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촉석루(矗石樓)**는 단순히 오래된 누각 하나가 아니라, 진주성·남강·임진왜란·논개·진주 사람들의 충절이 모두 어우러져 있는 진주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입니다. 특히 촉석루는 우리나라 누각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건축물입니다.
1. 촉석루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
**촉석루(矗石樓)**의 ‘촉(矗)’은 **‘곧게 높이 솟다’**라는 뜻입니다.
촉석루가 남강의 바위 벼랑 위에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 **하륜(河崙)**이 지은 「촉석루기」에서도 이러한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
연합뉴스 +1
즉 쉽게 말하면,
“남강의 바위 위에 우뚝 솟은 누각”
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2. 언제 처음 만들어졌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집니다.
현재 국가유산 자료와 진주시 자료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려 고종 28년(1241년)**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일부 기록에는 **1365년(공민왕 14년)**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진주시에서는 1241년 당시 진주목사 김지대가 창건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진주 시민 포털
따라서 촉석루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1241년에 처음 세워졌다는 것이 현재의 대표적인 설명”**이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3. 처음부터 지금 같은 모습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촉석루는 약 800년의 역사 동안 전쟁과 화재, 세월의 풍화 때문에 여러 차례 불타고 다시 지어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여러 차례 중건·보수를 거쳤으며, 국가유산 자료에서는 7차례의 중건과 보수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진주성의 군사적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4. 촉석루는 옛날에 무엇을 하던 곳이었습니까?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촉석루는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는 정자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군사 지휘본부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촉석루를 **‘남장대(南將臺)’**라고도 불렀습니다.
‘장대’란 장수가 올라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촉석루가 진주성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장대라고 한 것입니다. �
연합뉴스 +1
평화로운 시대에는
선비들이 모이고 시를 짓고 경치를 감상하는 장소였으며, 향시(鄕試), 즉 지방에서 실시하던 과거시험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원루(壯元樓)’**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장원은 과거시험에서 첫 번째로 합격한 사람을 말합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즉 촉석루에는
군사 지휘소 + 과거시험장 + 풍류 공간
이라는 세 가지 성격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5. 임진왜란 때 촉석루는 왜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진주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경상도 지역을 장악하려 하자 진주성이 중요한 방어 거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1592년의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켰습니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진주성의 백성들이 힘을 합쳐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승리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중요한 승전지였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촉석루는 바로 그 진주성 안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군사 지휘와 방어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6. 그리고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촉석루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유명한 부분입니다.
1593년, 일본군은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는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결국 진주성이 함락됩니다.
당시 진주성 안의 군인과 백성들이 크게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진주를 대표하는 인물인 **논개(論介)**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7. 논개와 촉석루, 그리고 의암
촉석루 아래 남강에는 지금도 **의암(義巖)**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진주성이 함락된 뒤 논개가 촉석루 주변에서 왜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남강으로 함께 뛰어들어 순국했다고 합니다.
그때 논개가 몸을 던진 바위를 후대에 의암, 즉 **‘의로운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
연합뉴스 +1
그래서 촉석루를 바라보면 단순히 아름다운 누각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촉석루 → 의암 → 논개 → 진주성 전투
이렇게 하나의 역사적 공간으로 연결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촉석루 바로 옆에는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도 있습니다. �
연합뉴스
8. 촉석루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촉석루는 진주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남았습니다.
선비들이 남강의 경치를 바라보며 시를 짓고 서로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고, 과거시험과 각종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촉석루는 단순한 군사시설에서 벗어나
진주의 문화와 교육, 풍류를 상징하는 장소
가 되었습니다.
9. 1725년에 크게 중수되었습니다
조선 영조 때인 **1725년(영조 1년)**에는 진주목사 안극효가 촉석루를 크게 중수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후에도 촉석루는 여러 차례 보수되었습니다.
10. 그런데 6·25전쟁 때 큰 비극을 맞습니다
촉석루의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1950년 6·25전쟁 때 촉석루가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때까지의 촉석루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귀중한 건축물이었기 때문에 그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촉석루가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건물이 소실되면서 국보 지정에서도 해제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
진주인터넷뉴스 JINJU NEWS +1
11. 진주 사람들이 다시 촉석루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진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촉석루를 다시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진주고적보존회 등을 중심으로 복원이 추진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인 관심과 지원 속에서 1960년에 현재의 촉석루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
진주인터넷뉴스 JINJU NEWS +1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진주성에서 보는 촉석루는 고려·조선시대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며, 옛 촉석루의 형태와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아 1960년에 재건한 건물입니다.
12. 문화유산 지정도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현재 촉석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83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2020년 6월 1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
소재지: 진주시 남강로 626, 진주성
규모: 정면 5칸, 측면 4칸
건물 면적: 약 508.6㎡ �
문화유산청 +1
현재 소유자는 국가유산청, 관리자는 진주시로 되어 있습니다. �
문화유산청
13. 현재도 국가지정문화유산 승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촉석루는 과거 국보로 지정되었던 건물인데, 지금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입니다.
그래서 진주에서는 촉석루의 역사적 가치에 비해 현재의 지정 등급이 낮다고 보고 국가지정문화유산으로 승격시키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2025년에는 진주문화원이 국가지정문화유산 승격을 위한 시민 서명운동도 시작했습니다. �
연합뉴스
14. 촉석루가 특별한 이유
제가 보기에는 촉석루의 가장 큰 가치는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만이 아닙니다.
촉석루 하나에 우리나라의 여러 역사적 모습이 겹쳐 있습니다.
① 고려시대의 건축 역사
↓
② 조선시대 진주성의 군사적 역할
↓
③ 임진왜란과 진주대첩
↓
④ 김시민 장군의 항전
↓
⑤ 제2차 진주성 전투와 수많은 희생
↓
⑥ 논개의 순국과 의암
↓
⑦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와 과거시험
↓
⑧ 6·25전쟁으로 소실
↓
⑨ 1960년 진주 사람들의 힘으로 재건
↓
⑩ 오늘날 진주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산
이렇게 800년 가까운 진주의 역사가 한 장소에 겹쳐 있는 것입니다.
15. 지금 촉석루에 가시면 이렇게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촉석루에 가시면 그냥 누각만 보고 나오시기보다는,
촉석루 → 남강 → 의암 → 의기사 → 진주성 → 김시민 장군 관련 유적
순서로 둘러보시면 좋습니다.
특히 촉석루에서 아래 남강의 의암을 내려다보면, 왜 이곳이 진주의 상징이 되었는지 훨씬 실감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촉석루는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