합니다. 진리대로 심판하실 그 자리에서 옮겨주셔서 감사하고, 행위대로 심판하실 그 자리에서 나를 구원해서 감사하고, 은밀한 것 모든 것을 심판하실 그 자리에서 나를 구원해 내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한 주간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
한인그리스도의 교회
한국에서는 대학에 들어가는 모든 학생들에게 수능시험이라는 것을 치르게 하여 점수에 따라 좋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성적이 아주 나쁜 사람은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심판의 기준을 시험 성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류 대학에서 발표하기를 금년부터 입학 기여제라 하여 성적이 나빠도 학교에 상당한 액수의 후원금을 낸 사람에게는 입학을 허락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보았습니다. 즉 성적이 나빠도 돈만 있으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 제도인 것입니다. 돈 없는 사람에게 불평등의 대우를 받게 하는 제도이기도 하지만 학교 운영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제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천국에 들러가는 자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기준이란 각 사람이 행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기준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으로 그 사람의 족보나 고향이나 학벌이나 돈과 상관없이 선을 행한 자에게는 영생으로 갚아주시고 불의를 행한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갚아주신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영생의 길과 노와 분의 길을 바로 깨달아 영생의 길로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행한 대로 보응 하시는 하나님(6, 11) [2]선을 행한 자의 보상(7, 10) [3]악을 행한 자가 받을 벌(8-9)입니다.
[1]맨 먼저 6절과 11절의 행한 대로 보응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했는데 행한 대로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 두고 틀림없이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한다거나 반대로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을 두고는 지옥 갈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쉽게 듣게 됩니다. 그러나 6절에서 말한 행한 대로 라는 말의 뜻은 몸으로 해내는 행함 즉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하시도록 몇 개의 말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감찰하시는 심판의 기준은 나의 앉고 서는 나의 행위와, 나의 생각, 내 혀의 말까지 다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말씀은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의 요약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 이지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사함을 얻고 구원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이지 믿음 없는 자가 아무리 선을 행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세 번째의 말씀은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믿음으로 구원 된 자는 구원 된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을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믿기만 하고 행함이 없다면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위의 세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인 행한 대로 라는 말의 뜻을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말의 뜻은 믿음 없이 선행만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될 수 없으며 또한 행함이 없고 오직 믿음만을 가진 자도 역시 합격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리거나 거절하는 마음과 또 몸으로 행한 모든 행위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가 유대인이든, 그가 이방이든지 간에 누구든지 아무런 편견이나 차별 대우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린 믿음에 따라 구원 된 자가 마땅히 행해야할 행함이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유대인이라도 믿음이 없거나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내리실 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분명히 정리해햐 할 것은 우리들은 믿음과 행함을 늘 따로 따로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데 믿음과 행함이란 나눌 수 없이 늘 함께 붙어 다녀야 하는 것으로 믿는 자는 또한 행하는 것이지 믿는 자가 믿기만 한다고 한다면 믿음에 대해 반쪽만 알고 반쪽만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두 번째로 7절과 10절의 선을 행한 자의 보상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선을 행한 자란 첫째 믿음을 갖고 그 믿음에 따라 믿는 자가 행해야할 행함을 하는 것을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좋은 일만 하는 선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한 자라 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기를 7절에서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했으며 10절에서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으로 보상해 주시되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선을 행한 모든 이에게 보상해주신다고 보장하신 것입니다. 영생이란 짧은 인생의 삶에 대조되는 영원한 삶이며, 영광과 존귀란 예수님을 하늘의 우편에 앉게 하시며 모든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하셨는데 주님을 따르는 모든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함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참 평강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특히 7절에서 이런 영생과 영광과 존귀를 받아 누릴 소망을 갖고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자에게 이런 귀한 것을 덧입혀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므로 끝까지 믿고 선행을 지속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마지막으로 8절과 9절의 악을 행한 자가 받을 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8절과 9절은 선을 행한 자와 정 반대가 되는 악을 행한 자가 받을 벌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8절에 소개된 악을 행한 자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 했습니다. 진리란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을 믿고 순종하여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예 복음을 거절하거나 아니면 복음을 받아 드렸으나 말씀에 불순종하고 악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든 자들은 악을 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믿기를 거절하는 모든 불신자와 하나님을 믿으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므로 악을 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악을 행한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노와 분이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뜻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에 환난과 곤고가 있다는 말의 뜻은 심판 후에 영이 받을 심한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행한 자에게 이런 벌을 내리시되 악을 행한 자가 이방인이든지 아니면 유대인이든지 외모로 차별하시지 않고 그가 누구이든 악을 행한 모든 이에게 똑같이 그들이 행한 대로 벌을 내리시어 고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사람들의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교훈입니다. 