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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양심
롬 2:12-16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2-16 /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죄라도 벌하십니다. 이방인들이 죄를 범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글로 쓰여진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옳고 그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위로를 받는 것은 다 그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죄를 범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 일인 줄을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말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16)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비밀스런 생활과 그들의 가장 깊은 생각과 동기를 심판하실 날이 반드시 옵니다. 이것은 내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본 단락은 하나님의 심판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양심과 율법에 근거하여 공정하게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범죄한 자는(12) 범죄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율법 없이 범죄한 자’와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입니다. 율법 없이 범죄하는 자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를 말하고,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을 아는 자를 말합니다(고전 9:21). 보편적으로 율법이 있는 자는 유대인, 율법이 없는 자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 율법이 없는 자도 있고, 이방인 중에서 율법이 있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율법이 있거나 율법이 없거나 관계없이 범죄한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을 모르고 죄를 범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사면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알면서도 죄를 범한 자는 그 심판이 더욱 엄중할 것입니다(눅 12:47).
하나님 앞에서는(13) 하나님은 율법을 듣는 자를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알고 있다고 해서 죄에 대한 심판이 면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게 됩니다. 율법대로 온전히 행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롬 3:10), 율법의 행위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롬 3:20).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은혜를 받는 길 뿐입니다.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14-16) 이방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본성에 의해 행동합니다. 본성에 있는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하지만 그래도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기도 하지만 화인 맞은 양심은 자신을 속여 멸망으로 나아가게 합니다(갈 6:3; 딤전 4:2). 유대인들은 성문화된 율법을 가지고 살았고, 이방인들은 만물의 마땅한 이치라고 여기는 본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율법이 한 사람도 의롭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본성도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죄와 그 죄과를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행 4:12).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은밀한 것까지 심판하십니다.
적용: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며, 그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그러나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도수이 불행부지[道雖邇 不行不至], 사수소 불위불성[事雖小 不爲不成]-노자. ‘가까운 길이라도 가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고,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정체성과 의로움을 드러내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가 보다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 설 교 >
인간의 죄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익살맞고 장난기 있는 아더 코난 도일경이 친구들을 놀려먹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는 사회에서 명성 있는 12명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곧 비행기를 타라"였습니다. 그런데 24시간 안에 명성도 있고 지위가 있는 유명인사 12명 모두가 출국했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의인으로 분류하고 싶어합니다. 헨리 발레이 목사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정직한 사람과 부정직한 사람 사이에, 건전한 사람과 무절제한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혀 비교할 수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평가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판단기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대전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는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 죄가 판명되고 율법이 없는 자는 양심의 법에 의해 죄가 판명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법에 저촉이 안됐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까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 해서 <인간의 죄>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에 의한 죄
죄를 가리키는 가장 명확하고 일반적인 기준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법만 가지고는 죄를 이해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물론 율법의 유익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만 가지고 죄를 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입장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가능성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치 율법이 있으므로 구원받고 율법 없는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 한마디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 율법만 가지고 있으면 다 된 줄로 생각하는 유대인의 생각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으로 죄를 이해하려는 생각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만 지키면 의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여기서의 죄인은 법적으로 결과가 드러나야 죄인이 됩니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인이 아닙니다. 남의 물건을 들고 가기 전에는 도둑이 아닙니다. 또 심지어는 살인했다고 생각이 들어도 증거를 잡지 못하면 무죄가 됩니다.
이처럼 법은 결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드러난 것을 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범죄의 의도가 아무리 있었다 하더라도 행위로 옮기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한 것만 가지고는 어떤 법도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해한 것" 또는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에 빠져 결과주의로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공격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주의로는 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법은 증거주의를 따르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증거를 없애면 죄를 성립시킬 수 없습니다. 완전 범죄란 없다고 하지만 증거를 없애서 죄를 피해보려고 합니다. 사회의 법이 증거에 의해서만 벌을 주기 때문에 증거를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겠습니까? 여기서 법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으나 예수님과 바울의 눈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의 법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양심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심에 의한 죄
율법보다 더 고상한 법은 양심입니다. 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양심의 법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판단합니다. 14-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동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율법도 소중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지만 한계가 있는데 양심이 그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다.
