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웅이 이야기 -2.2-
the Beast
<돌격조>의 출발 일정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달브레이크가 들은 것은 그 날 오후였다.
"사흘 뒤라고?"
크래쉬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래. 무슨 황무지 탐사대를 물었나 봐. 생태 학술단이라던가, 암튼 무슨 머리 허연 학자님네들 데리고 나가는 일인 모양이야."
황무지에 학술단이라. 황립 연구원 소속이던지, 아니면 어느 가문 식객들인 모양이었다. 가문의 식객들은 밥이나 축내며 시나 읊는 것 외에도, 그런 식으로 자신들이 묵고 있는 가문의 지체를 높여 주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그리고 학문적 소양이 높은 식객들을 많이 모시고 있다는 것은 그 집안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말해 주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무릇 공짜 밥은 없는 법이니까.
"편하기는 하겠군. 풀 캐고 짐승 잡는 것 말고는 우리한테 귀찮게 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황무지 탐사면 마을이나 성에는 들르지 않나?"
"그렇지는 않을걸. 아마 일정은 서령이나 남령 어느 도시까지 갔다 오는 것으로 하고, 그 도중에 손님들이 길바닥을 샅샅이 훑으면서 연구를 하지 않을까 싶어."
달브레이크는 코웃음을 쳤다. "거의 유람이군."
"것봐. 쉬운 일이라니까? 게다가 이번엔 파라히트인가, 무슨 술 장사 해서 돈 깨나 번 집안의 식객님들인 모양이야. 그런 곳의 후원을 받다보니 우리 의뢰할 때도 인심 팍팍 썼던 모양이더군. 밤 캡틴이 입이 헤벌어졌던데."
"밤? 아... 차리어트 캡틴의 아명이 밤이었지."
"응. 잘하면 보너스도 나오겠어. 신참, 운이 좋구만? 그렇다고 이번 일 끝나면 돈 떼먹고 사라
지거나 하지는 말라고. 섭섭하니까."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달브레이크도 낭인이었고, 이곳의 파워 변화에 민감하다. 물론 차리어트도 낭인이니만큼 낭인들을 다루는 데 파워의 집중만큼 큰 메리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이고, 그래서 한순간도 처신이 흐트러지는 법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집단의 파워라는 것은 주변 환경과의 알력 대결에서 쉴새없이 변하는 것이고, 낭인들은 그 사이에서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법이니까.
혹자는 '철새들'이라며 낭인들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지만 - 그 자는 분명 낭인이 아닐 것이다 - 바꿔 말하면 언제나 주위 환경에서 우위만을 차지할 수 있다면 낭인을 휘어잡는 것은 다른 어떤 종족을 회유하는 것보다도 쉽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파라히트... 아, 솔보 녀석이 질색을 하던 그 주가인가. 흠.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달브레이크는 만족스런 기분에 곰방대를 꺼내 물었지만 구석에서 노려보는 샨의 눈길을 느끼고는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나가면서 그의 머릿속에 잠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난 도대체 <황야의 바람>인 거야, <돌격조>인 거야?
달브레이크는 차리어트를 찾아가 좀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냈다. 차리어트는 역시 엄격한 캡틴답게 '목적지가 들마골에서 한벌 성으로 바뀌었다'는 식으로 돌려 말했다. 물론 학술단의 동행 역시 '우연찮게 한벌 성 방향으로 향하는 학술단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표현했고, 그 표현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한 이는 <돌격조>에는 없는 듯했다.
날짜와 장소가 확실히 잡힌 만큼 상단의 일행들은 각자 한몫 챙길 만한 건수를 찾아 사방으로 해산했고, 달브레이크도 생각해 둔 물건을 구하러 저자거리로 나갔다. 대활로에서 사방으로 뻗는 골목들은 모두 거기가 거기 같고, 소란스럽고 부산스럽다는 점에서는 모조리 똑같다. 하지만 달브레이크는 마치 여기서 유년시절을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인파를 헤치며 돌아다니면서 고만고만한 골목길을 분간해낸다.