또 심판하시되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판단하시지 않고 속과 겉을 다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과 심판의 공정성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자의 족보가 이방인이든 아브라함의 자손이든 족보와 상관없이 개개인이 행한 대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한 자에게 영생으로 갚아주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 환난과 곤고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심판의 기준은 변하기도 하고 공정성이 없어서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이 받는 심판이 다를 수 있어서 같은 죄를 지었어도 돈 있고 권세가 있는 사람은 돈 없고 미약한 사람보다 더 좋은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변함이 없으며 또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준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던 모든 이들에게 드디어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때가 오게 되는 데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인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늘 쓰이는 말이 있습니다. 유전 무죄요 무전 유죄라는 말입니다. 돈이 있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는 심판을 내리고 돈이 없는 자에게는 죄가 있다고 심판이 내린다는 재판의 불공정성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공정성이 없는 이 세상에서 했던 대로 죄가 있으면서도 돈으로 해결해버린 그런 방식으로는 하나님 앞에서는 전연 통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죄가 있지만 권세를 잡은 자의 힘에 의해서 죄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이 세상의 부조리는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므로 그런 방법은 하나님께는 전연 통하지 않음을 밝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직 선한 심판을 받기 원한다면 선을 행하는 길뿐임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드리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고 구원을 얻는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행함을 실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실 영생의 심판을 받으라는 교훈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핑계도, 어떤 방법도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불평등과 부조리 그리고 모든 악의 세력이 그들이 행한 대로 환난과 곤고 그리고 노와 분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고 선을 행한 자는 그들이 행한 대로 영생과 영광과 존귀와 평강으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믿고 행한 자에게는 영원한 승리의 날이요 악을 행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패배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선을 행하며 어려워도 참고 계속 선을 행한 자에게는 영원한 승리로 갚아주시고 현재 악을 행하고 계속 악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는 영원한 패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 구원을 위해 늘 최선을 다하라는 권고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해들은 우리 모두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선을 행함으로 영원한 승리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행 함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을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행위는 오늘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에서 전혀 벗어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서에서 나오는 신의 노여움은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입니다. 잘못된 행동을 해야 야단맞는다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벌의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상의 기준은 칭찬 받을 행동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바울이 말하는 상벌이란 우리의 기준을 벗어난 채 주어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고 전혀 엉뚱한 데서 그 기준이 돌출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생각한대로 하나님의 상벌이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면, 필연코 하나님의 상을 받을만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인간은 날 때부터 그 마음에 계획한 바가 악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상을 받을 만한 선한 행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 반면에, 하나님 편에서는 그 어떤 행동도 선한 것이 되지 못하니까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려는 시도를 버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인간의 생각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너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아느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세상 상식에서 생각해 버린 교회들이 구원은 은혜라고 가르치면서도 상을 얻기 위해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이고 상은 행함이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상이 각각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함이 같이 어우러져서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주장을 반박하기 딱 좋은 구절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는 이 말씀은 행함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내세우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고전 3:8의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말씀 또한 좋은 이용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고 했으니까 우리의 행위가 잘못되면 그에 따른 마땅한 보응을 받을 것이고, 행위가 옳으면 역시 그에 따른 마땅한 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는 구절은 분명히 6절과는 서로 상반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6절의 말씀이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그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한다면 11절에서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서 '외모'란 잘생기고 못생긴 얼굴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천국과 지옥으로 구별하시는 분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상도 주고 벌도 주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6절은 어떤 의미의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선한 행위가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론은 '없다'이기 때문에 결국 6절 말씀에 근거해서 모든 인간은 멸망에 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한 대로 보응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오늘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면 우린 당장 죽어서 지옥에 가야할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천국을 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행한 대로 보응 하시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1: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26절에서도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다고 말씀하고, 28절에서도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신 인간의 상태는 모두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고 각기 제멋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어버려 둔 인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 스스로의 깨달음이 아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4절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라고 말합니다. 