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의 법칙
성향숙
축구공만 한 어항에
바늘 끝보다 가는 비가 내리고
그 비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기도 한다는데
어항에 딱 어울리는 물풀 아래
맞춤한 집
환한 달빛을 받고
달빛만큼 부드러운 잠을 청하면서
섬세한 아침을 꿈꾼다는데
팔을 늘여 뻗어도
너에게 닿지 못하는 유리 벽
기차를 타고 달려도
결국 어항 속
어쩌다 나의 동선은
화분 속 뿌리처럼
얼기설기
마음은 미모사처럼 납작한 채
방향감각도
상상도 길을 잃은
어안렌즈에 갇혀
꿈이 뭐냐 물으면
꼭 그만큼의 기포를 내뿜고
사랑의 언어와
내 몸만큼의 이별과
감당할 만큼의 슬픔을
뻐끔뻐끔
내가 낳은 새끼손톱만 한 아이가
바늘 끝 울음으로 징징댄다
어항 하늘에 뜬 날개를 타고
탈출을 꿈꾸면서
외면의 실루엣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것은
곁눈질로 나를 훔쳐보겠다는 것
입은 일직선을 유지하겠다는 것
행거칩 뽑아 속주머니에 쑤셔 넣겠다는 것
코 푼 휴지를 쓰레기통에 롱슛 하겠다는 것
반쯤 돌린 옆얼굴엔
담배 연기 같은 미로와 넘기 힘든 벽의 질감이 있다
불러도 반만 돌아보는 네 얼굴 이해하긴 어려워
반만 미안해, 반만 사랑해
몸의 언어를 선호하는 네겐 언제나 말로는 불충분하지
네가 남자에 대해 말할 때
내가 여자에 대해 변명할 때 타인의 말을 빌려오고
그러다 세 명, 네 명이 되는 소란스런 침대
네가 바라보는 쪽은 얼음 나라
좋은 아침이야. 산뜻한 키스도 소용없어
한숨도 비명도 안 지르고 냉동이 되는 거울과 식탁에 앉기도 전 찬밥이 되는 슬픈 아침 인사와 엉뚱한 시간에 멈춰 선 벽시계와 너의 시선에 얼어붙은 가엾은 사물들
너는 다른 곳에 있다
꽃은 꽃의 고집으로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나무는 나무의 거만함으로 태양을 유혹하지
사소한 것만 생각하는 사소한 눈빛의 은밀함으로,
바깥 알레고리
공간들
몸을 이쪽저쪽 움직여 베란다 유리창에 바깥 풍경을 배치해 본다. 왼쪽 끝으로 202호를 배치하면 오른쪽으로 푸른 그늘이 쓱 들어오고 얼굴 없는 기분을 끌어온다. 벚나무를 오른쪽에 배치하면 상투적 불안은 희미해지고 은둔했던 태양이 고개를 든다. 보이는 풍경들의 기분을 닮는 사각의 무표정. 끝내주게 기분 좋은 출발은 아니지만 오늘의 시작이고 아침 기분에 맞는 음악을 거실에 건다. 매일 아침이 즐거운 포메라니안, 파사칼리아 리듬에 맞춰 솜뭉치처럼 종종종 거실로 주방으로 따라다닌다.
긴 책상과 TV가 한쪽 벽에 붙고 꽤 오래 바깥을 불러본 적 없는 TV 화면엔 단풍색의 격자무늬 천이 덮여있다. 침대와 옷가지 몇 개 지킴이로 남겨놓고 자기 영역이라 박박 우기는 얄궂은 이별과 언제나 문을 꼭 닫아걸고 어떤 미래를 설계하는지 모를 어항 속 물고기. 내 방은 가구처럼 큰 몸집이 버티고 있다. 그리하여 나와 나의 책상과 책들은 처음부터 어떤 중심에도 발 들이지 못했다.
계절들
주술처럼 내리던 긴 장마가 끝나면 나는 여름에서 가을로 출근한다. 출근만 있고 퇴근은 없는 일상의 껍질을 벗기고 여름의 방문을 열면 금방 단풍이다. 가을은 죽음을 예비한 계절을 위해 바스러질 껍데기이다. 일생 닿지 못하는 중심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순환선의 환승역처럼 잠깐씩 머뭇거리는 계절들의 표정이 숨 가쁘게 나를 스쳐갔다. 각 계절마다 내 안에 침투해 자리 잡은 몇 개 고정된 풍경들이 있다. 내 안에 터 잡은 아름다움일지라도 언어 바깥에선 풍경이 아니다. 나의 언어가 아니다. 내 안에서 곪아 터질 비존재일 뿐이다. 아니, 그 풍경들을 포함한 내 안과 바깥이 온전히 나다. 나는 부지런히 나를 바깥으로 파견하며 내 영역을 넓힌다.
이브 혹은 아담
창을 연다. 바깥이 쏟아져 들어온다. 건물들, 구름들, 나무와 꽃들, 익명의 사람들이 통제 없이 밀려온다. 매일 같은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바깥으로만 흘러가는 길, 내 시선은 하이힐 신은 노란 양산을 따라간다. 하이힐이 받쳐 든 노란 양산 위에 한입 베어 문 붉은 사과가 태양처럼 핑그르르 돈다. 어디에도 없는 반듯한 남자를 옆에 세우면 멋진 그림이 조직된다.
사람이 생략된 풍경은 휴머니티를 잃는다. 최초의 여자와 남자가 배치된 풍경엔 부족함이란 없다. 뱀과 사과가 모티프가 되어 여자를 완성한다. 내 시선이 붙잡지 못한 미지의 영역들과 사라진 존재들의 진정성, 시선에서 사라진 다정한 청춘의 모퉁이들. 사과 같은 엉덩이와 울퉁불퉁한 혈관의 팔뚝에게 낭만성이 부여된다. 풍경 한 모금 잔상처럼 남고 영혼은 사라진다. 언어 밖으로 지워진다. 죽어 시체가 된 풍경들이 언어 바깥에서 곪아 터진다. 썩은 시체들이 육화되어 풍경을 입는다.
그리고 시
시가 온다. 아니 도망간다. 나는 시를 쫓아 부재의 풍경을 헤맨다. 부재의 조각들을 긁어모아 레고 블록처럼 조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