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가
마울브론 신학교를 탈출하여 요양소를 전전하다 튀빙엔의 서점견습생으로 출발하여 그의 작가적 소망을 꿈꾸던 시기에 그의 우상으로서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또한 그의 삶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이다. 그러므로 헤세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니체의 철학사상이나 그가 헤세에게 끼친 문학적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다.
헤세가 니체를 알게 된 것이 일반적으로 헤세가 튀빙엔에 머무를 때(1896- 1899)라고 알려져 있지만 요셉 밀렉 Jeseph
Mileck은 그 시기를 그 보다 앞선 칼브 시기로 보고 있다.1) 여기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의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헤세가 좌절한 후 고향에 돌아와 낯에는 페롯 시계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독서에 열중할 때이다. 이 때
그는 “세계 문학의 절반”2)을 섭렵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가 주로 읽은 책은 문학작품, 예술, 언어, 철학에 관한
것들이다. 그가 읽은 책 중에 니체의 책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가 본격적으로 니체를 우상화하기 시작한 것은 바젤의
헤켄하우어 고서점 견습생으로 있을 때인데, 이 때 그는 니체의 사진을 두 장이나 하숙방의 벽에 붙여 놓고, 그의 글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니체에 대한 헤세의 언급을 살펴보면, 그는 1896 년 니체를 어느 정도 안다고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탁월하고 미학적인 태도가
거슬리지 않아서 그가 주는 고고한 기품을 즐긴다고 하였다. 특히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의 “힘 있는 언어적이고 시적인 천재성”3)이라고
했다. 헤세는 처음에 니체를 이해하는 것이 “흥미 있고 어려운 작업”4)으로 여겼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의 압박감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니체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시작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니체의 도덕 비판에 대해
동조적인데, “도덕은 몰락의 의지이며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5)이라는 글을 인용하고 있다.
헤세의 니체 탐닉은 튀빙엔을 떠나 바젤의 라이히 서점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계속되었다. 바젤에서는 니체를 위시하여 르네상스 문화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한 야콥 부르크하르트 Jacob Burckhardt, 미술가 아놀드 뵈크린 Arnold Bocklin이 그의 사상적 후견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899년 가을에 헤세는 니체의 작품(당시까지 출판된)과 액자에 넣은 뵈크린의 <죽음의 섬> 카피를 여행 가방에
넣고 바젤로 갔다. 그는 어느 때 보다도 바젤에서 니체에게 열중하였다.
헤세가 니체에 다시 몰두하게 된 것은 1914년인데, 그 동안 헤세는 처녀작 『페터카멘진트 Peter Camenzind』로 대성공을
거두어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여 가이엔호펜에서 은둔자적 전원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세 아이를 낳고 인도여행을 다녀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막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다시 니체에게서 “상당히 많은 새로운 흥분과 향락을, 무엇보다도 지고의 고통스러운 향락”6)을
느낀다고 했고, 또한 『반기독교인』에서 동양적인 것에 감명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7)
그러나 그 이후에는 헤세가 니체에 몰두했다는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헤세가 니체를 잊었다거나 그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초기 작품 『페터 카멘진트』에서 만년의 작품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수많은
평론, 서간 등에 이르기까지 니체가 쉴 새 없이 언급되고 있으며 작중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8) 랄프 프리드맨 Ralph Freedeman은
니체의 영향을 받은 “아주 특별한 방향”9)이 이미 초기 작품인 『페터 카멘진트』에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니체의 영향이 가장 강했을 때의 작품들, 예를 들어『데미안 Demian』,『짜라투스트라의 재래 Zarathustras
Wiederkehr』,『싯다르타 Siddhartha』,『클라인과 봐그너 Klein und Wagner』,『클링조르의 마지막 여름
Klingsors letzter Sommer』에는 특히 더 니체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데미안』에서 보면 주인공 징클레어는 니체와 함께
살고 같은 운명을 체험한다.10) 프리츠 슈트리히 Fritz Strich는 니체가 헤세에게 끼친 영향을 과소평가하여 니체가 단지 자기 자신 속에
겪었던 개성의 내적분열을 의식하는 데만 영향을 미쳤을 뿐이라고 말하지만,11) 사실에 있어서 니체는 괴테만큼이나 깊이 몰두케 하고, 끌리게 하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한 사람이었다.