내어버려 둔 인간들 가운데 회개라는 것을 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찾아 나오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는 고백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자신의 잘못된 것을 뉘우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뉘우침으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회개를 자기의 것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했다'고 생각하니까 회개한 자신에 대해서 의를 가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신 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종교를 만들고 하나님을 만들어서 종교놀이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회개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신 결과라고 4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어 버려 두신 자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자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들은 자신이 어떤 운명 속에서 무엇을 근거로 해서 빠져나왔는가를 밝히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만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7-10절까지에서 말하고 있는 선과 악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7,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10절에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인간을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구분하듯이 하나님도 역시 인간을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선한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악한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하는 선과 악은 윤리와 도덕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구분하십니다. 세상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윤리라는 틀에 합당한 사람이면 선한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선한 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선한 자가 되었다가 아니라 선하신 예수님 안에서 선한 자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절에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선한 행위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 다른 말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선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버려진 인생에게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도함 받아 자신의 죄를 아는 회개에 이른 자들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을 지어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것, 세상의 것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일이란 예수님 안에서 남을 도와주고 착한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만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쓸데없는 일에 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주님이 오시면 세상은 끝나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나그네로서 부족한 것이 있고, 남들보다 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래의 영생의 나라를 바라봄으로서 미련을 떨쳐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율법을 잘지키고 교회를 잘 다니는 종교 행위를 통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구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 헬라인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그네로 살아서 구원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로 산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택함 받은 자로서 주님 안으로 부름 받은 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서 세상이 아닌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더욱 추구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발견되어진다면 그것은 저주 아래 있던 나를 택하셔서 믿음을 더해주신 결과임을 알고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보응
조성노 목사
오래 전 얘깁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부부가 대구에 계신 부모님을 뵙기 위해 가다가 갑자기 남편이 심장발작이 일어났습니다.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다행히 갖길에 차를 세우고 고속도로 순찰차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부인이 강남 큰 교회 권사인데, 때는 이 때다 싶어, 남편을 몰아세웠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정말 죽어’ 하고 협박하다가 드디어 제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데, 남편이 자꾸만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제 아내 말처럼 이번이 마지막입니까?’ 저는 ‘아니오, 아마도 우연일 겁니다’고 했습니다. 놀란 분은 권사님이었습니다. 엉뚱한 소리로 초를 치니까 말입니다. 못마땅해 하며 ‘아니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저는 열심히 저녁식사를 하는데, 그 권사님은 실망해서 식사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권사님 말씀처럼 이번 일은 하나님 경고가 맞습니다. 그러나 일단 아닌 걸로 하겠습니다. 우연으로 돌리겠습니다. 제가 볼 때 남편 분은 아직 멀었습니다. 이번 같은 일을 10번은 겪어야 돌아올 것 같습니다.’ 남편이 기분이 상해하더니, 그 계기로 싹 다 바뀌었습니다. 그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고, 심지어 커피까지 끊었습니다. 그러더니 큰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분 정년이 3년 정도 남았습니다. 요즘은 툭하면 권사님이 제게 전화를 합니다. 남편이 교회에서 잘한 일 한 건 하면 자랑하느라 전화를 합니다. 그분은 복 받은 경우고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기가 당한 일이 하나님의 경고로 알고 자신의 길을 수정했습니다. 옛날에 비하면 건강도 훨씬 더 좋아졌다고 합니다.
구약을 보면 유대인은 질병을 하나님의 징계로 봤습니다. 물론 이것은 철저한 율법적 사고이기에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나 본문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9절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그러니까 선악간에 하나님이 보응하신다는 말씀은 신약이든 구약시대든 상관없이 언제나 유효하다는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환난이나 병 같은 것은 우리가 심고 뿌린 것의 대가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탈이 나고 병이 나면 망가집니다. 결국 무책임하고 게으르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 때문에 병이 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병이 죗값이라는 게 맞습니다.
