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특집
귀룽나무를 위하여
전종호
영문도 모르고 뿌리째 뽑혀온 귀룽나무를 위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물을 주는 것은 비단
새 땅에 다시 뿌리를 박게 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옮겨와 죽을지도 모르는 나무 하나 살리려는 뜻은
물 돌아 흐르는 계곡에서 맞던 별빛을 잊지 못해
벗들과 헤어지기 싫어 며칠을 울던 아픔을 나누고
온몸으로 맞던 비탈길 바람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나무의 텅 빈 마음을 안아주기 위함이다
낯선 마을에 와 기다릴수록 외로움은 깊어지고
깊은 그리움으로 얼굴 가득 꽃 피울 내년을 기약하며
햇빛 찬란한 가지 사이로 박새라도 몇 마리 불러
맑은 노래 부르고 싶은 나무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사무쳐 그리움으로 꽃이 피어나고
바람 이는 숲이 되고 산이 되고 구름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싶은 나무의 바람을 알기 때문이다
뿌리째 뽑아 심은 사람들의 그늘이 되었다
환한 빛이 되는 나무의 아침을 알기 때문이다
해 지는 곳으로 가고 싶다
석양에 홀로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이제 아름다움의 일이 아니다
살아온 여행길 목메는 기쁨과
아름다운 풍경 뒤에 가려진
고통을 계산하는 일이다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마는
어제 행복해서 미친 사람들이
오늘 같잖은 우울에 죽고
저기 숨죽여 울던 사람들이
오늘은 꽃 한 다발 들고
환하게 웃기도 하는 법
일은 적당한 곳에 두고
때때로 사람은 멀리하면서
세상에서 멀어진 외딴 섬에서
너와 함께
해 지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마지막 빛으로 당당히 타오르고 싶다
마지막 이사
이사했다. 파주 파평면 눌노리. 허공의 집에서 지상의 집으로. 마지막 삶의 터전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부여에서 자라 공주에서 공부했다. 서울, 안양, 광명, 고양을 거쳐 아버지의 고향 사리원에 가까운 파주까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살아왔다.
눌노리訥老里, 앞으로는 파평산이 있고, 뒤로는 함경도 마식령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흐른다. 율곡 이이와 함께 기호학파를 형성한 유학의 거두 우계 성혼의 파산서원이 있고, 파평 윤씨 시조의 탄생설화에 관련된 용연龍淵이 있다.
현대에 와서는 한국전쟁으로 대규모 미군이 주둔했던 곳. 이제 세월은 퇴락하여 아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워 전교생 40여 명이 재학하는 용연초등학교가 있다. 주로 노인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고 남의 동네 노인들을 모신 대규모 요양 시설이 두 개나 들어와 있다.
이사하면서 영어원서부터 책을 버렸고, 옷을 버렸고 이제 맬 일 없는 넥타이를 버렸다. 부질없는 시 쓰기를 버려야 할 차례다. 노년의 연대에 진입하기 시작한 나도 눌노리訥老里에서 임진강 물소리를 들으며 말의 절제와 지혜를 배우는 눌노訥老의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보는 짙은 밤의 어두움과 코끝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공기와 풀꽃 내음. 소리라고는 물소리밖에 없다.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주인 잃은 강아지가 한 마리 새 식구로 들어왔고, 고양이 새끼가 도둑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기품있는 어미 닭 두 마리와 병아리 세 마리를 멀리 홍성에 가서 모셔왔다. 집에 모과나무와 산딸나무와 수국, 능소화를 심었고, 마을 나무로 귀룽나무 세 그루를 모셔왔다.
새순이 날 때까지 매일 아침 귀룽나무에 물을 주라는 조경사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발적으로 이사 온 나와는 달리 영문도 모르고 뿌리째 뽑혀온 귀룽나무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