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에 5인 이상 집합금지가 발령되면서 자율 취재를 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집 근처에 부산진성이라는 곳이 있어 취재를 다녀왔다.
부산진성은 조선 태종 7년,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상좌도 수군사령부가 주둔하던 부산진에서 병선과 수군, 그리고 물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증산 아래에 쌓아졌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에게 파괴당하고 일본군들이 증산 정상에 증산 왜성을, 동남쪽에는 왜성을 방어하기 위해 지성을 쌓았는데 그 당시엔 본성인 증산 왜성을 '어머니 성' 이라고 표현해서 모성, 본성을 지키는 자성을 '아들 성' 이라고 해서 자성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부산진성이 자성대 공원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일본식 이름으로써 본래 이름인 부산진성으로 부르는 게 옳다. 부산진성의 중심에 있는 진남대는 장군의 지휘소였던 '진남'이라는 남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1974년, 부산진지성을 정비하면서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증층누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진남대가 있는 위치엔 일본군이 물러가면서 일본인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거주하던 천수각을 허물고 명나라를 받들던 그 당시의 흐름에 따라 명나라 장수 만세덕을 기리기 위해 만공대가 지어졌었다. 진남대 옆에는 천만리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천장군 기념비도 위치하고 있다. 서문에는 서문 성곽우주석이라는 돌기둥이 서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에게 공격을 가장 먼저 받았기에 두 돌기둥에 각각 '남요인후'(여기는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라는 뜻), 서문쇄약(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 새겨져 있다. 이것들은 앞으로 일본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마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동문에서 계단을 따라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최영장군비각이 있는데, 그곳에는 최영 장군이 입던 옷이나 사용하던 칼, 여러 제사 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 바로 옆에 '최영장군 사당' 이라는 제목의 장군의 일생이나 성격을 설명해주는 글이 적힌 팻말이 있었다. 이렇게 전투나 군사적 건물들뿐만 아니라 영가대, 숲 속 도서관같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도 있었고, 역사를 알리기 위해 지어진 조선 통신사 역사관도 있었다. 그리고 주민들을 위한 여러 체육 시설들도 구비가 되어있어, 산책을 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신 부산 동구 래추고 주민협의체의 정순태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