여러 해 전에 고인이 된 코메디언 이주일씨는 2002년 8월에 향년 62세를 일기로 작고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했습니다. 나이가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분은 너무 일찍 죽은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사셨습니다. 지난 30년간 하루에 담배를 2갑씩 피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62세까지 살았으면 장수한 겁니다. 고인에게는 죄송하지만, 그게 다 죗값입니다. 그분이 죽기 직전에 코에 호스를 끼고 휠체어에 앉아 공익광고를 했습니다. ‘담배, 그것 독입니다. 제가 담배를 1년 전에만 끊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 한국인의 사망률 제1위는 암입니다. 암 중에서 1위는 폐암입니다. 놀랍게도 남성과 여성이 똑같습니다. 그다음이 위암, 간암, 대장암 순위입니다. 어째서 한국인이 폐암으로 많이 죽을까요? 이게 우연입니까? 폐암 1위가 10년이 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성인 흡연율 세계 1위, 청소년 흡연율 세계 1위입니다. 청소년 흡연율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십시오. 지난 2000년의 자료입니다. 고3 남학생을 기준으로 한 통계인데, 미국이 28.2%, 일본은 26.2%, 영국이 20.5%, 러시아 19.4%, 이스라엘 9.3%, 우리나라는 41%입니다. 고3 100면 가운데 41명이 담배를 핍니다. 그러니 당연히 폐암 사망률 1위이지요. 이래도 폐암 사망률 1위라는 결과가 하나님의 보응 아닙니까? 욥기 4장 8절입니다.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시편 9편 15절입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가운데 ‘구원 받은 사람도 죗값을 치러야 하느냐?’고 묻는 분이 계실 겁니다. 물론 죄가 구원하고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후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소관입니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부모님에 의해 태어납니다. 태어나는 자식의 동의를 얻어 딸이나 아들 낳는 게 아닙니다. 부모의 은혜로 우리는 태어납니다. 그러나 태어날 자식이 얼마나 부모의 기대에 맞게, 자식답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자식의 몫입니다. 그래서 개망나니 노릇하면 부모가 징계합니다. 똑같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혜로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만약 우리가 경건하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이 보응하십니다. 당신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이 더 때리십니다. 우리는 흔히 ‘왜 제가 죄 지을 때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하면서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깁니다. 이것은 억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독립된 인격, 책임적 주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래서 잘하면 상을 주시고 못하면 벌을 주십니다. 물론 그 벌은 죽으라고 때리는 게 아니라 돌이키라고, 잘 되라고 때리는 벌입니다. 더는 못난 짓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때리십니다. 그래서 죄에는 반드시 징계, 보응이 따릅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징계가 없다면, 그 사람은 사생자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그런데도 소위 므리바 사건으로 가나안 입성에 실패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문턱까지 왔는데 하나님이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반석을 명해 물을 내라고 했는데, 모세는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후려쳐서 생수를 터뜨렸습니다. 이게 하나님께 큰 죄가 되어 모세는 광야에 뼈를 묻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가 혹 천국 못 간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변화산에 올라가 두 사람을 만나는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납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를 만납니다. 모세는 비록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징계를 받았지만 천국은 갔습니다. 죄에 대한 가혹한 징계는 받았지만, 그게 구원의 타락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구원은 손상 받지 않으나 징계는 피하지 못합니다.
