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 박수현
나팔꽃 씨앗을 베란다 화분에 심었다
줄을 휘감고 자라 천장까지 다다른 덩굴손은
초록초록
징검징검
계단을 오르내리는 어린 천사들 같다
밤새 어린 소란을 베고 눕는다
잠 속으로 크고 작은
분홍의 어린 방들이 생겨났다
모닝 글로리 모닝 글로리
꿈에서도 들리는
은빛 트럼펫 소리
하늘 난간 덩굴손처럼 아침을
부여잡고 돌아보는
황홀한 내연內緣
- 박수현 시집 <처녑> 2025
차경借景 / 박수현
나는 매주 집 한 채를 짓는다
공중파TV 어느 다큐프로그램을 흉내내서
물 맑은 계곡 주변 혹은
어느 한적한 산자락에 터를 다지고
조촐한 단층 황토집이거나 북유럽식 중량목구조집
다락이 있는 초록 박공지붕을 짓는다
때론 폐가를 불하받아 인테리어에 골몰한다
<택리지擇里志>까지는 모르지만
배산임수 꼼꼼 따지다가
맹지라 헐한 땅을 골라 쾅!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닳도록 도면을 그렸다가 지우며
세웠다 허물고 허물었다 다시 세우는 집
풀방구리에 새앙쥐 드나들 듯하며
앞마당에 서너 평 연못을 파고
서쪽으로 콩기름 먹일 툇마루를 달아맨다
집 한 채를 얽는 일은
종당 집을 에운 풍경과 바람을 구슬리며
주춧돌을 놓고 벽을 두르고 지붕을 얹는 것임을 알겠다
다만 공중을 빌려 앉힌 집
아침마다 휘파람새는 맑은 햇살을 물어오며 붐비고
마당귀 살구나무와 조롱박은 진종일
땅속으로 제 지경을 넓혀갈 것이다
어느새 그 집 안주인이 된 나는
마른 새우 넣은 아욱 된장국을 끓여내고
짭조름한 간고등어 한 토막을 구워 저녁상을 차려 낼 것이다
- 박수현 시집 <처녑>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