[...] 니체를 제외하고 어느 다른 작가도 괴테같이 나를 그렇게 몰두케 하고, 그렇게 잡아끌고, 그렇게 고통을 주고, 그렇게
논쟁을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12)
만년의 작품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니체의 다른 이름인 프리츠 테굴라리우스 Fritz
Tegularius 역시 명인을 일깨워주고 그에게 영향을 준 “페로몬테 다음으로 가장 충직한 친구”13)였다. 그래서 밀렉은 “테굴라리우스는
니체에게 있어서 기념비이며, 크네히트와 테굴라리우스의 우정은 헤세와 니체의 관계의 문학적인 재현”14)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니체가 초기에 헤세에게 끼친 영향은 그의 창작 전반에 걸친 이정표가 되었으며, 헤세가 자기 자신의 길, 내면의 길을 그의 작품
세계의 주제로 삼은 것도 따지고 보면 니체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실스 마리에서 헤세에게 운명애의 목소리로 들려
왔다.15) 니체가 20 세기의 독일 작가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여 부르노 힐데브란트Bruno Hillebrand는 두 권으로 된『니체와
독일문학』을 펴냈고, 이 책에는 호프만슈탈 Hofmannsthal, 칼 슈테른 하임 Carl Sternheim, 토마스 만 Thomas
Mann, 로베르트 무질 Robert Musil, 고트프리드 밴 Gottfried Benn과 니체와의 영향관계를 소개했다.16)
니체가 헤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작품에서 니체의 흔적이 뚜렷이 찾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세와 니체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논문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헤세가 니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은 관심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니체의
사상은 난해하고 여러 가지로 뒤섞여 있어서 그의 사상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헤세도 니체의 사상이 너무
놀랄만한 것이어서 많은 문제점을 던져 준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때는 “유해한 학설이며 태도”17)로 일축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헤세는 니체의 외침과 용기에 힘입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모범으로 삼아 그의 어법과 문체로 독일
국민에게 고하는 계몽서인 『짜라투스트라의 재래』를 썼다.18)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헤세는 니체를 우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때론 그를
“새로운 예언자”19)로, 때론 “철학적인 거인”20)이자 “위대한 사고의 길을 걷는 작가”21)로 여기고 있으며 그의 저술은 “예술가적 경탄과
샘”22)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하였다.
본 논문은 헤세의 작품이 전적으로 니체의 영향 하에 쓰여졌다는 전제하에 그의 작품을 니체의 사상으로 해석해 내려는 시도로
쓰여 진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니체적인 사고라든지 니체적인 태도로 헤세를 조명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데미안』에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니체적인 해석으로 접근이 용이하다. 이 작품에 잠재된 이야기는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할 때의 이야기며 가치의 전도나 힘에의 의지나 흔히
‘초인(超人)’이라고 부르는 ‘위버멘쉬Ubermensch’의 사상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23)
특히 『짜라투스트라의 재래』에 있어서는 완전히 니체적인 것의 총체를 발견할 수 있다. 헤세 자신은 그의 작품이 니체의 같은 이름의
저작을 모방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24), 고트힐프 하프너는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이 작품이 니체의 글 같아서 “니체의 유고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믿을 것”25)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본 논문에서 다루려는 운명애는 니체의
운명애(運命愛)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니체
연구에 있어서의 어려움은 많다. 그의 이론은 모순이 많으며 그의 사상을 전달하는 개념도 난해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Ubermensch’를 정의할 때, ‘초인’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제기한다. ‘초인’을 힘과
연관짓거나, 능력에 있어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니체의 해석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래서 헤르베르트
라이헤르트 Herbert Reichert 같은 사람은 『데미안』에서 “초인을 절대적인 세계질서 속에서 융합 하려는
것”26)이라는 엉뚱한 해석이 나온다. 정동호는 ‘초인’이라는 말 대신에 ‘위버멘쉬’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27) ‘위버멘쉬’가 니체의 의미에 있어서 자연스럽고 소박한 인간, 이원론적 도덕과 가치관에서 자유로운 인간,
자기 관점을 가지고 자기 운명을 사랑하며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임을 안다면 이런 오류가 얼마나 니체 해석에 있어서 위험한 것인지를 알
것이다. 칼 아스퍼스도 니체 연구에 있어서의 어려움과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28) 니체의 “신”의 개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29)
