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애송시(2).hwp
한국인의 애송시(2) 현대시 篇
01. 현대시의 해석과 방법
02. 현대시의 네 가지 유형 (김춘수, 『김춘수 사색사화집』)
(1) 전통 서정시의 계열
(2) 피지컬한 시의 계열
(3) 메시지가 강한 시의 계열
(4) 실험성이 강한 시의 계열-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03. 한국인의 애송시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분석과 감상] 꽃은 ‘꽃’이라는 〈이름〉 속에 있다. 그런 만큼 이 시는 다분히 추상적이다. ‘이름’은 존재의 부름이자, 그것에 대한 응답이다. 모든 이름에는 저마다의 ‘빛’과 ‘향기’와 ‘소리’가 있다. 꽃이라는 이름은 더욱 그렇다.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꽃은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꽃’만큼 인간(의 삶)을 심미적으로 표상하는 게 어디 또 있을까. 대비(명명 이전과 이후)의 효과와 통사 구조의 반복(‘~고 싶다’), 상징과 의미의 시적 차원 또한 이 시의 매력이다.
[Q&A] 연시(戀詩) 혹은 철학시. 의미 vs 눈짓: 시어의 적절성. ‘꽃’의 존재론적 의미, 언어와 사물의 관계 등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분석과 감상] 곡진(曲盡)한 데가 있다. 그것은 ‘죽는 날’, ‘한 점’, ‘괴로워하다’, ‘모든’ 등의 시어에서 찾아진다. 마음의 하늘(또는, 양심)을 믿고 의지하는 이는 부끄러움을 안다. 그 수치(羞恥)의 삶이야말로 동아시아, 특히 우리 민족 고유의 윤리와 사상, 정서의 토대가 아닐까. 더욱이 이 시는 그런 의식과 주제를 상상력의 차원에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 ‘하늘’과 ‘잎새’의 상상력-巨視에서 微視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과거→현재→미래] 시제와 [바람→별→별/바람]의 이미지 전개, ‘길’의 의미가 이 짧은 시행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생의 좌우명, 혹은 서장(序章)과도 같은 시.
[Q&A]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에 나타난 표현상의 문제. 미학과 윤리학. 시와 도(道): 道行之而成(도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며, 걸어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莊子) 등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분석과 감상] ‘자화상’이란 시제는 시인이나 작가라면 누구나 다루어 보고 싶은 주제다. 하지만 미당(未堂)의 이 시만큼 절실하고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그리 흔치 않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란 구절은 이제 우리 시에서 ‘금언(金言)’이 되고 있으며, 자신과 가계(家系)의 모든 것을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 천치와 죄인, 그 거리가 바로 시인의 피할 수 없는 삶이자 현실이다. 보들레르로 지목되는 ‘저주받은 시인’의 운명과 굴레는 미당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것을 위장하는 세련된 문화의 경직성에 비한다면, 서정은 야만의 표현이다. 서정은 주체의 분산을 의미한다. 서정의 진정한 가치는 ‘피’와 ‘진지함’, 그리고 ‘불꽃’이다. 삶의 결정적 순간이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의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서정시는 탄생한다. 서정적이 되는 것은 정신적 삶이 인간 본연의 리듬으로 진동할 때이다.”(에밀 시오랑, 『절망의 끝에서』). 한편, ‘이슬 vs 피’, ‘볕 vs 그늘’의 대립적 이미지 또한 이 시의 의미와 미감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Q&A] 이 시의 지배적 이미지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에서 줄친 부분은? 문학과 질병 등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搭)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분석과 감상] 자연과 사물은 도(道)의 근원이자, 관조와 관찰의 대상이다. 그랬을 때 허공과 고요 속에서 파문(波文)을 느끼고, 존재의 고유한 자취(흔적)를 본다. “검은 구름의 터진 틈”인 현(玄)의 얼굴을 본다. 그것은 오래된 나무와 이끼, 옛탑과 함께 알 수 없는 향기마저 발하고 있다. 침묵과 근원으로서 ‘말sagen’은 소리를 통해 노래로 발현되는 법. 마하무드라의 노래, 송가(頌歌)가 그렇지 않은가. 모름지기 노래는 모든 것을 감싸 안고 누미노제(numinose, 신성한 힘)를 지닌다. 그리고 가이없는 바다에 떨어지는 ‘해’는 누구의 시인가? 나는 지금 이 시간,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인가? 만남/이별, 존재/부재, 삶/죽음의 모순 관계를 미학적으로 드러낸 이 시는 서정시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Q&A]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해석의 차이-역사주의와 분석주의. 산문시의 미학과 특성 등
동천 /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분석과 감상] 이 시 또한 ‘겨울 하늘’이란 시적 공간과 배경을 통해 서정시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겨울) 하늘은 더 이상의 무(無)가 아니며, ‘새’와 ‘달’이 존재한다. 다가갈래야 다가갈 수 없는 임에 대한 연모의 정에 비하면, 세인들의 사랑이란 그것의 시늉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은 물리적 공간일 뿐 아니라, 윤리적/심리적 공간으로서 ‘마음의 하늘’이다. 그런가하면, ‘동지(冬至)’는 한해의 끝이자 시작이다. 사랑의 가치와 숭고함 또한 우리가 나아갈 시작이자 마지막 지점이 아닐까. 매서운 새의 눈빛마저도 비껴가는 사랑은 마음속 눈썹의 씨앗을 하늘에다 옮겨 심는 일이다. 이는 물론 마음의 정화(淨化)를 우선적으로 요청한다.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은 눈썹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진리의 표상에 속한다.