우마차가 시끄럽게 지나가면서 사방에 소음과 더불어 먼지를 흩뿌리고 사라진다. 비가 온 지도 달포는 지난 도시의 포석 위로 지저분한 흙먼지가 날아오르고, 그 중 상당량이 달브레이크의 갈기와 털을 더럽히며 그 얼굴 위로 내려앉는다. 달브레이크는 재채기를 하고, 비좁은 시장골목에서 옆사람과의 간격이 제대로 확보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옆에 선 건장한 인간 청년의 얼굴에 달브레이크의 침이 튄다. 별로 사교적이지 못한 인생을 살아온 듯한 인상의 청년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달브레이크는 사과한다. 청년은 낭인을 상대로 결투를 감행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어쨌든 낭인에게는 주먹다짐이라든가 티격태격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그들에게 모든 싸움은 대련 혹은 결투를 의미하는 법이니까. 툴툴거리면서 청년은 야채가게 뒤편 골목으로 사라진다. 달브레이크는 다시 인파에 실려, 혹은 인파를 뚫고, 오후의 지저분한 햇살과 그 햇살을 가리고 선 차양으로 뒤덮인, 시끌벅적하고 요란스럽고 지저분한, 어쩌면 매혹적이고 수다스러운 저자거리를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달브레이크의 신발이 짜증스러운 감각을 전달한다. 개똥이라도 밟은 듯한 감촉. 발을 죽죽 끌면서 닦아낸다. 더러운 땅이고, 더러운 도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거나 자룡탑 꼭대기에서 쳐다보지 않는 담에야 이 도시의 이 부위는 누가 봐도 심각하며 치유 불가능한 환부이다. 도시의 위대함은 그런 식으로 부산물을 생산하면서 증진되고 있었다. 사자 가죽을 가득 실은 코끼리, 혹보다 몇 배 큰 등짐을 얹은 낙타, 비대한 몸집의 주인을 태운 역시 비대한 몸집의 말, 그 말의 어지럽게 움직이는 발굽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조그마한 발바리, 그리고 그 발바리를 찾아다니는 어린 임프가 뒤섞인다. 도시는 왁자지껄하지만 고요하다. 그 왁자지껄함이 이 시장골목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무의미한 것이기에 그것은 고요함이다.
마침내 달브레이크는 한 골목 구석으로 들어간다. 소음이 골목길 벽에 막혀 한결 줄어드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젊은 낭인은 구석에 위치한 작은 상점, 가게 이름도 없어 그냥 막연히 상점이겠거니 짐작할 수 있는 작은 집으로 들어간다. 집 위에 집, 집 밑에 집. 혼잡한 수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달브레이크는 지하로 내려간다.
얼기설기 얽힌 볼품 없는 주렴으로 대충 가려진 입구를 밀치고 들어온 달브레이크의 눈에 어두침침한 공간 속의 사람들이 들어온다. 낭인도 있고, 오셀롯도 있고, 인간도 있고, 임프도 있다. '팬더런은 없군' 달브레이크는 뜬금없이 그렇게 생각한다. 다들 화투를 치거나, 광을 떼며 점을 치거나, 수정구를 쓰다듬으며 점술사 흉내를 내거나 하느라 바쁘다. '쓰레기들.' 달브레이크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 임프를 찾는다.
"무-치키 어디 있어?"
그리 크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사람들 모두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있었기에 달브레이크의 목소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잠깐 끌었다. 하지만 그것뿐. 다들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한다. 달브레이크도 그들의 시선이 어떻건 하등의 관심이 없었기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임프 무-치키를 찾는다.