학자들이나 각국 기상 당국의 예상에 의하면, 올해는 홍수나 가뭄, 태풍, 해일 같은 자연재해가 과거 어느 해보다 심할 것이라고 합니다. 갈수록 빈도나 피해규모가 늘고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각종 공해로 인한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입니다. 온실가스가 주범입니다. 인류가 직면한 자연재해는 사실상 인재입니다. 그동안 무자비하게 자연을 학대한 결과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심지어 괴질이나 메뚜기떼도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도 모든 불행이 죗값이라는 고정관념은 거부하셨지만, 재앙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절 이하입니다.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은 분명 죄 때문에 망하고 하나님의 보응을 당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지으며 삽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창세기 6장 5절 이하입니다. 이 말씀은 노아의 홍수가 왜 일어났는지를 밝히는 대목입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얼마나 악이 극에 달했으면 하나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고 한탄하셨겠습니까? 오죽하면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려고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8장 21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6장과 8장 차이가 무엇일까요? 6장과 8장 사이에는 노아의 회개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8장 20절을 보십시오. “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우리에게 이것과 같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제사를 드리며 은혜와 사죄를 빌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달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징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을 보십시오. 로마서 2장 5절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회개하지 않으면 진노를 쌓는 꼴이 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올해는 회개하는 데 더욱 정직합시다. 그래야만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평강의 복을 누릴지언정, 진노와 환난과 곤고의 불행을 당하는 불행한 성도가 없기를 기원합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김성광 목사
A. 행함, 보응에 대하여
1. 행함, 보응
2. 본문 배경 설명
B.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롬 2:6)
1.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
- 기도(믿음), 영생(롬 2:7)
2.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보응하신다
- 불의, 노와 분(롬 2:8a)
3. 악을 행하는 자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
- 악행, 환난, 곤고(롬 2:8b∼9)
4. 선을 행하는 자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
- 선행, 영광, 존귀, 평강(롬 2:10)
C. 선을 행하여서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얻는 성도가 되자(롬 2:11)
A. 행함, 보응에 대하여
1. 행함, 보응
어느 교도소에는 감방마다 비밀 녹화시설이 되어 있어서 죄수들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녹화된다고 합니다. 교도소에 들어와서 점점 좋아지고 있는지, 아니면 더 나빠지고 있는지 그것을 토대로 해서 일일이 체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작당을 한 사람들은 한 사람씩 불러다가 사실 여부를 확인합니다. 그때 가서는 “나는 절대로 안 그랬습니다." 하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비디오 테이프에 증거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방 안에서도 착한 행실로 동료들에게 선을 베푼 사람들에게는 감형을 해 줍니다. 비록 감방 안이지만, 그곳에서도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도 하나님께 상 받을 행동을 한 사람은 상을 받고, 벌 받을 행동을 한 사람은 벌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요즘은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많이 방문합니다. 그런데 떠날 때, ‘견문기'라고 해서 그들이 한국에 온 소감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그것을 보면 “한국은 참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좋은 예절을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람들의 결정적인 약점은, 교육열이 높아서 많이 배우고 공부는 많이 했지만 행동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는 것은 많은데 행동이 없다, 의식은 바뀐 것 같은데 실천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한국 사람은 ‘행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대로, 배운 대로, 생각하는 대로만 하면 부정부패도 없어지고, 정경유착도 없어지고, 나라가 잘되고, 복지국가가 되고, 선진국가가 될 텐데,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올바른 삶, 선한 삶에 대한 보응을 받지만, 더 나아가서 죽은 후에도 평가를 받게 됩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웨슬리(John Wesley ; 1703∼1791) 목사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첫째, 네게 준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 둘째, 네게 준 돈을 어떻게 썼느냐? 셋째, 네게 준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가 행한 일로 말미암아 최종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에게는 영생의 축복이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도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장 10절에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시겠습니까?
2. 본문 배경 설명
본문 말씀 로마서 2장 6∼11절은, 사도 바울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해 교훈한 말씀입니다.
유대민족은 교만하여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한 번 선택받은 민족은 어떤 죄를 지어도 축복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대민족을 향해 경고했습니다. 아무리 선택받은 선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쉽게 죄를 짓고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그 죄 값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대로 보응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교훈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교회에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잘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축복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나 위험이 닥칠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와 사랑을 받겠다는 것은 결단코 잘못된 생각입니다.
