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가 겁없이 .. 삼위일체 사상의 삼위의 하나님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굳게 믿는 갑옷으로 무장한 장군들의 칼자루를 건드렸나요?
어린아이에게는 싸워 지켜야 할 교리가 없고 단지 진리로의 접근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님들의 준비된 칼은 빼지 마시고.. 어린아이가 사심없는 마음으로 적은 가사로 노래할 때에 편안한 마음으로 저의 노래를 들어 보셔요.
삼위일체 사상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그 시각은 이방인들의 시각으로 땅에서 하늘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하늘에서 땅을 내려보면 높은 건물과 낮은 건물의 높이 차이가 없듯이 땅에서 하늘을 올려 볼 때도 똑같은 현상으로 보일 뿐입니다.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들어갈 수도 있고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요.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하나되어 큰 원 하나만 보인다고 큰원과 작은 원이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과 사랑과 목적에서는 아버지의 그 큰 원 안에서 하나가 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에 있어서는 .. 절대 동격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가족관계 안에 들어간 자녀된 자들의 하늘에서의 눈을 통해서 보면, 땅에서 하늘을 보던 차원의 수준이 아니라 좀 더 높은 차원에서의 시각으로 볼 수 있기에 아버지의 자리와 당신의 아들이신 자리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은 여러 곳에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성구 대조는 서로 공방의 여지만 남길 뿐이어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부분은 용어의 혼란입니다. 언어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주이시며 대속주이십니다.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아버지 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같은 왕, 아버지, 하나님..등 같은 이름으로도 이전부터 더 많이 불리어져 왔던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과 동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의 세계에는 물질 세계와는 참으로 달라서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각기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의 관계인식만 바로 되어 있으면 그 호칭은 어떻게 사용하든 언어의 제 기능을 하면서도 언어의 혼란으로 문제를 남기지 않는 것은 언어 자체보다 사용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언어는 그냥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도구에 불과한 문자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보다 성숙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번역본이기에 영문 성경에 대문자와 소문자로 구분된 하나님과 예수님의 표기가 번역본인 성경에는 동일하게 하나님으로 표기되고 있지만 그 동일한 하나님으로 표기된 문자를 보면서도 우리는 큰 무리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께서 제게 답변을 요구하신 삼위일체 사상에 가려지는 진리의 빛들에 대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제의 핵심인 삼위일체의 정의 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제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먼저 더듬어 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는 .. "하나님은 삼 위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며 각기 영원하시며. 각기 전능하시고는 아무도 다른자보다 크거나 작지 않으시며, 각기 하나님이시지만 모두가 한 하나님을 이룰 뿐이시다. 한 분이시나 하시는 일에서는 각기 다르시며 그 뜻은 하나로 움직이신다." 입니다.
제가 삼위일체 사상에 반기를 드는 모습에 .. 저를 빛에서 멀어진 영적 상태에 머무는 영혼으로 오해하시는 것같고 저에 대한 탐색전이 양상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잠깐 저의 믿음의 노정에 있어서의 작은 획이 그러졌던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저는..거의 이십 년 정도.. 개신교에 속하여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계기로 어떤 만남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심한 논쟁이 시작되었지요.
삼위일체 사상은 4세기 말경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것으로써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삼위일체 사상과 합리주의 철학의 삼위일체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기타 등등.. 단순히 번역본 성경으로 삼위일체로 보여지는 성구들과 삼위일체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성구들의 대조..등등.. 그런 것은 사실 그 당시 제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삼위일체 사상을 부정하는 자들의 나름 근거를 들먹인 추리들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한 성구가 눈에 들어왔고.. 제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 저는 두 손을 들었습니다. 깨끗한 제 양심의 승복이었습니다. 그 성구란.. 바로 잠언 8장 22절 ~ 36절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30절 말씀이 내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되었습니다.
[NLT]잠 8:30 [개역]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나는 붙어 다니며 조수 노릇을 했다. 언제나 그의 앞에서 뛰놀며 날마다 그를 기쁘시게 해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창조주이셨습니다. 기존으로 알고 있는 사상에서 우리의 하나님인 예수님을 한 단계 낮추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자리로 올려지는 입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성서에 기록된 어떤 성구와도 상충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는 털끝만큼의 오차도 상충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사상이 깨어져야 하는 이유는 .. 가장 먼저 그 사상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 이해에 구원론, 신론등 인간 노력의 부산물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론 ..신론.. 교리.. 내세론.. 그런 것이 없어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믿음을 두고 .. 그분을 자신들의 대속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에 관련한 부분이 삼위일체 사상이라는 인위적인 옷에 가두어져 모호해져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사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가리는 커튼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가치와 구원의 형태와 구원의 길을 모호하게 가려버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내용을 삼위일체 사상을 가지고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만일 이해가 된다고 하면 모순의 그림자를 억지로 외면하고 있는 상태의 것일 겁니다.
난해 성구의 존재는 세분화된 신학 연구에 의하여 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기존으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의 교리나 사상이 진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가려졌던 예언들과 성구들이 드러나기 전 단계는 바로 진리가 아닌 인간 사상들로 인해 복음의 알곡들보다 더 무성하게 자라버린 가라지 덤불이 제거 되는 것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 가라지 덤불은.. 다름 아닌 순수 복음에 덧뿌려져 함께 자라난.. 처음엔 복음의 알곡과 함께 섞여 자라난 .. 인간 사상과 철학과 인간적 시각으로 풀이된 신학을 기초로 하여 자라난 .. 종교조직과 그 조직을 이루고 있는 조직 교리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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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 주님 계신 곳을 향하여 가는 길에 .. 원문보기 글쓴이: 언제나그자리에
첫댓글 예전에 어떤 개신교 카페에 올려졌던 글이었고 이 카페 글 아래 묻혀있던 글이었으나 요즘 삼위일체에 관한 글들이 올라오기에 제가 가지고 있는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를 한번 올려봅니다..
하나님은 삼위이시고 영원하시며 일에서는다르시지만 그뜻은 하나로움직이신다...그말씀에 동의합니다^^ 좋은글..그리고 많은것을 생각나게하는글 감사합니다
대강 읽으셨군요..^^ 독해를 잘못하신듯 하여 다시 바로잡습니다.. 제 글은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글이 아닙니다..
아이구..어쩌나..잘읽어보시면 되는데....
그렇군요...대강읽은것같습니다.... 읽다가 그부분만 눈에들어왔네요... 제가 이해를잘못했네요..다시읽어봐도 전잘이해가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