데오도로 파커는 네 살 때 농장에 놀러갔다가 거북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돌멩이를 집어들고 거북이의 껍질을 깨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그러면 안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돌멩이를 던져 버리고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물었습니다.
"엄마! 내가 돌멩이로 거북이의 껍질을 깨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돼'라고 하던데 누가 그렇게 말한 거야?" 참으로 대단한 질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아무튼 네가 그 음성을 들으면 더욱 분명히 들릴 것이고 너를 옳은 길로 인도할 꺼야. 만약 네가 그 음성을 듣지 않으면 그 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결국 너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꺼야. 네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이 양심의 소리를 잘 듣느냐 안 듣느냐에 달려 있다."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옳은 길을 찾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양심은 구속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법에 저촉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양심은 구속력이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 이 양심의 가책이 일종이 벌입니다. 양심을 어기면 심령에 자책이 오므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눈 딱 감으면 그만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므로 혼자 괴로워하다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법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깨끗한 양심, 선한 양심, 착한 양심을 버리고 화인 맞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마비되면 법보다도 효력이 없습니다. 또 양심이 자기 판단의 위력에 굴복하고 맙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은 옳다하고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렸다고 판단합니다. 객관성을 상실하고 자기 주관에 끌려 다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양심을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한 판사 부인이 남편을 공개적으로 고발했습니다. 판사인 남편이 불법으로 운영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불법을 없애기 위하여 벌을 주는 판사가 불법적으로 운영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신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양심의 고백입니다. 법적으로는 묵인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판사가 술을 마셨으니 누가 불법을 따지겠습니까? 법적으로는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남편 판사도 옳다고 수긍하고 사표를 썼고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 마비된 양심으로는 진리를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착한 양심,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크게 들으십시오. 양심이 외칠 때 귀를 막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양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율법과 양심의 한계를 말씀드렸습니다. 율법도 귀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양심도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율법도 양심도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죄는 걸려야 죄가 됩니다. 양심에 의한 죄는 눈감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이 한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도 드러납니다. 율법이 정죄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납니다. 눈감고 넘어갔던 양심의 자책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각까지 헤아리십니다. 하나님은 동기도 보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보다도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해야 합니다. 16절을 참조하십시오. 하나님은 은밀한 죄까지 심판하십니다.
중국 후한 때에 동래에서 태수를 지낸 양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대쪽같고 마음이 맑았으므로 후세에 모범적인 관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양진이 동래 태수로 부임할 때의 일입니다. 태수 일행이 동래로 가는 중에 창읍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마침 창읍의 현령은 양진이 천거하여 현령이 된 양밀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양밀 현령은 양진 태수일행이 창읍에서 묵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습니다.
밤이 깊어 양밀이 돌아가려고 일어나다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돈꾸러미를 내밀었습니다. 지난 번 천거해 준 것도 감사할 겸 앞으로도 잘 봐 달라는 인사치레였습니다. 그러나 양진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태수는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양밀도 "많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저 노자에 보태 쓰라고 준비한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사양치 말고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거 왜 이러시오? 내가 당신을 조정에 천거한 것은 당연히 당신이 나라에 필요한 인물이어서 천거한 것인데 내게 돈을 주어 관직이나 팔아먹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겠소?" 그 말에 머쓱해진 양밀은 잠시 주춤했으나 다시 받으라고 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받으신다고 해서 태수께서 나라의 관직을 파셨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수께 돈을 드린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때 양진이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다니?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소. 나를 진실로 위한다면 그냥 돌아가 주시오." 결국 양밀은 양진의 곧은 뜻에 감동을 받고 크게 절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양진이 말한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는 깊이 생각할 것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양사람들은 체면윤리에 젖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는 문화입니다. 이것을 영어에서는 Shame Culture 라고 합니다. 특히 동양의 유교사상에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히 신적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군자 사상이 그렇고 삼강오륜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체면 윤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인 기독교 사상과 너무나 다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아십니다. 우리의 행동의 동기를 헤아리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교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것 밖에 없습니다. 늘 죄스럽게 생각됩니다. 