곧 구석진 이곳에서도 유난히 구석진 귀퉁이에 찌그러져 낮잠을 자고 있던 임프 하나가 기어나온다. 걸어나온다기보다는 비척거리며 기어나온다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달브레이크는 생각한다. 임프 무-치키는 잠이 덜 깬 찡그린 표정을 하고 있다가, 달브레이크를 보더니 안색이 조금 밝아진다.
"물건 사러 왔나?!"
"약."
"하시시?!"
"응."
"돈은?!"
"스무 냥."
임프의 표정이 도로 찡그려진다. 무-치키는 임프 특유의 고함치는 어투로 낮게 말한다. 고함치듯 낮게 말하는 것은 임프들의 신기한 어법이다.
"장난하나?! 꺼져!"
"그것뿐이야."
"이 바닥에서 얼마나 굴렀는데 스무 냥이 다야?! 웃기지 마! 노름이라도 했냐?!"
은행에 모셔 두고 있지. 달브레이크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임프의 멱살을 잡는다. 임프는 캑캑거린다.
"이, 이봐! 왜 이래?!"
"난 여기가 싫어. 빨리 거래 끝내고 나가게 시원시원하게 얘기하지. 스무 냥으로 하시시. 내놓을 수 있는 만큼만 내놔. 나도 도둑놈은 아냐."
도둑놈은 아니고, 약장수지. 임프의 멱살을 놓는다. 흥분한 무-치키는 품 안에 든 단도로 달브레이크의 목젖을 그어 버릴까 하다가, 곧 그의 다른 손이 이미 칼자루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한다. 빈틈없는 놈. 그의 대거보다 달브레이크의 맨 이터가 훨씬 빠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 반대이겠지만, 상대는 달브레이크다. 무-치키는 툴툴거린다.
"로아여, 이 놈을 안 잡아가시고! 하시시 닷 푼, 그 이상은 안 돼!"
달브레이크는 마약을 파는 악당에게 마약을 파는 악당이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는 공명정대한 악당이었다. 암, 어불성설이고말고.
"한 냥."
"이런 날강도! 정말이지 로아는 뭐 하시는지!"
"이것도 어차피 장물일 거 아냐."
"약을 훔쳐서 파는 놈 봤어?!"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쳇, 사람 잘 봤다만 이건 우리가 만든 거야! 순도는 보증한다고!"
"그러니까 온 거 아냐. 한 냥."
달브레이크는 시종일관 유들유들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면 무-치키가 이렇게 매달릴 리가 없다. 뭐, 정 안 되면 딴 거 사 가고.
"젠장! 좋아! 한 냥!"
달브레이크가 이겼다. 무-치키는 가슴팍에 대롱대롱 매달린 로아의 상징을 만지작거리며 카운터 뒤로 돌아간다.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빼꼼 내미는 임프.
"돈!"
달브레이크는 두 말 없이 엽전 묶음을 던져 준다. 임프의 재빠른 손놀림이 허공에서 돈을 낚아챈다. 오셀롯이 조용하고 재빠른 몸놀림으로 담 위로 날개짓에 능한 이를 많이 배출한다면 임프 중에는 정교한 손으로 열쇠 기술과 소매치기에 능한 자들이 많다. 잠시 후 임프가 뭔가 조그만 자루를 들고 나온다.
"딱 한 냥짜리다! 이거 먹고 떨어져!"
"항상 고마워."
"제기랄, 꺼져!"
달브레이크는 언젠가 낭인의 입으로 휘파람을 부는 법을 꼭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럴 때
휘파람을 한 번 불어 줘야 제 격일 텐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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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헛, 쿨럭쿨럭!"
- 먼지 때문에 그려?
"콜록, 우엣취!"
- 말도 못 꺼내는구먼. 쉬었다 가지... 아, 쉴 곳도 없남?
태수는 지웅의 등 위에서 힘겹게 등짐을 뒤져 광목천을 꺼내 얼굴에 대충 두르고 나서야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태수가 달리는 곰의 등 위에서 그런 묘기를 보일 수는 없고, 아까부터 불기 시작한 모래바람 때문에 지웅이 걸음을 늦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 뭐 이래?"