B.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報應)하시되"(롬 2:6)
본문 말씀은, 하나님은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위대로 다시 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 줄 자에게 상을 주시고, 벌 줄 자에게 벌을 주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생과 축복을 주시지만, 의심을 가지고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약속을 성취하여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본문 말씀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보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악을 행하는 자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넷째, ‘선을 행하는 자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 - 기도(믿음), 영생
“참고 선(善)을 행하여 영광(榮光)과 존귀(尊貴)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永生)으로 하시고"(롬 2:7)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죄악과 방탕으로 타락한 삶, 육신의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존귀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참고 견디며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2절에는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잠언 21장 21절에서 솔로몬 왕은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풍족하게 허락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영광을 구할 때 땅의 영광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나라를 바라보고 영생과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땅만 바라보고 욕심과 탐욕만 추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욕심만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이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사람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인해 노사간에 갈등이 생기고 분쟁과 싸움이 끝나질 않습니다. 이기적인 정치가, 이기적인 사업가,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민족주의자' 혹은 ‘애국자'라고 부릅니다. 더 나아가서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을 우리는 ‘휴머니스트'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도 ‘크리스천'이라 불리기를 소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나는 교회에 나갑니다." “나는 예수 믿습니다." 하고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이기주의자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민족주의자도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휴머니스트도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재물도 재능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혹은 우리 주변에 크리스천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얼마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부인 안 씨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39년생으로 63세밖에 안됐으니까 한참 나이입니다.
안 씨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손자며느리로서, 집안에서 현모양처 소리를 듣는 아주 정숙한 부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동아일보 사장이고, 그의 주변 인물들 또한 이한동 국무총리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같이 정계와 재계의 정상급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명한 가문에, 명예와 재물도 있고, 정숙함과 미모, 학벌까지 두루 겸비했으니, 한마디로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아주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절에 가서 일천 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 과정에서 받은 큰 충격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극복할 수 없어서 결국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참으로 국가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그분이 교회에 나왔더라면 권사가 되었을 것이고, 그 어려움과 고통과 번민, 정신적 혼란과 원통함 속에서도 금식하며 기도하고 철야하며 기도하고 새벽에도 기도해서 고난을 극복했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절망과 고통과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마음에 억울함과 원통함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찬송해야 합니다.
구역장으로 교회에 나가던 고춘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부턴가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고 세상적인 욕심이 생겼습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식고, 예배에도 소홀했습니다. 교회와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에 우환이 닥쳤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아들이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척추가 부러지고 여러 군데 뼈가 골절되어 온몸에 마비증상이 나타나자 그만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쳤는데, 피해자 가족이 합의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시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들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아팠습니다. 진통제를 먹으면 나을 줄 알았는데, 진통이 몇 주째 계속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더니, 자궁에 종양이 두 개 있는데 증세가 심각하니 큰 병원으로 가서 빨리 수술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큰 병원에서 다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심장이 좋지 않아 종양 수술은 할 수 없고 생명이 위태롭다고만 하였습니다.
그는 사면초가가 되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참담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했구나. 내가 기도하지 않았구나. 내가 그동안 교회를 떠났었구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연락을 하여 교구장님께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전도사님, 목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예배 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설교도 오래간만입니다. 찬송도 오래간만입니다. 기도도 오래간만입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1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을 듣고 마음의 완악함과 교만함과 탐심이 깨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하나님, 항복합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습니다.'
그후 기도원으로 가서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옵소서. 위험과 사고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아들은 산재보험 처리가 되어서 병원에 입원하여 제대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피해자와 합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금식 기도를 통해서 자궁의 혹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눈물의 회개를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주를 위해 열심히 살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꼭 환난이 닥쳐야, 사고를 당해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돈, 명예, 권세만 추구하고 나가면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의 손길이 떠나갑니다. 그 순간부터 악한 마귀 사탄의 세력이 공격하고 침범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쫓아 선을 행하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악한 마귀 사탄이 공격을 해서 저주와 심판과 질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선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보응하신다
- 불의, 노와 분
“오직 당(黨)을 지어 진리(眞理)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不義)를 좇는 자에게는 노(怒)와 분(憤)으로 하시리라”(롬 2:8)
우리 주변에는 당을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당을 만들고 탐심과 교만으로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진리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쫓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아서 홍해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도 불순종함으로 싸움에 패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류 역사 가운데서도 악한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형통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대로 두고 보시기만 하시겠습니까? 보응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겸손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욥기 22장 23절에도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나라 애국가 가사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우리 정치도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고, 경제도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고, 국민도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면 이것저것 다 망하게 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흥하게 하시고 번창케 하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시고, 이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시고, 이 나라가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시고 구원하여 주소서.'