이것이 죄의식 문화 guilt culture 를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법에 걸리지 않았다고, 법에 걸릴 것이 없다고 의롭게 생각하는 한 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양심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양심은 구속력이 없어 눈만 감으면 그만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마비된 화인 맞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나 양심만 가지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분명히 깨달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까지도 드러나게 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인간 실존을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법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우리들은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어떤 공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들이 이곳에 와서 살도록 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솔직하게 저는 미국에 와서 살도록 허락해준 미국에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아 미국에 돈을 많이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학자들과 같이 미국의 번영을 위해 전문 지식을 제공할 아무 것도 없고 또 심지어는 어떤 기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에 들어와 살도록 한 것은 순전히 미국이 특혜를 입혀준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노인들을 두고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 정부에 세금 한 푼 안 냈는데 매달 750불씩 생활비를 주지요, 또 얼마든지 병원을 무료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은혜일 뿐인 것입니다. 본래 정부로부터 연금을 탈 자격을 얻으려면 최소한 10년을 미국에서 일을 하고 세금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법으로는 미국에서 9년 11개월 만 일한 사람이라면 연금을 받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법대로 한다면 전연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특혜를 베풀어주고 있으니 이것을 두고 법을 떠나 순전히 은혜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심판 날에 적용할 법에 대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심판할 것이며 불신자들 즉 이방인들에게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법에 의해 심판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율법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행해야 하며,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양심적으로 살았어야 합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어떤 유대인도 율법을 다 행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이 주신 그 양심대로 틀림없이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대로 한다면 하나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법을 떠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왜? 필요한지를 증거하기 위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행위로는 하나님의 합격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서는 행위로 구원받을 육체가 하나도 없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 복음을 받아드려 믿음으로 구원받고 또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실천하기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율법으로 심판을 받는 유대인(12-13) [2]양심의 법으로 심판을 받는 이방인(14-15) [3]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16)입니다.
[1]맨 먼저 12절부터 13절까지의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 유대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경찰로부터 티켓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경우에 티켓을 받게 됩니까? 교통 법규를 어겼을 경우에 티켓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을 어기면 그에 따른 심판이 내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기를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잘 지키면 복을 내려주고 만일 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것으로 언약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무엇을 계약할 때에는 싸인을 하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계약을 할 때에 모세는 율법을 읽어주고 유대 백성들은 그 법을 지키겠다고 입으로 서약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만일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을 다 잘 지키면 상관이 없겠지만 법을 하나라도 어길 경우에는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을 어긴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법을 어겼지만 벌을 내리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 마련이지만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벌하고 하지 않고 그가 누구이든 법을 어겼으면 법에 의해서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절에서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다고 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의 모든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율법에는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있지만 또 무엇을 해야 한다는 법도 있는데 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법에는 합격을 했다 하더라도 무엇을 하라고 한 것을 다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법을 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13절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오 율법을 행한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을 듣고 아는 것으로 합격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아는 것을 실천해야 비로소 합격이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또 율법을 가르치는 자의 경우에도 율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합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남에게 가르쳤다면 그 가르친 율법을 모두 몸소 실천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에 정통한 율법 선생이 남을 아무리 열심히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 율법을 자기 생활에 적용하지 못할 경우에는 율법을 어긴 자가 되어 벌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 앞에 무죄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4절부터 15절까지의 양심의 법으로 심판을 받는 이방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인은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율법아래 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에 메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어 있지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으므로 그들은 심판을 받을 근거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한다고 하여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심판을 받는 다른 법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1장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선악을 알만한 마음을 주셨고 또 세상 만물을 보면 만물 안에 하나님을 느끼고 알만하도록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오늘의 본문 14절과 15절에서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양심이 바로 율법이 된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돌 판에 기록해 두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기록한 법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모르는 사람도 무엇이 선하고 악하며, 무엇을 해서는 안되고 무엇을 해야 인간의 도리인지를 자기의 양심이 알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남에게 해를 끼쳤다면 이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양심이 아는 일이어서 스스로 판단하여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는 재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남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우리의 양심의 법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심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양심에 새겨진 율법이 있으므로 이 양심의 법을 범하면 그 양심의 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양심이란 때묻지 않은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양심은 다 더렵혀지고 무뎌져서 큰 죄를 짓고도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지 않는 양심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마지막으로 16절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 재판관은 눈에 보이는 증거에 의해 심판을 합니다. 