본 논문에서는 너무 구체적으로 철학적인 접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필자의 능력 밖의 문제이며 또한 본 논문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II. 헤세와 니체의 공통점과 차이점
헤세와 니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시대적으로는 니체가 먼저 태어났지만, 그들이 처한 가족 환경과
정신적 분위기는 친화력을 갖게 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헤세가 니체를 우상으로 받아들인 것은 사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환경적인 면에 있어서
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두 사람의 정신 발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공통점이다. 그들은 탄생부터 교회, 믿음, 교리, 기독교적 세계관에 얽매인 일상과
사고를 강요받게 되었으며, 그 속에서 신음했다. 특히 그들의 가정은 경건주의의 엄격함과 폐쇄성의 울타리에 갇혀 있었으며, 그로인해 자유분방한
어린 영혼들은 그 속에서 어느 누구 보다도 고통을 겪었다. 그들의 부모는 완고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오로지 주님과 저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신앙으로 굳어진 사람들이었다. 헤세와 니체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자의식이 강했고, 그래서 어느 누구 보다도 그들을
둘러싼 종래의 전통과 도덕과 삶의 방식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가장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그들이 가장 반기독교적인 혁명을 일으킨 것도 바로
어린 시절의 가족 환경과 교육 때문이었다. 그들이 커서 도덕을 부정하고, 종래의 기독교적 목적론적 방향과 가치를 부정하고 철저히 반기독교적으로
변화된 것은 경건주의가 낳은 역기능적 결과이다.
두 사람은 또한 희랍어, 라틴어 등의 고전어에 대해 깊이가 있으며 고대 문헌에 대한 조예가 깊다. 헤세도 이미 고전어를 바탕으로
헤켄하우어 서점에서 고서적을 다루는 일에 종사하였고 니체는 고전문헌학 교수로 바젤대학에서 교수직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고전 문학과
철학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희랍의 문화를 동경하고 르네상스의 이상에 동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고전을 비롯하여 낭만주의
작가들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문학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특히 루소, 쇼펜하우어, 괴테, 노발리스, 횔덜린에
심취하였다.
니체나 헤세는 또 대중과 민중을 적대시하였으며, 그 보다는 개인과 개성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교육의 대중화, 대중매체를 통한 획일화, 모든 이념과 조직을 통한 개성의 상실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았다.30)
이런 경향은 헤세나 니체 모두 관점주의의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객관적이고 관습적인 것이 아닌 개개인의 관점과 개성에 따라 사물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 때문이다.31) 자기중심, 자아의
완성, 자기 내면의 길을 가는 개인화를 통해 인간은 홀로 설 수 있고 성숙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헤세와
니체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예언자적 작가이자 철학자라는 것이다. 니체 뿐만 아니라 헤세 역시 그 시대의 문명과 문화를
회의적인 관점으로 내다보았다. 헤세도 작가란 지진계와 같이 그 시대를 정확히 읽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면에 동참하고 예감을 갖고,
이상을 창조하고 꿈을 갖는 직능”32)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헤세와 니체는 사상, 종교, 도덕에 대해 개방적이며 어떠한 제약이나 경계를
긋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헤세가 이미 『싯다르타』에서 모든 종교는 아름답다고 했듯이 이 두 사람들은 기독교
이외에도 동양의 불교나 힌두교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있었고 어느 한 종교를 유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니체는 국가나 종족의 경계를 초월하여 세계 시민적인 사고를 가졌다.33) 니체는 더 나아가서 우수한 미래형 인간의
출현을 위해서 피를 섞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사고도 가졌다.34) 한편 헤세는 그의 가족을 가리켜 “국제적인 선교인의 공동체”35)라고 부르며
“경계보다 더 증오스러운 것은 없고, 경계선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36)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게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도덕의 경계를
허물어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헤세나 니체는 모두 도덕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과감히 타파해 버린 사람들이다. 특히 헤세에게 있어서
종래의 니체의 도덕 비판은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헤세가 니체를 주목하고 그의 추종자가 된 것은 다분히 그의 도덕파괴술 때문이었다.37)
기독교를 포함한 도덕 전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헤세는 니체가 간 길을 갔다. 『데미안』에서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극적인
전환이나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종래의 기독교 교리의 붕괴는 전적으로 니체에 힘입은 바가 크다. 니체를 통해서 헤세-징클레어는 비로서
니체-데미안으로 바뀔 수가 있었다.
