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26-30b 빌립은 주의 사자의 지시에 따라 한 낮에 사막으로 갔고 거기서 이디오피아 여왕의 재정을 담당한 고위 관료를 만났다. 성령께서 가까이 다가가라고 하시자 빌립은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서 이사야를 읽는 것을 들었다.
이전 말씀에서 베드로는 시몬에게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지도 모른다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숭배의 쓴 뿌리가 가득하고 사람들을 향한 불의에 얽매여 있다고 하자 시몬은 이런 일이 자신에게 미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과 영적으로 한 가족이라는 증언을 마친 뒤 사마리아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이어지는 말씀은 빌립이 성령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한 낮에 사막으로 가서 이디오피아 여왕의 재정을 담당한 고위관료에게 다가갔다.
이 부분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철저히 성령께서 주도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주의 천사는 날개 달린 천사라는 뜻이 아니고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란 뜻이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전했을 수도 있고 빌립에게 직접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는 주의 천사와 성령이 함께 쓰이며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뒤에는 성령께서 말씀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전했느냐가 아니라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전도하는 계획은 빌립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그 명령은 먼저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남쪽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낮의 중간" 이라는 뜻이다. 대부분 성경 해석자들은 이 말이 남쪽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성경 해석자들은 이 말의 문자적인 뜻대로 "정오" 라는 시간을 나타낸다고 한다(Marshall, 171; Willimon, 117). 본인이 신구약성경 전체에서 28개를 찾았는데 그 중 26개는 "한 낮" 또는 "정오" 라는 뜻으로 쓰였고 오직 다니엘에 나오는 2번만 남쪽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한 낮에 해가 떠 있는 방향을 가리킬 때도 이 말을 쓴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에서 남쪽을 가리킬 때는 두 번 다 다른 방향들과 함께 쓰였다. 여기서는 한 낮이라는 말이 홀로 쓰였기에 시간을 나타내는 말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만약 시간을 나타낸다면 뜨거운 한 낮의 시간에 일어나서 가라는 뜻이다. 바로 이어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라고 분명히 가야할 길의 방향을 말했기 때문에 "한 낮" 이라는 말은 시간을 나타낸 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방향을 두 번 말한 것이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은 똑바로 남쪽도 아니다. 동쪽으로 가다가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이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엉뚱한 명령이다. 당시 사람들은 뜨거운 한 낮에 사막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셨기에 빌립은 사마리아로 갔을 것이다. 이 명령은 유대인이었던 빌립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런데도 빌립은 성령님의 명령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뜨거운 한 낮의 시간에 사막길인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더구나 사마리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대단한 성공을 거둔 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이 다니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사막지역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빌립은 이번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에 그대로 순종한 것이다. 만약 남쪽이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경우처럼 한낮으로 쓰였다면 빌립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명령이지만 성령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한 것이다.
"그 길은 광야 길이다" 라는 말은 원어에서 “그곳은 광야다” 라는 뜻이다. 이는 가사가 광야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기원전 96년 마카비 왕조의 Alexander Janeus가 완전히 파괴한 옛 가사일 것이다(Gloag, 301). 또 이 말은 그 길이 광야라는 뜻일 수도 있다(Bock, 341; Willimon, 117). 가사가 광야라 해도 이상한 명령이다. 한 낮에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된 사막으로 내려가라 했기 때문이다. 길이 광야라 해도 이상한 명령이다. 정오에 뜨거운 사막길로 내려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명령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27절에서 "빌립은 일어나서 가다가" 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도 순종하여 그 길로 갔다는 것이다. "마침" 이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그런데, 보라!" 라는 뜻이다. 이는 그렇게 순종했더니 정말 깜짝 놀랄만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한 낮에 아무도 가지 않는 사막 길로 가는 중에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고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난 것이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관리하는 통치자라고 했다. 간다게란 여왕의 이름이 아니다. 이집트의 왕을 파라오 라고 부르는 것처럼 에디오피아 왕을 부르는 이름이다.
에디오피아는 오늘날 에디오피아가 아니고 오늘날 남 이집트와 수단에 걸쳐 있던 왕국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에디오피아를 땅 끝이라고 불렀다. 성령께서는 먼저 거리는 가깝지만 마음으로는 가장 먼 원수인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이번에는 실제로 가장 먼 남쪽 땅 끝에서 온 사람을 만나게 한 것이다. 그것도 에디오피아에서 재정을 관리하는 통치자이기에 최고의 실세인 고관이다. 그 사람을 통해 남쪽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실 계획인 것이다.