- 태미드에 가까운 모양이여. 아직은 숲도 있고 풀밭도 있지만 거기서 부는 모래바람은 장난이 아니라더만.
"쉴 곳 없을까?"
- 안 보여. 사람 냄새도 안 나구.
"태미드 들어가면, 인가도 안 나올 텐데 음식은 어떻하지?"
- 싸 온 육포랑 떡으로 며칠 버티기야 해야것지만... 정 안 되면 사냥해서 잡아먹어야지.
"모래바람 그칠 때까지만 숲에 좀 들어가 있으면 안 될까?"
태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웅은 근처의 듬성듬성한 수풀로 걸음을 향했다.
그들은 여행 닷새째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난 나흘간 지웅은 칠백 리 이상을 달렸다. '벌써 사분의 일이나 왔으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다'며 미안해하는 태수의 말에 지웅은 '후딱 데려다 주고 집에 가려구 그려'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해 태수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사실 여비도 충분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마을마다 들러 끼니거리를 해결 - 이라기보다는 구걸 -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여행이 빨리 끝나면 태수로서도 좋은 일이다. 빨리 도착하면 여관에라도 묵으면서 시험 준비를 오래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닷새째, 울창하게 길가를 뒤덮으며 그 속에 사람고기에 굶주린 늑대떼, 문사의 노자돈에 관심이 많은 산적, 불곰을 사냥하고 싶어하는 떠돌이 모험가, 남자를 홀리고 싶어하는 처녀귀신 등을 숨겼다가 간간이 등장시켜 그들 둘의 발을 묶곤 했던 - 태수는 그제서야 혼자 여행하기로 한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하며 무지몽매하기까지 한 결정이었는지 깨달았다. 어쨌든 그는 지금껏 도둑 하나 없이 지나치게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 숲이 마침내 드문드문한 나무 몇 그루만 남기며 황야에 그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경계선에 도착한 그들 앞을 그 유명한 태미드의 황사가 가로막았다.
"언제쯤 그칠까?"
- 봄 내내 이런다고 했어. 하지만 불었다 멈췄다 하것지. 좀 잠잠해지면 가고, 서고 반복허자구.
"나 참, 마을까지 황사가 불어오기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하기야, 그 먼 곳까지 먼지를 날라 오는 바람이니."
태수는 혀를 찼다. 아직 황야의 초입에도 다 들어가지 못했는데, 못 되어도 오백 리는 가야 할 태미드 여행길의 앞길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야에서 볼일은 어떻게 본다..."
그러고 보면 분명히 태수도 엉뚱한 데가 있다.
- 그냥 바지춤 내리고 보면 되지.
"... 이봐, 아무리 그래도..."
- 누가 있다고. 나밖에 더 보냐? 그리구 나도 관심 없어. 뭣보담두, 어차피 나무 뒤에 숨어두 냄새 다 나. 곰은 눈보다 코가 더 민감하다고.
"... 아차, 그랬겠군. 하지만 그 얘기가 아니라고."
- 그럼?
"나뭇잎이 없으면 뭘로 밑을 닦냐? 황야라 물도 없을 텐데."
- ... 그건 니가 알아서 혀.
전혀 쓸데없는 걱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태수는 근처의 잎이 넓은 나무를 골라 이파리를 따다 모으기 시작했다. 지웅은 피식거리며 그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지도도 없었고, 그래서 마치 고대 동령의 광신도들이 자신들의 성자의 유물을 찾기 위해 성지를 찾으러 갈 때처럼, '무조건 해뜨는 쪽으로만 가면 뭐가 나와도 나온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다가 들른 한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너무 돌아 왔으니 북동쪽으로 더 틀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마을에 들를 때마다 수도 가는 방향을 물어물어 가며 여기까지 왔다. 시골에서 대륙 지도라는 것을 구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 대책없는 여행이다.
