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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종찬 씨 |
전두환 씨가 대통령이 된 지 오래지 않아서의 일이다.
그때 나는 '평민사' 라는 이름의 출판사 대표였다.
어느 날 나는 문화공보부(오늘의 문화체육관광부) 문화국장인 윤 아무개 씨에게서 느닷없는 호출을 받았다.
그를 방문한 나를 보자, 대뜸 그는 평민사가 휴업을 해야겠다고 했다.
휴업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인 즉 문을 닫으라는 얘기였다.
상부 곧 청와대에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전달을 하는 것이니 이해해 달라며,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거부할 경우에는 더욱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사뭇 협박조 였다.
문화국장이면 이사관이니 문화공보부에서는 고위직인 셈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가 들먹인 상부의 하급직보다도 못할 수 있는 자리였다.
당시의 이사관들을 폄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요즈음도 '왕차관'이란 말이 있고, 매우 낮은 직급의 공무원이 3부요인 중 한 분인 대법원장도 불법적으로 사찰한 사실이 공개되고 있지 아니한가. 그때부터 32년이 지나서도 이러하니 32년 전에는 어떠했겠나.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도 그런 정도의 세상 물정은 알고 있었다.
문화국장과 입씨름을 할 필요가 없는 일임을 즉시 알았다.
그래서 나는 윤 국장에게 말했다.
"정부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겠죠."
그는 매우 안도하며 반색을 하였다.
"이렇게 저희 입장을 이해해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조치가 오래야 가겠습니까. 되도록 빨리 풀리도록 저희 부에서도 노력하겠습니다."
"별 말씀을요. 윤 국장께서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상부의 명령이시니 어쩌겠습니까."
"거듭 감사드리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기왕에 결심하셨으니 자진해서 휴업하신다는 휴업계 한 장만 작성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아, 그렇겠군요.상부에 보고하시려면 필요하시겠네요.그것도 작성해 드리죠. 그런데 그 이전에 저도 필요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뭔가요?"
"저희 평민사가 큰 출판사는 아니지만, 사원의 수가 근 20명입니다. 그들에게 제가 뜬금없이 휴업을 하겠다고 하면 그들이 이해를 할 수 없겠죠?"
"그렇겠지만 그건 김 사장님께서 적당히 좀 처리해 주시면 ...."
"제가 정부 쪽에 제안을 하나 드릴게요. 정부에서 제게 강제휴업권고와 관련한 문서를 보내주시면 어떨까요?"
윤 국장은 펄쩍 뛰었다.
"그건 절대로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도 정색을 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원들이 절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회사를 휴업하겠다고 하면. 사원들은 일자리를 잃는 것이고, 또 저는 일을 하지도 못하면서 사원들에게 사규에 따라 급여를 계산해 지급해야 합니다. 출판사의 이미지가 풍비박살 날 것은 불문가지고요. 경제적으로 실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일을 권유하면서 정부가 제게 문서 한 장도 줄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상부에 보고 하십시오. 김종찬이가 평민사 휴업하겠다고 동의했다고. 하지만 강제휴업권고와 관련한 정부 쪽 문서를 요구했다고. 그것만 보내주면 즉시 휴업할 것이라고 보고하십시오."
그때의 윤 국장 모습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한참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사람은 윤 국장이었다.
"도대체 그 문서는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지금은 무서워서 휴업을 하더라도 행정소송이라도 하려면 그 문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 국장의 표정이 더욱 참담해 보였다.
그로부터 연일 윤국장과 나의 지리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공갈과 협박, 애원과 구슬림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어치피 그는 심부름 꾼이니 상대할 필요가 없단 생각에서였다.
더우기 강제휴업권고를 받은 회사가 평민사 하나가 아니었다.
김언호의 한길사와 이태복의 광민사도 꼭같은 위협을 받고 있었다.
김언호는 허문도를 접촉했다.
당시 청와대에서 문화 관련 비서관으로 명성(?)을 떨치던 허문도를 접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더우기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김언호로서는 해봄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허문도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놀랍게도 자기네에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허문도를 미심쩍어 하며 의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허문도가 아니라면, 청와대의 누가 무엇때문에 이런 해괴한 짓을 하는 것일까?
조그마한 출판사 셋 강제휴업 시키겠다고 청와대가 나섰다는 게 우습지 아니한가?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광민사의 이태복이 이미 구속되었고 광민사는 이미 휴업에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나나 김언호는 구속되지 않았는데, 이태복은 구속되었고, 강제 휴업권고는 세 회사 모두에게 요구되었고, 아리송했다.
몇 사람이 뛰어다니며 얻은 정보를 조각보 만들 듯 맞춰보니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운동권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책들을 모아 보니, 위의 세 출판사-광민사와 평민사와 한길사-의 책이 가장 많았다.
한 마디로 이 세 출판사는 운동권의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인 셈이다.
그러므로 강제로 휴업케 하는 게 좋겠다.
그러나 물의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진 휴업 형식을 취해 처리하자.
이렇게 되어서 총대는 문화공보부 문화국장이 매도록 한 것이고.
그리고 이 용렬한 모든 기획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인 이학봉이 주도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출판문화협회 임인규 회장이 당시 민정당 사무차장이던 이종찬(전 국회의원)에게 이 일의 부당함을 제기하였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이에 이종찬이 이학봉을 설득하여 없었던 일이 되었다.
▲ 이학봉 전 청와대 민정수석 |
그렇지만,
세 출판사에 대한 강제휴업 권고명령은 없었던 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았으니,
바로 이태복과 광민사의 문제였다.
끝내 이 부분은 풀어낼 수 없었다.
이태복은 이미 치안본부의 남영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만신창이 되어 있었으므로.
후일에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쳐 그를 끌고간 이른 바 요원들은 이태복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였다.
그들은 이태복에게 빨갱이니 공산주의자니 하며 무작정 불라고 했다.
그러나 빨갱이도 공산주의자도 아닌 이태복으로서는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태복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든 구타와 더욱 가혹해지는 고문 뿐이었다.
일방적으로 무방비 상태에서 맞고 맞고 또 맞으며 그들과 가히 사투를 벌이던 이태복은 견디다 못해 쓰러지며,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사람을 이렇게 패고 고문하는 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냐?"
그들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이에 이태복은 마침내 이렇게 말하게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라면 나는 차라리 공산주의를 택하겠다."
그때 도하 일간지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자생적 공산주의자' 이태복 등 검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자생적 공산주의'라는 말이 사용된 최초의 경우이다.
▲ '학림사건' 피해자들이 진실화해위의 재심권고 환영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왼쪽 두번째가 이태복 씨(전 보건복지부 장관)임. |
참다운 민주주의를 갈망하였으므로 억울하게도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불리며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감옥에서 억류 당해야 했던 이태복을 비롯한 그들이 바로 이른바 '학림사건'의 주인공들이다.
32년이 지난 오늘 그들은 무죄가 되었다. 애당초 무죄였으니 당연하다.
그럼에도,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애타게 부른 청년들을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킨 세력이 완전히 멸실되지 않은 가운데 그들의 무죄함이 천명된 것이 이채롭다. 천신만고 속에서도 역사는 옳은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이라고 믿어본다. 이와 동시에 이제는 제발 이 땅에서 이런 억울함만은 일어나지 않기 바란다. 정말 그래야만 한다. 거듭 대한민국의 시계가 거꾸러 돌지 않기를 간구한다. 이것이 이 졸문을 쓴 이유이다.
사족 하나. '자생적 공산주의자'는 잘못된 민주주의자들의 '작품'임을 꼭 기억하자.
출처 :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994&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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