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애
개봉 9월9일
상영관 서울 - 시네코아, 명보, 중앙, 메가박스, MMC, CGV강변11
출연 이정재, 전지현
1998년 1월, ‘일 마레’라는 새 집으로 이사온 한성현(이
정재)은 미지의 여인 김은주(전지현)로부터 이상한 편지를
한통 받는다. 2000년이라고 연도표시된 이 편지엔 이렇게
씌어 있다. “1월엔 눈이 많이 와서 감기가 유행이었어요.
조심하세요.” 그날, 거짓말 같이 함박눈이 내린다. 편지
의 모든 예언은 실현된다. 여인도 기적처럼 자신의 편지가
과거로 갔음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기 시
작한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남자와 애인으로부터 버림
받은 여인은 서로의 상처를 달래주며 친근감을 느낀다. 남
자가 먼저 여인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과거의 연인에
대한 기억에 빠져 있던 여인은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
혹한 시련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득한 수평선과 드넓은 개펄과 그림 같은 집, 그리고 기
적같은 사랑 이야기. <시월애>는, 이를테면 순진한 소녀의
환상 같은 영화다. 이 환상에는 몇 가지 요건이 있다. 첫
번째는 시간을 뛰어넘을 것. 현실 속에선 불가능한 이 마술
의 주인공은 우편함이다. 이곳에 편지와 선물을 넣어두면
거짓말처럼 2년의 세월을 뛰어넘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지는 중요하지 않다. 1998년의 남자와 2000년의 여자는 스
스로도 믿지 못하다가 우편함의 마술을 신뢰하는 순간부터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時越愛)’을 시작한다. 환상의 두
번째 요건은 주인공이 절대 선하고 희생적일 것. 보통사람
과 다르게 <시월애>의 남녀 주인공들에겐 악의 흔적조차 없
다. 특히 남자는, 먼 발치의 응시와 편지만으로 사랑에 빠
졌지만, 다른 남자를 향한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둘의 맺
어짐을 위해 헌신한다.
환상의 세 번째 요건은, 이게 가장 중요한데, 그림이 아름
다울 것. <시월애>는 액자에 담아서 걸어두고 싶을만큼 예
쁜 그림들로 가득하다. <그대안의 블루>로 데뷔했고, <네
온 속으로 노을지다>를 거치며 뛰어난 영상감각을 인정받
은 이현승 감독은 홍경표 촬영감독과 호흡을 맞춘 <시월애>
에서도 세련된 비주얼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렇게 근사한
집을 굳이 개펄 위에 지어놓고 주인공 남녀의 등장을 교차
편집하는 초반부터 이 영화의 영상미 우선주의는 분명하
다. 제작진은 원래의 색에 흑백을 입히는 두 번의 프린트
작업과 합성이라는 전례없는 작업을 시도하며 아름다운 영
상 만들기에 지극한 공을 들였다. 영상미의 힘은 만만한게
아니다. 태양이 떨어지는 각도까지 계산해 지었다는 ‘일
마레’는 보는 순간 탄성을 감출 수 없을 만큼 고즈넉하고
예쁜 집이다. 없던 사랑도 이런 데 오면 생길 것 같다. 두
남녀가 정한 만남의 장소도 마침 제주도다. <시월애>는, 아
름다운 곳이 아니라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는 사
람들이 만든 영화 같다.
그러나 <시월애>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위해 많은 걸 버렸
다. <시월애>의 카메라는 풍경을 찍듯 미끈한 남녀 주인공
의 모습을 예쁘게 비출뿐 그들의 마음에 이르진 못한다. 외
모 훌륭하고 마음씨 착한 주인공들의 얼굴엔 자주 그늘이
지는데도 그들의 우울한 심정은 잘 전해지지 않는다. 남자
와 여자 모두 마음의 병을 안고 살지만, 각각 아버지와 전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병명이 너무 뻔한 데다, 상처
와 고통의 결이 느껴질 만한 디테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미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
들은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지속되기 때문
에 아파합니다” 같은 감상적 내레이션이나 김현철의 달콤
하고 애잔한 음악이 이를 상쇄하기엔 역부족이다. 발음이
선명하지 않은 여주인공의 직업이 성우라는 점도 의아스럽
다.