지도뿐 아니라,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여행이다. 신발이야 여러 개 싸들고 왔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태수는 나흘간 지웅의 등에 업혀 여행하면서 아직까지 처음 떠날 때 신고 있던 그 짚신을 그대로 신고 있었다. 도대체 오래 걸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숲이 없으면, 지금까지처럼 짐승이나 산적이 나오지는 않겠지?"
태수는 며칠 전 지웅이 때려잡은 늑대들에게서 뽑은 발톱을 담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들이 빙 돌아가더라도 비교적 걷기 편한 숲길을 택하지 않는 것은, 태미드를 가로지르는 것이 빠르다는 것 이외에도, 지난 나흘간 만난 온갖 종류의 훼방꾼들에 질려 버렸다는 이유가 있었다.
특히 지웅이 사냥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태수를 홀리려 들었던 처녀귀신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태수는 기겁을 하면서도 품에서 부적을 꺼내들었고, 부적을 보고 도망치는 처녀귀신의 등에 불 붙은 부적을 날려 불태워 버렸다. 그 때까지 태수를 마냥 '제 몸 간수 못하는 놈'으로 취급하던 지웅이 태수를 조금이라도 길동무 비슷한 존재로 대접하기 시작한 것도 그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 글쎄, 보통 짐승들은 없것지. 산적두 저런 곳에서 영업하지는 않을 거구. 하지만...
"뭐가 있을까?"
- 임프들이 살지. 원래 태미드는 임프들의 땅이니께. 부족 이루고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임프들이 많다고 들었는디. 그리구 괴물들도 꽤 많이 살것구.
"음... 물도 별로 없는 그런 곳에서 살려면 꽤나 난폭해야 할 거야."
- 난폭이라기보다는 강인해야것지. 억세구. 상대하기 힘들것는디. 아, 물 하니까 생각났는디, 호신부 좀 태워 줄랑가?
"알았어. 잠깐만, 좀 꺼내고."
태수는 허리춤에서 물을 꺼내 그릇에 조금 담고는 매일 밤 그려 모아 둔 호신부 뭉치에서 한 장을 뽑아들어 지웅에게 건네었다. 자신이 직접 기를 담아 불태워도 되지만 이백 년 묵은 영물 앞에서 기를 운용하기는 아무래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듯 무안했다. 지웅도 그것을 알고 씩 웃으며 - 태수는 지웅이 곰의 얼굴로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 부적을 주둥이로 받아 물었다. 하지만 곧 인상을 쓴다.
- 바람이 불어서... 재 다 날아가것다.
"사람으로 변해서 손에 들고 해 봐."
- 그냥 니가 혀. 귀찮다.
지웅은 마을에 들러 묵어 갈 곳을 청할 때를 제외하면 사람 모습을 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태수는 부적을 도로 받아들고 바람을 등지고 앉았다. 불을 붙이기 위해서이다. 주문을 웅얼거리며 외우는 태수의 옆모습을 지웅은 흘깃거렸다.
'흠, 기본적인 경문이군. 도학자들은 저런 거 싫어한다지. 그러니 깊게는 안 배웠을 터이구.'
도학자들은 경문 구절이나 그 원리로 축귀나 제령 같은 소위 말하는 '푸닥거리'를 하는 것을 천한 짓이라며 경시한다. 그래서 그런 일을 전문으로 맡는 이들은 술법사라고 하여 무당 취급을 한다. 그렇기에 태수는 이런 일에 그렇게 익숙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불은 금방 붙었다. 아무 종이나 주문만 외우면 불이 붙는 것은 아니며, 법칙을 지켜서 만든 부적만 가능한 것이다.