시편 37편 1∼2절에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농부가 잡초를 베어 내듯이 하나님께서 속히 베어 버리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서도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불의의 보응을 받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5절에서 사도 바울도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불의한 자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자는 그 집안이 몰락합니다(욥 18:19, 21). 가난하게 됩니다(잠 13:23). 화를 당합니다(합 2:9).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행 1:18).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고전 6:9). 심판 날에 형벌을 받게 됩니다(벧후 2:9).
한 가지 불의를 허용하면 또 다른 불의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불의를 버리고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겸손하게 기도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33세의 나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컴퓨터 회사에 들어가 10여 년을 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늦게 장가를 가서 아내와 자식이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바가지를 심하게 긁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회사에서 진급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도 공부해서 빨리 진급해야지요. 이 월급으로는 못 살겠어요. 이사도 가야 하고, 아이도 낳았으니 생활비도 많이 들잖아요. 그러니 빨리 과장이 되세요."
아내는 아침에도 ‘과장', 저녁에도 ‘과장', 잠들 때도 ‘과장', 전화를 걸어서도 ‘과장' 늘 ‘과장' 타령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만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압박감 때문에 공부도 되지 않았습니다.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시험을 보기는 봤는데, 답안지에 ‘올스톱', ‘전면해제', ‘과장'이라는 단어만 나열해 놨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합격은커녕 회사 창고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바가지는 결국 자신을 과부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아내의 탐욕과 교만, 욕심이 화를 부른 것입니다. 능력도 되지 않는데, 때도 되지 않았는데 욕심만 부려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쫓는 자를 분노로 보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내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때를 기다리고 축복과 영광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악을 행하는 자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
- 악행, 환난, 곤고
“악(惡)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靈)에게 환난(患難)과 곤고(困苦)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롬 2:9)
악을 행하는 사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사람,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헬라인이라 할지라도, 주의 종이라 할지라도, 장로·집사·권사라 할지라도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환난에는 외적인 것도 있지만 내적인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도 않고 말씀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막연하게 마음속에 희망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받을 만한 믿음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순종하고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보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시편 34편 16절에서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의 생명을 세상에서 빨리 끝나게 하십니다.
짐승도 사납고 악한 짐승은 결국 멸종이 됩니다. 바다의 상어, 육지의 사자나 호랑이 같이 사나운 짐승은 그 수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온순한 짐승은 번창하고 오래 가지만, 사나운 짐승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서도 보면,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빨리 세상을 떠납니다.
잠언 22장 8절에서도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악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충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생명을 보존하시고 직장과 사업을 번창케 하시고 우리를 축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생명을 주시고 영생을 누리게도 하시며, 저주를 내리셔서 지옥에 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일본의 우치무라간조(內村鑑三 ; 1861∼1930) 선생은 “악인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반드시 그 보응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점점 범죄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본도, 미국도 범죄가 일어나는 시간 간격이 자꾸만 짧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경찰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많은 범죄가 일어났는데, 살인 사건은 9시간 만에, 강도·강간은 1시간 만에, 절도는 3분 만에, 재산 범죄는 2분 만에, 폭력은 1분 만에 한 번 꼴로 일어났습니다. 범죄가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범죄 건수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탐욕과 욕심과 교만을 추구하다가 악하고 사나워져서 이웃에게 각종 범죄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때 악하게 살지 말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선을 베풀고 도울 때, 하나님께서도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자손까지 번창케 되는 것입니다.
4. 선을 행하는 자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
- 선행, 영광, 존귀, 평강
“선(善)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榮光)과 존귀(尊貴)와 평강(平康)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10)
우리는 인생을 살되, 악하게 살지 말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선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 친절을 베푸는 것, 착한 행동을 하는 것,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광스럽고 존귀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마음속에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12장 28절에서 “…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선과 의를 행하면 우리와 우리의 후손까지도 영원히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고, 충성해야 할 때 충성함으로써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는“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행한 대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선을 행하는 자는 자신도 복을 받고 후손도 복을 받습니다(신 12:28).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됩니다(잠 11:27). 뼈가 견고해집니다. 건강을 누립니다. 장수의 축복을 받습니다(사 58:11). 물질의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됩니다(눅 6:38).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얻게 됩니다(롬 2:10).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요삼 1:11).