니체의 도덕철학은 기독교 윤리체계의 혁명이며 이것을 통해 모든 가치와 기준이 바뀌었다. 선악이 전도되었고, 힘에의 의지가 표출되었으며, 의존적인 것에서부터 생명력 있고 활기찬 자기 자신으로
이르는 길이 마련된 것이다. 니체는 도덕 자체가 비도덕의 한 형태로 여기고 있으며 “도덕적인 현상은 없다. 단지 현상의 도덕적인 해석만 있을
뿐이다.”38)라고 했다.
헤세에게 영향을 미친 이런 가치를 전환시키는 도덕, 다시 말해 활기찬 삶의
도덕, 새 출발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도덕은 분명 헤세의 창작 초기부터 니체의 도덕철학에서 왔으며,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하여 지배하고 있다.
헤세와 니체는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은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서 사물을 대할 때 다분히 염세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의 논지는 창조보다는
파괴, 긍정보다는 부정에 더 무게가 실려 있으며, 미래에 대해 불안과 회의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헤세는 낙천주의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그가 어려움에 처했던 1895년의 한 편지에서도 이런 면모를 잘 알 수 있다.
나는 염세주의자가 아닙니다. [...] 내가 어두운 면, 말할 수 없는 비애, 전
사회계층의 잔혹함을 잘 볼 때면, 인류의 온 고뇌가 나를 사로잡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해결이나 이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실망을 하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습니다.39)
니체가 봐그너를 좋아한 반면 헤세가 모차르트를 좋아한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 속에는 삶에 대한 긍정과 명랑성이 넘치기 때문이다.
헤세는 인간 존재의 비극을 일깨워주지만 인간의 비극을 알게 해주고 인간 운명을 긍정하며
용감성과 명랑성을 뜻하는 고전 음악을 좋아한다.40)
1898에 헬레네 보이크트 Helene Voigt 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세는 니체의 시 「까마귀가 우네 Die Krahen
schreien」와 「가을 Der Herbst」등을 읽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다.41) 같은 가을을 노래해도 헤세의 시는 시적 감상을
나타내지만 어떤 염세적인 시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헤세와 니체는 선악의 문제에 있어서도 관점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헤세의 선악관에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요소가 담겨 있으며 밝고 어두운 세계,
허용된 세계와 금지된 세계 등의 두 세계가 하나로 조화를 이뤄 온전한 상태에 이르는 그런 대상이다. 그런데
니체에게 있어서
선악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개념이며, 이 개념은 윤리 도덕적이나 종교적 교리와는 다른 개념이다. 니체는
『반기독교인』에서 선이란 힘에의 의지, 힘의 느낌, 인간 자아 속의 힘을 높이는 것으로 보고 나약함에서 오는 것은 나쁜 것으로 보았다.42)
그래서 약한 자나 불구자는 멸망해야 하며 그렇게 되도록 돕는 것이 인간 사랑의 첫 째 가는 근본이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그는 생에 유익한 것, 생에 합당한 것은 선으로 보고, 생에 유해한 것, 생에 어긋나는 것은 악으로 보고
있다.43)
비록 『데미안』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헤세가 니체적인 카인의 편에 서지만 약자는 망해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헤세에게 몰락은 신생을 뜻하기 때문이다.44) 니체는 투쟁이나 개선의 과정을 통해 이 세계가 발전되어 나간다는 다윈주의의 신봉자이다.