태수는 불이 붙자마자 다른 손으로 바람이 들이치지 못하도록 부적을 가린 채 잠시 타는 부적을 들고 있었다. 곧 부적이 재가 되기 시작했고, 태수는 재를 한 손에 받아 모았다. 타는 도중에 부적이 땅에 떨어지면 안 되고, 다 탈 때까지 들고 있어야 하기에 태수의 손은 점점 뜨거워졌다. 하지만 태수는 부적이 거의 다 타고 손톱만한 조각만 남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모은 재를 바닥에 놓은 물그릇에 털어넣고 젓는다. 한지에 주사 가루 탄 참기름을 찍어 쓴 부적이기에 먹어도 무방하며, 마실 경우 그 효력을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다. 마신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기에.
태수가 그릇을 내밀자 지웅은 물그릇에 주둥이를 박고 할짝거리며 부적 탄 물을 들이켰다.
"맛있냐?"
- 재 탄 물이 맛은 무슨 맛.
"그런데 되게 맛있게 먹는군."
- 목이 말라서... 이제 물 먹을 일도 흔치 않것구만. 물 얼마나 있어?
"호리병 세 개 남았어."
짐이 많았지만 태수는 물과 식량에는 아낌없이 적하량을 할애했다. 비 올 때마다 빗물을 받았고 마을에 들를 때마다 약간의 노자를 써 가면서 개떡과 말린 사과, 육포 같은 것들을 얻어 왔다. 지웅의 먹거리까지 가져올 수는 없었기에 - 지웅은 굉장히 많이 먹었다 - 지웅이 먹을 것은 사냥으로 대체했었다. 사실 지웅은 물보다 식량이 걱정이었다. 정 안 되면 태수 밥 뺏아먹어 가면서 버텨야겠지만, 그런다고 배가 차지는 않는다. 어쨌든 둔갑술은 눈속임이기에 사람으로 변한다고 해서 사람 먹는 대로 먹거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웅은 한숨을 쉬었다.
모래바람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태수는 수건을 입가에 두르고 지웅의 등에 올라타려고 했다. 하지만 지웅은 고개를 저었다.
- 걷자.
"왜?"
- 뛸 수가 없는 땅이여. 별로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이고.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는 게 좋은 땅이라고 했잖아?"
- 그게 또 그렇지가 않어. 태미드에 뭐가 사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할 뿐더러, 괜히 섣불리 뛰었다가 인가를 놓칠 수도 있어.
태수는 걷자는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마지막 말에는 공감했다. 인가에 들러 먹거리를 얻거나 구입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굶게 된다. 그들이 조금만 더 노련했더라면 태미드에 가장 근접한 마을에 머무르면서 동행할 여행자들을 모아서 무리지어 이동할 생각을 떠올렸을 테지만, 태수는 너무 순진했고 지웅 역시 태수보다 약은 것은 아니었다.
"근데 뛸 수가 없다니?"
- 태미드는 사실상 사막이나 다름없는 땅이여. 이런 데서 괜히 체력 소모했다간 목 말라 죽을 거여.
지웅은 그렇게만 말하고 걸음을 뗐다. 태수도 그 뒤를 터벅터벅 따랐다.
황야의 바람은 태수의 옷가지와 지웅의 털을 거침없이 빗겨대었다. 바람의 빗질의 방향은 제멋대로였고 그래서 태수의 옷은 성벽에 매어단 깃발처럼 여기저기로 펄럭거렸다. '두루마기를 갖고 오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일까.' 태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잘못된 생각이었다. 가벼운 베옷은 금방 상한다. 결국 태수는 태미드에 들어선 지 이틀만에 누더기 차림이 되었다. 지웅의 경우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모래바람은 그쳤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규모의 기상현상의 경우를 말하는 것일 뿐, 간간이 털 사이로 날려들어 스미는 흙먼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태수가 거지 꼴이 된 이틀째 밤, 지웅은 흙덩이 털괴물 같은 꼴이 되어 오아시스 같은 물웅덩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널부러진 인간과 곰은 태미드의 휘저은 미시차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잘한 들풀들을 모아서 피운, 쓰레기 더미 태우는 것 같은 불을 앞에 놓고 황야 가운데서 맞는 밤은 태수에게나 지웅에게나 그다지 친구들에게 권장하고 싶은 시간은 아니었다. 태수는 그 기분을 한숨으로 표현했고 지웅의 경우에는 좀더 직접적인 생각투로 내뱉았다.
