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
박인환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最後)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驛前)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合唱)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者)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欲)처럼 피폐(疲弊)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爆音)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生)과 사(死)의 경지로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최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시집 『박인환시선집』, 1955)
[어휘풀이]
-초연 : 화약의 연기
-정막 : 寂寞(적막)
-성채 : 성과 요새(要塞)
[작품해설]
이 시는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전쟁의 비극을 극명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야간열차를 타고 피난길에 오른 ‘우리’라는 시적 화자와 전선(戰線)으로 ‘죽으러 가는’ 일련의 군인들을 대조시키는 방법을 통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1연에서 시적 화자는 ‘신’께 모든 운명을 맡기고 ‘최후의 노정’일 수 있는 삶을 찾아 피난 열차에 오른다. ‘어느 날 역전에서’ 군가(軍歌) 소리와 함께 만난 군인들은 ‘죽으러 가’는데, 그들과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은 우리들은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기’는 여유를 보인다. 그러나 그 여유로움 뒤에는 ‘정욕’, ‘피폐’, ‘흘기다’ 등에서 나타나는 화자의 문학에 대한 자조적 태도가 감추어져 있다. 시인은 『박인환시선집』 후기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표현은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함은 물론, 전쟁에서는 소설로 대표되는 모든 예술 행위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2연에서는 전선으로 떠나는 병사들의 모습을 제시한다. ‘표정도 없이 / 폭음과 초연이 가득찬 / 생과 사의 경지로 떠나’는 그들은 화자와 같은 지식인 계층이 아닌 ‘농부의 아들’들로 민중을 대변한다. 여기에서 시인이 지식인들에게 갖는 비판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피침(被侵)의 고단한 역사 속에서도 지금까지 이 민족을 지켜 준 계층은 바로 이름 없는 민중들이었음을 은연중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1연에서 화자가 보여 준 문학에 대한 자조적 태도도 ‘농부의 아들’로 대표된 병사들의 애국 애족의 마음을 응시함으로써 비롯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는 피난민들과 병사들이 서로 방향을 바꿔 달려 지나가는 것을 촉각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3연에서 화자는 어둠을 뚫고 달리는 피난 열차에 ‘정적보다도 더욱 처량한’ 달을 바라보다가 ‘인간의 피로 이룬 / 자유의 성채’는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자유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그러나 마지막 4연에서 화자는 ’저 달 속에 /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검은 강‘이란 ’신이란 이름으러서‘ 삶을 찾아가는 피난민들과 전선으로 ’죽으러 가는‘ 병사들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거리감을 뜻한다. 화자는 병사들과 일체화되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방관적 자세를 보일 뿐이다.
[작가소개]
박인환(朴寅煥)
1926년 강원도 인제 출생
평양의학전문학교 입학. 해방을 맞으면서 학업 중단
1946년 『국제신문』에 시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
1949년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임호권과 함께 공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1955년 시집 『박인환시선집』 발간
1956년 사망
시집 : 『박인환시선집』(1955) 『목마와 숙녀』(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