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은 뒤 좋은 세상 온다'는 말을 남긴 주재년 열사
-지역인재 배출의 요람으로 역할을 다 해온 돌산향교-
‘나 죽은 뒤에 좋은 세상이 온다.’는 말을 남긴 주재년 열사를 배출한 돌산향교는 지역인재들을 배출한 요람으로 역할을 다 해온 것이다. 돌산향교에서 수학한 이들 가운데는 주재년 열사가 있다. 작금에 주재년 열사기념관이 있다. 작금 상촌쯤에 15세로 최연소 독립운동가 주재년 열사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왔다.(작금 길 40-6)
주재년 열사는 작금마을 농민의 3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수재로 소문났으며, 어린 시절 서당 주상규 선생으로부터 천자문, 한글, 일본어를 배웠다. 명량하고 활달한 그는 담력도 뛰어났다. 주재년 열사가 다닌 서당이 바로 돌산 향교를 말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곳에서의 5년의 교육을 마치고 1939년 돌산국민학교에서 치른 검정고시에서 합격하여 3학년으로 입학을 하게 된다. 3-4학년의 성적을 모두 우등상을 받았고, 5-6학년 시기에도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운동을 좋아하고 기력도 좋았다고 학적부에 적고 있다.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도 1943년 3월 돌산국민학교를 졸업한다. 가정형편상 중학교진학을 한 해 미룬 뒤 부모를 돕고 있었다. 그 사이 40대의 한 사람을 만나면서 민족의식을 확고히 정립하는 과정에 마을 담장에 적힌 4마디가 적히게 된다. 일본과 조선은 다른 나라다.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다.
조선만세 조선은 빛날 것이다. 일본경찰은 이 글을 쓴 자를 잡기위해 백여 명의 인원과 경비정을 8척이나 투입했고, 잡기 위해 마을에 불을 지른다고 주민들을 협박했다. 그 때 순사대장에게 자신이 썼다고 나선이가 주재년 열사였고 4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고, 1944년 순천지청에서 조선 임시 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4년을 선고받는다. 판결이 있는 다음날 석방이 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한 달 만에 사망한다. 옷을 반듯이 입혀주고 나 죽은 뒤에 좋은 세상이 온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들의 시신을 밤에 집근처에 매장을 하였고 해방이 될 무렵 주재년 열사의 아버지도 자식의 죽음에 화병으로 고생하다 사망한다. 주재년 열사의 장조카인 주충배 님은 관련기관을 찾았고 2006년 재판판결문을 국가 기록원에서 찾게 되면서 그해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아 기념사업을 펼쳐 2012년 5월 7일 기념관을 열게 되었다.
어린나이에도 민족의식이 확고했던 주재년 열사의 기념관 건립을 통해 그 정신을 기리게 하고 있다. 일본 경제보복에 대한 반일감정과 함께 일본제품을 불매하자는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주재년 열사가 외친 ‘조선만세! 조선은 빛날 것이다.’에 대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주재년 열사를 배출한 돌산향교를 둘러본다. 돌산에도 문화재가 많은 곳임을 본다. 돌산을 다녀가시는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다. 돌산 섬마을에 조선시대 광무원년 1897년에 이른바 공립학교역할을 하던 돌산향교라는 곳이다.
내 고장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명소를 돌아보고 체험해 보는 일도 소중한 일이 되고 남을 것이다. 잠시 복잡한 일상을 탈출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줄 수 있는 힐링 드라이브 코스로 조용한 분위기에 매력적인 곳으로 과거 선조들이 공부하던 세월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특별한 곳이다.
건물 곳곳에서 옛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돌산향교는 시내에서 40여분 걸리는 곳으로 돌산 항에서 가까운 곳으로 주변에 돌산읍제일교회(박성문 목사)와 읍사무소, 파출소, 농협 등 관공서와 성심병원, 돌산초등학교가 있고 앞에는 돌산중학교와 여수해양과학고등학교도 그 중에 한 곳이다.
여수은천수양관을 오고갈 때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돌산향교다. 금오도 비렁길이나 선상낚시 체험을 하러 오는 분들은 꼭 한번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1196-3(돌산읍 군내리 304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돌산향교는 1984년 2월 2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을 받은 귀중한 문화재다.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재이다. 홍살문 너머로 대성전, 명륜당, 풍화루, 서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돌산향교의 서재에는 1933년부터 1938년까지 6년 동안에 걸쳐 돌산향교와 각 관서, 군·면간에 오고간 문서가 소장되어 있어 향교 기능과 옛 시대 유림의 역할 등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30년대부터 건물을 여러 차례 손보았고, 최근에는 1986년에 명륜당을 고쳐지었다.
향교는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지은 국립교육기관으로 지금의 국공립 중등학교라 생각하면 된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서 서당, 향교, 서원, 성균관으로 체계화 되었다. 향교와 서원을 차이점은 국가에서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조선의 사림이 건립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중고등학교와 사립중고등학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향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 양반뿐만 아니라 양민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시와 문장을 짓는 사장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사장학은 문을 중요시 여기는 조선사회에서 중요했다. 또한 향교에서는 유교에 대한 역사와 유교의 도리를 담고 있는 경전을 공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경학이라고 한다.
돌산향교는 근대의 돌산지역민들의 사장학과 경학 교육의 장으로써 오랫동안 지역인재 배출의 요람으로 역할을 다 해왔다. 1915년에 돌산군이 없어지자, 돌산향교도 없어질 위기를 맞았으나 지방 유림들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돌산향교(突山鄕校)는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향교이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사진①은 주재년 열사기념관 사진②는 돌산향교 모습이다.
/여수=정우평 목사, 010-2279-8728【교계소식】문서선교후원계좌 우체국 500314-02-264196 정우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