- 지랄맞구만.
"나 때문에 고생한다."
사실 따라오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면 태수는 서령의 숲을 벗어나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었을 터였다.
- 이왕 이렇게 나온 거, 노닥거리다가 가야것다.
"나 바래다 주고 금방 돌아간다며?"
- 길이 생각보다 험하구먼.
딴소리였다.
"그럴 거면 수도까지 가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유람이라도..."
- 놀러온 것 아니여.
아직까지 미살에 대한 생각은 가시지 않았던 지웅이었다. 목소리가 괜히 쌀쌀해졌다. 태수는 괜히 머쓱해져서 조금 가만히 있다가, 그냥 주위를 바라본다. 어쨌든 황야의 밤은 적적한 법이다. 사방에서 귀신 우는 소리 같은 바람소리가 울린다. 태수는 잠시 그 소리에 넋을 놓고 지평선을 바라본다. 이 놈의 황야에는 산도 없다. 산이 없는 풍경이라는 것은 산 속에서 살아 온 서령 사람에게 충분히 생경한 모습이었다. 사보텐이 어스름 속에 드문드문 키 큰 장승처럼 멀거니 서서 그들을 둘러싸고 바라본다.
문득 태수에게 어떤 생각이 스친다.
"이봐, 선인장 잘라 먹을 수 있다는 소리 못 들어 봤나?"
지웅의 눈이 반짝했다.
잠시 후, 지웅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한 채, 태수와 둘이서 각각 잘라낸 선인장 뭉치를 끼고 앉아서 가시를 뽑겠답시고 낑낑대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씨름을 해서 한 덩이씩, 나름대로 먹을 수 있을 듯한 과육을 들고 둘은 마주앉았다.
맛은, 지웅의 표현을 빌리자면, 겁나게 없었다. 하지만 모처럼 입에 넣은 채소 비슷한 섬유질은 분명 그들의 소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쨌든 태수는 이레째에 접어든 여행 내내 약간의 말린 사과와 떡을 제외하면 오로지 육포로 점철된 식사에 의해 심각한 변비를 겪고 있었기에 흔치 않았던 식용식물이 마냥 반가웠다. 때는 늦봄이다.
지웅은 하루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었지만 태수는 그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멈춰서기에 태미드는 너무 넓었다. 지웅의 어림짐작으로 지금까지 이틀 동안 그들이 걸은 거리는 대충 사백 리. 이틀 동안 들판도 숲도 아닌 태미드를 사백 리 걸었다고 하면 인간 모험가들은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그것도 단련된 도보 여행가도 아닌 초보 나그네인 태수가 말이다. 물론 그것은 지웅의 덕이다. 지웅은 투덜거리면서 '걸어다닐 거면 내가 태우고 다닐 이유가 없다'고 했지만, 태수가 걷다가 지쳐 나자빠지거나 물집이 생겨 발을 감싸쥐고 오만상을 찌푸리거나 할 때면 지웅은 말없이 등을 돌려대었고, 결국 태수는 살아 있는 짐짝 흉내를 내며 지웅의 터벅거리는 발걸음에 실려 맥없이 늘어진 채 태미드의 쓰라린 햇살에 익어 가곤 했다. 그들은 하루에 여덟 시진 이상을 걸었고 나머지 시간은 그늘이 보일 때마다 간간이 멈춰서서 끼니를 때우거나 잠을 자면서 보냈다. 그나마도 태수는 지쳐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하루의 3분의 2를 걷는다는 중노동 속에서 인간에게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지웅은 별 불평 없이 먼지더미 속에 쓰러져 정신 못 차리는 태수를 툭툭 건드려 깨우곤 했다.