[Q&A] ‘매서운 새’, ‘동지(冬至)’의 의미. 서정주와 신라 정신. 시와 사이 등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분석과 감상] 사랑의 양가성을 노래한 시다. 하여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이별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더없는 사랑의 시다. 이 시를 일차적인 즐거움은 ‘말(言)’에 있다. 그런 만큼 성독(율독)이 필요하다. 음수(보)율, ‘~우리다’의 어미 반복, ‘즈려밟다’의 순수 고유어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통적/민중적 정서와 반어적 어법의 묘미도 그렇지만, 진달래꽃(빛)이 갖는 순수하고 수수한 멋은 우리 고유의 정서상 특기할 만하다. 사랑과 죽음(또는, 이별)의 주제와 정서를 이토록 리드미컬rhythmical하면서도 심플simple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여기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맑은 슬픔이 스며 있고, 〈춘향전〉처럼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으며, 〈아리랑〉처럼 아무리 노래 불러도 질리지 않는 그 무엇이 이 시에는 분명 있다.
[Q&A] 국민적 애송시의 이유? 사군자(四君子)와 진달래꽃. ‘素月’과 ‘(진)달래꽃’의 이미지 등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분석과 감상] 여기 비바람이 몰아치는 들판(벌판)에 한 사람이 있다. 말이 없다. 그는 ‘풀’과 ‘(비)바람’의 모습만 고요히 집중적으로 지켜볼 따름이다. 그리고는 마치 주문을 외듯 자신마저 신들린 상태로, 샤먼으로 울고 웃는다. 그것은 어쩌면 시와 시인의 원초적인 모습일는지 모른다. 시인이나 작가란 바로 그런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네오 샤먼neo-shaman’(임우기, 『길 위의 길』)에 다름아니다. ‘풀’과 ‘바람’의 대립적 관계와 의미가 주를 이루는 저간의 입장에서 이러한 해석은 상상력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마련이다. 바람은 풀에 반드시 역기능의 존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바람의 이미지와 상상력은 ‘풀-풀다’와 관련해 ‘해원(解寃)’ 과 상생의 의미망을 갖는다. 웃음 뒤의 울음, 울음 뒤의 웃음이 인생이라면, 진정한 웃음이란 울음으로 울음을 푸는 게 아닐까. 딴은 생의 근원적인 비애와 슬픔, 죽음 주제야말로 이 시의 비밀은 아닐까. 다시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반복이다.
[Q&A] ‘풀/바람’의 내포와 외연. 존재와 시-하이데거 관련. 전통의 현대적 계승 등
[더 읽을 거리]
무등차(無等茶) / 김현승
가을은
술 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묵화(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극지(極地)에서 / 이성복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왔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누가 울고 간다 /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 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고란 편지 / 이대흠
보고 잪다
말하려 하니
언 또랑 녹아내리는 듯
쩌어그
쩌어그 가슴 한 골짝이
짜르르 하다야
가시내야
이런 날엔 가시내야
강바닥 자갈에도
화색이 돈다는디, ......
신경희 사진 「귀소」
< 다음 주 강의 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