이 사람은 내시라고 했는데 실제 거세를 당한 사람인지 아니면 고위관료라는 뜻인지 알 수 없다. 다수는 환관이라는 말이 실제 거세를 당한 사람일 수도 있고 통치자에게 특별히 신뢰를 받는 고위관료라는 의미로도 쓰였다고 말한다. 만약 이 사람이 실제로 거세를 당한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의 회중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신명기 23:1절에서 분명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경우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라는 말과 연결이 안된다.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는 말은 예배를 위한 긴 여행을 완전히 마쳤다는 뜻이다. 여행을 마쳤다는 말은 여행의 목적인 예배까지 마쳤다는 뜻이다. 그런데 거세를 당한 사람은 여호와의 회중에 포함되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이방인의 뜰에만 들어갔거나 아니면 자유민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을 뿐일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성전이 바깥마당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그 먼 거리를 예배하러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람이 환관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누가는 이 사람은 세상에서는 제일 높은 존귀한 사람이지만 유대교에서는 변두리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무시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먼거리를 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겸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사야 56:4-5절에는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라고 했다.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는 신명기의 금지 명령이 이 구절에 따라 완화되었을 수도 있다. 존귀한 사람이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고 재정적으로 큰 기여를 한 사람이기에 이사야의 말씀을 따라 예외로 인정해 주었을 수도 있다.
일부 성경 해석자들은 이 사람이 유대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은 혈통으로서가 아니라 언약을 굳게 붙잡은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는 증인도 세우지 않았고 아무런 문제를 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령 받게 한 것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는 큰 문제를 삼았다. 그러나 빌립이 이방인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아무 문제도 삼지 않았다. 이 사람은 혈통상의 유대인은 아니더라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해 오래 전부터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사람은 또한 예루살렘에 와서 재정적으로 대단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명기에서 금지된 사람에게 성경 사본을 팔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고대의 성결 필사본 두루마리는 엄청난 가격이 나가는 것이었고 개인이 가질 수 없던 것이다.
이 사람의 헌신은 재정적인 것만이 아니다. 당시 에디오피아는 Nubia 왕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누비아 왕국은 오늘날 이집트 남쪽에서 수단에 해당되는 지역에 있었다. 그 수도는 Meroe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여행한 거리는 오늘날 지도상으로 대충 측정해 보아도 2800km 이상이다.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 해도 4개월은 족히 걸릴 것이다. 어떤 이는 6개월 걸렸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먼 거리에서 마차를 타고 계속 왔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이 사람은 배에 마차를 싣고 나일강을 따라 내려왔을 것이다. 이집트의 끝부분에 와서 로마 사람들이 만든 고속도로를 따라 마차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돌아갈 때도 역시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나일강은 주로 북풍이 불기에 돛을 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500 ton이 되는 바위도 배로 운반할 만큼 큰 배도 운행했다고 한다.
이제 이 사람은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28절에 보면 그는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당시 글을 읽는 사람도 매우 드물었지만 오늘날처럼 성경을 갖고 있지도 않을 때였다. 이 사람은 대단한 지식인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고 유대교의 언약을 굳게 잡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29절은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앞에서 명령한 이는 주의 사자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성령으로 바뀐 것이다. 명령은 "나아가라 그리고 마차로 바짝 다가서라" 라는 것이다. 낮 모르는 외국인 고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역시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다. 피부색도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고 옷차림이나 마차를 탄 모습등을 미루어 볼 때 유대인들은 절대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가까이 가는 법이 아니다.
30절은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빌립은 "달려가서 들었다" 는 것이다. 그렇게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다가갔다는 뜻이다. 마차는 소가 끌던 마차였을 것이고 걷는 속도보다 조금 빨랐을 것이다. 성령의 명령을 듣자 빌립은 주저함없이 달려가서 바싹 다가섰기에 그 사람이 이사야를 읽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빌립은 또 한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돋보이는 것은 빌립의 순종이다. 한 낮 가장 뜨거운 시간에 사람이 없는 사막으로 가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명령인데도 순종했기 때문이다. 낯선 외국인에게 다가가라고 했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다가갔기 때문이다. 빌립은 당시 사람들의 기본 상식도 깨고 유대인들이 가까이 가지 않던 외국인에게도 다가간 것이다. 빌립은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고 성령님께 순종한 사람이기에 앞에서도 절대로 가서는 안되는 곳이고 마음으로 유대인들에게 가장 먼 사마리아에도 갔던 사람이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믿는 자의 올바른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