그러므로 증거가 들어 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살인자라도 살인자로 심판을 받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은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은 크고 적은 죄를 그 누구도 감추어 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죄를 잘 감추어 두어 세상의 심판은 받지 않을 수도 있어도 하나님 앞에 가서는 모든 비밀이 다 들어 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옷을 입어 몸을 가리우고 또 외모를 꾸며 마음을 가리고 살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나게 되므로 흠 투성이의 몸과 마음이 다 들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대에서는 은밀한 모든 것을 다 들추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돌 판에 새겨진 모세의 율법이나 양심에 새겨진 율법 앞에서 결백할 수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인간은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심판 날에 심판대 앞에 서서 은밀한 것까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자는 그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며 율법을 받지 않은 자들은 양심에 새겨진 양심의 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의 율법을 받은 자이든 양심의 법을 받은 자이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으로 판정될 것이 뻔할 것이므로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대책으로 모세의 율법과 양심의 율법을 범한 모든 죄인들이 심판을 면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책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가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대책이었습니다.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로 문지방에 발라 유대인들의 장자들이 죽음을 면한 것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아 피를 흘리게 하시어 그 피의 진리를 믿고 순종한 자마다 죄에서 구원받도록 대책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대책을 받은 우리들은 진리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이해하며 이해한 말씀을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 다 서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도 알았지만 알고만 있는 자가 의인이 아니오 아는 것을 행한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얻게 됨을 확인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인지를 말씀을 통해 듣고 배우고 깨달아 알고 그 아는 것을 실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 7:21 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듣고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이해한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분하기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대로 행한 자는 지혜로운 자요 반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전해들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하는 존재들임을 알고 주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아 알아야 하겠으며 아는 것을 매일 매일의 삶에서 실천해 나가시어 심판대 앞에 설 준비가 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율법과 양심의 요구
유재명 목사
우리는 택한 백성이 아닌가!
우리에게는 절대로 지옥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어!
이런 그릇된 선민의식에 대해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관용과 사랑과 인내하심은 너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 회개케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율법이 있다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자만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 거룩한 율법을 알고 그것을 믿는 것이 저들 유대인들만의 특권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지없어 바울은 정면으로 공격하니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신분과 학식의 차이나 그리고 인종의 차이, 지역 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특권을 가지라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살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과 그리고 분명한 요구가 있습니다.
첫째: 율법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요구가 있습니다.
2: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절대 의식이 있습니다.
신6:6,7절에 오늘 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이든지 길에 행할 때이든지 누웠을 때이든지 일어날 때이든지 이 말씀을 강론 할 것이며 8,9절에 너는 도 그것을 네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과연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곧 생활이었습니다. 저들에게는 율법에 대해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큰 특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 교훈에서도 율법을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의라 했습니다. 저들의 실수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고 율법을 듣고 배워 하는 지식 자체를 의로 인정하는 것을 당연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착각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자랑인 율법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율법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사도바울은 공격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2: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위대한 원리하나를 발견합니다. 율법이든 말씀이든 듣는데 신앙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말씀을 아멘하고 순종할 때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듣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님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의 홍수 속에 살듯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 가슴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메말라 간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데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매력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려주는 데 매력이 있다면 세상 강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앉아서 믿는 믿음이 아니라 경험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율법 이전의 사람이나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요구가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게 되지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의 행위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다 했습니다. 율법의 정의는 십계명입니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모세오경이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먼저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주어진 것입니다. 롬1:1-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이를 보이셨느니라 했습니다.