이야기도 매력이 없다. ‘빨라야 산다’는 디지털시대의 계
율을 거스르는 일은 존중받을 시도지만, 다음 장면이 궁금
해질 만한 이야기의 굴곡이 너무 적다. 시작한 지 20분쯤
지나면 편지함의 마술을 주인공과 관객이 함께 알아차리게
되지만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두 남녀에게 일어나는 일
들은 너무 범상하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헌신하다 시련을
겪는 과정도 너무 작위적이다. 제3자가 돼버린 남자가 위기
의 연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잘 이해되지 않
을 뿐더러, 교통사고라는 설정은 너무 뜬금없고 안일해 보
인다. 이현승 감독은 ‘영화를 처음 좋아했을 때의 순수한
감정으로 만든 첫사랑 같은 영화’라고 연출의 변에서 밝혔
다. <시월애>는 순수하고 착하지만, 예쁜 조화처럼 생기가
없다. 인물의 디테일과 이야기의 개연성을 모두 취할 필요
는 없다해도 둘다 없으면 허전해진다. <시월애>는 보기드
문 영상미를 이뤘지만, 둘다 없어 허전해졌다.
허문영 기자
미지의 편지, 그리고 사랑 이야기
그대, 사랑이 도착했네요
사춘기의 몸이 그렇듯, 말도 종종 마음을 배반한다. 마음
을 온전히 드러내기엔 말은 턱없이 모자라, 늘 너무 성기거
나 치우친다. 편지는 보내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게 들짐
승 같은 말을 다듬고 길들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부
담스런 육신이 부대끼는 현대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 모르
는 이성이 보낸 편지는, 그래서 포근한 휴식이 되고, 말로
다하지 못했던 고백이 되고, 그래서 <시월애>에서처럼 사랑
의 시작이 된다.
이 모티브를 끌어들인 영화 가운데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1948)는 첫손에 꼽을 만하다. 결투
를 피해 새벽에 떠나려던 피아니스트 슈테판 브랜드는 하인
으로부터 모르는 여인의 편지를 받는다. “당신이 이 편지
를 읽을 때면 난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군요”로 시
작하는 이 편지는 14살 소녀 때부터 이웃이던 그를 사랑했
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남자의 곁에 있고 싶어했던 여
인이 쓴 것이다. 브랜드는 자유분방하고 여유롭게 살았고,
평생 그의 주변을 맴돌던 그녀는 우연히 그와 사랑을 나눈
뒤 그의 아이를 낳았고, 홀로 키웠다. 브랜드는 그녀의 이
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사고로 아이를 잃고 병
상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브랜드의 것이고 싶어했
다. 그녀의 이름은 리사였다. 눈물을 흘리며 편지의 마지
막 페이지까지 읽은 브랜드는 리사의 남편이 기다리고 있
는 결투장으로 간다.
독일에서 추방당해 할리우드로 온 고전기 거장 오퓔스의 대
표작인 이 영화는 억압적인 사회에서 물질적 함정에 침몰당
하는 사랑을 서정적으로 그린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 비디오로 출시되진 않았다. 출시된 영화 중에는 <
러브 레터>라는 제목의 영화 세편이 눈에 띈다. 각각 에이
미 존스, 진가신, 이와이 순지가 감독한 이 영화들의 공통
점은 모두 잘못 전해진 편지로 인해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 에이미 존스의 <러브 레터>(1983)는 딸이 엄마의 유품
을 정리하다 엄마를 사랑한 유부남의 연애편지를 읽고 그에
게 빠져든다는 이야기.
진가신의 <러브 레터>(1999)에선 송신자 이름이 없는 연애
편지 때문에 고민하던 중년의 여주인공이 한 청년을 송신자
로 오해하며 그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와이 순지의 <러
브 레터>(1996)는 편지의 이미지를 영혼의 경지로 격상시
킨 영화. 잘못 전달된 편지를 계기로 한 여인이 묵은 기억
저편에서, 그를 사랑했으나 이젠 세상을 떠난 고동학교 동
창의 눈꽃같은 마음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 편지의 양식도 변하는 법.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기수 노라 에프런의 <유브 갓 메일>(1998)과 장윤
현 감독의 데뷔작 <접속>(1997)에 이르면 컴퓨터 모니터가
글씨 빼곡한 편지지를 대신한다. 전통적 편지가 재등장하
고 자연의 풍광이 전경화한 <시월애>는 그런 면에서 복고
적 편지영화라 할 만하다.
카페 게시글
♡‥‥소근소근
씨네 21 시월애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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