그리고 사흘째, 그들의 여행에 변화가 왔다.
태수는 말라죽은 고목 밑의 그늘에 누워 잠을 자면서, 뭔가가 자신의 몸 주변에 떼로 몰려들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아, 시끄러워. 잠 좀 자게 제발 내버려 두라고.' 그리고 지웅은 그 때 이미 잠에서 깨어 그들의 주변을 가득 메운 스캐빈저, 수십 마리의 태미드 콘돌을 내쫓으려 날뛰고 있었다.
- 이 놈의 시키들!
"쿠워어어!"
지웅은 포효했지만 태미드 콘돌들은 두려워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웅은 모르고 있었지만 시체를 주로 먹는 태미드 콘돌은 살아 있는 생물들을 잘 건드리지 않았을 뿐더러, 이 새들은 무리를 짓는 새들이 아니었다. 급기야 지웅은 겁을 주기 위해 너무 가까이 다가선 한 놈에게 덮쳐들었다. 그 놈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태수의 목덜미를 노렸고 곧바로 지웅의 앞발에 머리통이 박살났다. 태수는 얼굴에 뭔가 뜨끈한 것이 흩뿌려졌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려고 했지만 피로에 절은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다른 콘돌의 다리, 사냥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조금 빈약하지만 누워 있는 인간의 목덜미를 찢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발톱 달린 발모가지가 날아들었다.
- 이런, 썅!
지웅은 너저분한 깃털 덩어리가 된 콘돌을 팽개치고 태수를 덮치는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 놈은 아까 놈과는 달리 재빠르게 피했고 그래서 지웅은 태수를 밟지 않기 위해 - 지웅의 몸무게는 80관에 달한다 - 공중에서 한 번 더 도약을 시도했다. 어느 정도 성공한 그 시도의 대가로 지웅은 태수의 옆에 볼품없이 나동그라졌고 쿵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곰의 덩치가 쓰러졌다. 그 위로 수십 마리의 콘돌들이 일곱 자에 달하는 너비의 날개를 자랑하며 덮쳐들었다. 지웅은 삽시간에 시커먼 깃털의 날개들 한가운데에 둘러싸여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불곰은 후벼파는 발톱과 찔러대는 부리와 퍼덕거리는 날개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쳤다.
"키르르륵!"
"우워어어어!"
지웅은 포효했다. 그의 눈앞에 시뻘건 불길이 덮쳐들 때까지.
갑자기 콘돌들이, 덮쳐들던 것처럼 후다닥 흩어졌다. 그 너머에는 조금 전 잠을 깨어 상황을 파악한 태수가 부적 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
약재 무게에서 한 냥은 37.5g이고 한 푼은 0.375g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하는 화폐 단위는 우리의 옛 화폐 단위(1냥에 약 2만원)는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 3배 정도 된다고 할 수 있겠군요. 한 냥에 6만원. 달브레이크는 이번 호위로 육십 냥 정도를 벌 거라고 했었죠? 두 달에 360만원이면 꽤 좋은 벌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결국 솔보가 날린 천 냥은 6천만원 정도가 되는군요;;;)
사회 체제가 다르면 화폐 단위를 정확히 옮겨 가늠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화폐 단위는 식량 가치로 비교해서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솔보가 보리 이백 가마를 가볍게 사 갔었죠? (계산하느라 머리아프시죠? 히히. 저도 머리아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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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돈 단위 생각해서 쓰려면 복잡하겠네요.-.-;; 읽는 저로서는 걍 그렇구나 하고 넘기지만. 지웅 일행은 고생이 많네요. 부디 목적지까지 잘 가기를... 이번편도 잘 읽었습니다.^ ^
잘 보고 있습니다. 설정이 신기하기도 하고 전개도 매끄러워서 읽기 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