동물하고 다르게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죄라 여기지 않습니다. 본능으로 행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에 자신을 속이지 못합니다. 율법을 몰랐을 때도 내안에 있는 양심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송사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법을 기록되지 않은 율법이라 했습니다. 양심을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양심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기준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워진 양심, 화인 맞은 양심들이 되었습니다. 원래 양심은 하나님을 보는 거울이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변질 된 것입니다. 정욕으로 더러운 욕심으로 말입니다. 이는 마치 깨진 거울과 같습니다. 동물들이 행하듯 아무 생각 없이 정욕에 던져진 인생들의 모습을 보면 깨진 양심이 어느 정도인지 갸름할 수 있습니다.
본래 율법이란 기록된 율법이 아니고 마음에 새겨 주신 것이 진짜 율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도 깨끗한 양심 이것이 본래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 기록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 보이는 기준을 주신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법을 만들고 지켜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시대에는 십계명이 없었습니다. 기록된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제사하였고 하나님을 구하는 자였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어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되었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법이 생기지 않았어도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것과 라반이 야곱을 속인 것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록된 율법이 없어도 원래는 아무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익숙한 자들이었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주신 원리에 따라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깨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원래가 축복입니다.
주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단순히 기록된 율법이 아닙니다. 원래의 마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셋째: 율법과 양심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결국이 있습니다.
12절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 있을까요? 지킬 수 없습니다. 양심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있을 까요? 이미 깨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하는 선포 앞에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심판에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율법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은 더러워진 양심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한가지의 심판의 기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내 복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이 심판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무서운 율법과 양심의 심판에서 자유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깨끗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심이 깨어져 버렸을 때 하나님은 기록된 율법을 주셨습니다. 기록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율법이 깨어진 마음들을 회복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친히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담아봅니다. 내주하신 성령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양심과 생각 그리고 모든 것이 지켜가고 계십니다.
이젠 양심과 율법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를 향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원리가 됩니다.
심판의 잣대
조성노 목사
예수를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훗날 죽으면 천국 못 갑니다. 아주 험한 곳에 갑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친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 저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개신교가 120년, 가톨릭은 220년입니다. 5000년 우리 역사에서 절대 다수는 복음이 뭔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퇴계 선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 지옥 갔습니까? 누구든 예수를 믿어야 천국 가는데, 그분들은 복음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었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믿을 수 있었는데 믿을 수 있는 기회가 그분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를 잣대로 삼아 최후심판을 한다면 공정한 게 못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인류사의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하나 믿음이라는 잣대만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믿음을 가장 강조하는 책이 로마서입니다. 믿음을 가장 강조하는 로마서가 바로 이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과 듣지 못한 사람을 같은 잣대로 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12절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 시대의 범죄는 율법으로 심판하나, 율법이 없던 시대는 율법으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 이전 시대는 무엇으로 심판합니까? 14절 상반절을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의 본성’이라는 말이 나오고, 15절 상반절을 보면,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된다’고 합니다. 즉 율법 이전의 이방인에게는 양심을 잣대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율법 이후, 이를테면 복음시대는 믿음이 잣대가 됩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복음시대는 믿음이 심판의 잣대가 되고, 복음시대 이전 구약시대는 율법이 심판의 잣대가 되며, 율법 이전이나 율법시대를 살았으나 율법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그 심판의 잣대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억울한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 이하입니다. “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인이 마지막 날 와서 결산할 때는 각기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시대를 산 사람에게 복음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습니다. 율법 이전 시대 사람들에게 율법의 잣대로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삼국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기준삼아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 모든 민족에게 가장 공정하고 공평한 잣대로 심판하시기에 누구도 억울하다거나 부당하다고 항의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공명정대하시고 공평무사하시기에 하나님의 심판행위에는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법정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는 절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모든 시대를 심판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아니니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공자님도 부처님도 구원 받아 지금 천국에 계시겠지요? 죄송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목사님이나 신부님이나 성자나 교황 같은 사람이 다 천국 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교황이 누구입니까? 교황에게는 천국 문 열쇠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황이 천국 갔을 까요? 그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님이나 부처님이 성인이시지만, 그분들이 천국에 갔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릅니다.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오늘 본문 앞인 11절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 중심을 꿰뚫고 계십니다. 