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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의 마지막 글씨 봉은사 대장경 '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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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속에서 더 푸른 소나무 "세한도"를 보는 듯하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눈쌓인 추사 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을 다녀 왔다.
어언 추사 선생이 가신지 올해로 158년째다.
하지만 충남 예산에 있는 그의 고택에 들어서면 언제나 선생의 인품을 느끼게 된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은
조선 후기에 독특한 글자체를 남겼을뿐 아니라
사실에 근거를 두고 학문을 하는 실사구시학을 바탕으로
조선은 물론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명성을 두루 날렸던 학자다.
당시 학자들은 학문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연구하기 보다는
스승에게 물려받은 이론만을 금과 옥조로 여기는 풍토가 컸고
스승의 가르침과 다르면 거부하는 학통이 만연했다.
하지만 추사는 24세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북경에 다녀온 뒤
당대 최고 학자인 옹방강과 완완을 만나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자신은 사실을 바탕으로 학문을 할 것이라 다짐하고
그 때부터 사실을 기록한 옛 비석을 찾아나서
북한산 비봉의 꼭대기에서 진흥왕의 순수비를 발견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추사는 순조 19년(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38세에 규장각의 대교가 되었으며
예조참의를 거쳐 45세에는 동부승지가 되는 등 지위가 올라갔다.
51세 성균관 대사성 54세 형조참판 55세에 동지부사가 되었으나,
이때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윤상도는 당시 탐관오리였던 몇몇 관료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상소문의 초안을 추사가 써 주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윤상도에게서 탄핵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모함하고 임금과 신하를 이간시킨
윤상도와 그 상소문을 써주었던 추사를 거꾸로 벌을 내리게 한 것이다.
추사는 제주에 유배 중에 많은 이들과 서신으로 교류하면서
59세에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추사의 유명한 세한도는 제주 유배시절에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추사는 64세에 9년 간의 유배생활에서 벗어나 잠시 서울생활을 하였으나,
66세에 진종 조례론의 배후발설자로 함경도 북청으로 또다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고초를 겪은 추사는 이듬해 유배가 풀렸으며
71세 봉은사 '판전' 현판을 쓰고 며칠 뒤 타계하였다.
이때는 철종 7년(1856년)이다.
추사는 이듬해 1858년 모든 죄에서 사면복권되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는 안동김씨, 풍양조씨의 세도정치가 판을 치던 시기라
김씨나 조씨가 아니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감히 뜻을 펼 수가 없었다.
그런 세월을 살면서 선비로서 제대로 된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상상이 어렵지 않다.
선생은 갔지만 이제 후학들은 그의 학문을 흠모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 시대에 아부하지 않고
올곧은 학문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실사구시 금석학에 매진했던
추사선생의 바른 학문정신이 시대를 뛰어넘어
이 시대에도 올바른 학자들의 표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연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