영국의 유명한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 1593∼1633)는 “만약 당신이 악을 행한다면 기쁨이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선을 행한다면 고통은 사라지고 즐거움만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고통스럽게 살 것인가, 즐겁고 기쁘게 살 것인가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선을 추구하면 즐거울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감사가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 고통과 괴로움과 양심의 가책만 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서인 『탈무드』에는 “악은 처음에는 달고 뒤에는 쓰며, 선은 처음에는 쓰지만 나중에는 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은 결과가 좋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남 몰래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십니다. 처음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고, 피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의 씨앗을 뿌리면 선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입니다.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B.C. 384∼322)가 한번은 제자들을 불러 놓고 질문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선생님, 돈 없는 사람이 제일 불쌍합니다."
“아닙니다. 병든 사람이 더 불쌍합니다."
“아닙니다. 고아가 더 불쌍합니다."
“아닙니다. 남편 없는 사람이 불쌍합니다."
여러분은 누가 제일 불쌍한 것 같습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병든 사람입니까? 고아입니까? 과부입니까? 그때 아리스토텔레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보람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자도 아니고, 성경의 내용을 인용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보람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보람된 일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선한 목적으로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더라도 선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다녀야 합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며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갤럽사에서 최근 ‘삶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은 사람', 즉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누군지를 조사했는데, 주로 구제활동, 자원봉사와 같은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70∼80퍼센트가 기독교인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사회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고, 인생을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서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은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본인 스스로가 행복과 만족을 느껴야 합니다.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은 ‘핫스프링필드호텔'입니다. 그런데 이 호텔이 이렇게 유명하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장인 핫스프링필드 씨는, 젊은 시절 돈은 없었지만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교회에서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모여서 각자 자기가 낼 수 있는 건축헌금의 액수를 빈 종이에 적었습니다.
핫스프링필드도 건축헌금을 작정했습니다. 당시 건축비가 총 15만 불이었는데, 그는 5만 불을 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15만 불을 다 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다 내라!'
‘하나님, 나 말고도 수십 명이 있는데 왜 내가 다 내야 합니까?'
‘그래도 네가 다 내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15만 불을 적어서 제출했습니다. 만 불은커녕, 단돈 천 불도 없는 사람이 15만 불이나 되는 건축헌금을 다 내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나는 천 불도 없는데, 만 불도 아니고 15만 불을 다 내라니요?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는 마음이 답답해서 근처 야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찌 하면 좋습니까? 써내긴 써냈는데, 드리기는 드려야겠는데, 나는 한 푼도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 눈을 떠보니 자기가 기도하던 곳 근방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습니다. 혹시 모세가 광야에서 보았던 연기가 아닌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연기가 아니라 수증기였습니다. 땅을 파 보았습니다. 땅속에서 분명 뜨거운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온천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복덕방으로 달려가서 그 땅의 주인이 누군지 물었습니다. 그 땅은 오래 전에 내 놓은 땅인데, 살 사람이 없어서 누구든지 원하면 헐값에라도 팔려던 땅이었습니다. 그는 다음날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서 싼값에 넒은 땅을 샀습니다. 사람들은 다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천을 개발하고 그 땅에 세계에서 가장 큰 호텔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15만 불을 헌금하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적인 재벌이 되어 많은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15만 불을 적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가 헌금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충성하는지 압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능력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도구로 삼으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과 불신앙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순종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상 줄 자에게 상을 주시고, 복 줄 자에게 복을 주시고, 높이 들 자를 높이 드십니다. 하나님 스스로 영광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앙에서 벗어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전심으로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져 주십니다.
C. 선을 행하여서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얻는 성도가 되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外貌)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 2:11)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속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믿음이 크면 크게 역사하시고, 믿음이 작으면 작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