역사상 둘도 없는 사기꾼이었는지 위대한 성인이었는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율법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입니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33절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자타가 공인한 의인들을 향해 주님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후심판 날에 주님은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목사라고 장로라고 기도원 원장이라고 다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공자,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아무리 성자요, 도덕 군자요, 종교 창시자요, 철학의 거성이라 해도 하나님께 합당해야 합니다. 율법이든 양심이든 인간 본성이든 하나님 기준에 맞아야 합니다. 유대교 기준에 의하면 절대 창녀나 세리는 천국 못 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어쨌든 이 시대는 복음시대며, 심판의 잣대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그 구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심판 잣대입니다.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믿지 않으면 심판 받아 지옥 갑니다. 복음시대의 불신자들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복음을 접하고도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신자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했음에도 안 믿는 사람은 본인 책임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복음시대를 살면서도 제대로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 못 믿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아직도 십자가가 무엇인지, 부활이 무엇인지, 재림과 영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사람들의 심판과 영원한 저주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물론 본인들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겠습니다만, 구약 에스겔 3장 17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내 이웃이나 가족이나 동족이 심판을 면치 못했다면, 그 사람의 심판에 대한 책임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의 나팔수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의 나팔수로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전해 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불신자들의 영혼에 대하여는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연대 책임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무책임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절대 나 하나만 예수 잘 믿어 구원받으면 땡이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사명자들입니다. 복음의 나팔수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복음을 전해 준 것처럼 나도 복음의 나팔을 다른 사람을 향해 불어야 합니다.
착한 일과 선한 일
오늘 본문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의해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과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차별 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을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가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인일지라도 율법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율법의 유무가 아니라 율법에 따른 행함의 여부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죄악이 낱낱이 열거되고 있지만 2장에 들어와서 유대인의 죄악으로 전환됩니다. 그렇게 해야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본질적으로 똑 같은 죄인이라는 3장의 논지가 서기 때문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율법이 없이 죄짓는 이방인은 그 죄를 밝히는 율법이 없어 망하는 것이고, 율법이 있지만 죄짓는 유대인은 그 죄를 밝히는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의 차이점은 율법의 유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갖지 못한 이방인이나 율법을 갖고 있는 유대인이나 누구든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죄로 인한 심판으로 - 유대인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지만 순종하지 못해서 받는 것이고, 이방인은 우주 만물과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지만 실천하지 못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성’에 해당되는 원어의 의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의식의 일종으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시에 의해 생긴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양심의 소리를 동반하는 금지의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즉,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속에 각인해 놓으신 도덕적 의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율법이 없는 이방 사람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면 비록 그에게는 율법이 없을지라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나의 복음’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바울의 복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복음은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이신칭의의 복음’이라기 보다는 본문에 충실한 복음 즉, 종말에는 사람들의 은밀한 것까지도 심판 받을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런 엄밀한 심판이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각성하게 하기 위해 바울은 그것을 복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결코 자기를 내세우는 교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율법을 소유한 자가 의인이 아니라 오르지 그 율법을 지키고 실행하는 자 즉, 율법의 요구에 응한 자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강조점은 율법의 소유여부가 아니라 실천여부입니다. 그것의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으니 곧 선행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므로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실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가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착한 일’,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 ‘세상과 사회에 유익한 일’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런 일이 선한 일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세상사람들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위해서나 존경 더 나아가 명성을 위하여 자선을 베풀거나, 구조단체에 거액을 희사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돈을 통하여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선한 일은 최소한 그런 일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곧 주안에서 하는 선행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착한 일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주님의 뜻과 계획에 부합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통치를 받는 삶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고 성경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영적 지식을 삶에 실행하는 단계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 있으니 곧 대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것으로 두 번째 단계는 그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행운과 불행 그리고 희로애락에도 별로 구애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보상은 이 땅이 아니라 저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그리스도인이 얻게 될 영광은 존귀한 것이며 썩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계 있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삶이 중요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만이 하나님나라의 영광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계를 갖지 않는 사람이 그 나라에서 영화를 누릴 수는 없지요. 그런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도 조건과 환경에 상관없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평화입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고 고난의 한 복판에 있을지라도 선행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그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우리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