그러나 헤세에게 있어서 약자는 오히려 보호의
대상이다. 『페터 카멘진트』에서 카멘진트가 불구 소년 보피 Bopi를 위해 희생한다든지,『유리알 유희』에서 주인공
크네히트가 최고의 명예인 명인의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버림받고 희망 없는 어린 티토 Tito를 위하여 죽는 것은 분명 니체적인 사고와는 다른
것이다. 헤세는 휴머니즘의
옹호자이다.
두 사람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자연관에서다. 자연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 친근한 개념인데, 헤세의 자연은 루소의 자연이나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신비적이고 순수한 자연이다. 헤세에게 현대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의 대안과 도피처로 자연이 주어졌다면, 니체에게 있어서 자연은 힘과 의지가 숨 쉬는 곳이다.
자연은 도피처, 안식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력 넘치는 삶의 현장, 힘이 지배하는 투쟁의 현장으로서의 자연이다. 도덕적 질서보다는 자연적,
물리적 질서만이 존재하는 그런 자연이다. 니체는 자연에서 인간 세계의 전형을 찾는다.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 지배하고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펼쳐지는 자연의 질서가 있는 곳이다.
III. 니체의 철학과 운명애
20세기 전환기는 니체의 시기이며 그는 20세기를 예감하며 이끌었고 지난 세기의 전통적인 것에 대해 여러 면에서 새롭게 문제를
제기했으며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니체는 “19세기에 살면서 19세기를 뛰어 넘은 몇 안 되는 사상가들 중 한 명”45)으로 여겨질 정도로
위대한 사상가라고 말 할 수 있다. 칼 야스퍼스도 “니체와 함께 철학한다는 것은 부단히 니체에 맞서서 스스로의 주장을 관철해 나가는
것”46)이라고 했고 그의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 전환기에는 니체 이외에도 칼 막스 Karl Marx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Siegmund Freud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으나 인류의 사고와 정신생활에 니체만큼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 준 사람도 드물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20세기 초에 발생한 모더니즘과 더불어 지금까지 서구사회를 이끌어 왔던 기독교의 기초를 뒤흔들었으며, 사유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옮겼고 더 나아가 객체보다는 주체, 외부보다는 내면세계로 시선을 돌리게
했으며 다른 어느 때 보다도 자아,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가 활발했던 때이다.
니체는 작가와 철학자로 볼 수 있는데47) 헤세가 니체에게 더 관심이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을 것이다. 니체가 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그가 소장하고 있었거나 그가 읽은 것을 기록해 놓은「니체 도서목록 Nietzsche Bibliothek」에서 조사해보면 알
수 있는데, 1863년부터 1869년 사이에 슐포르타 Schulpforta에서 빌려온 책과 1869년부터 1879년 사이에 바젤 도서관에서
빌려온 18개 분야의 책 가운데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48)
그러나 무엇보다도 니체는 사상가로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그는 28세 때인 1872년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을 시작으로 『비시대적 고찰 I,
II.』(1873),『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I, II.』(1878~1880)을 저술하였고 1879년에는 병이 악화되어 교수직도 그만두게
되는데, 헤세와 같이 두통과 눈의 통증을 겪으면서 또 원인불명의 마비증세를 동반한 정신장애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저작활동을
계속하여『서광』(1881),『즐거운 학문』(1880),『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1983),『선악의 피안』(1886),『도덕계보학
Geneologie der Moral』(1887),『우상의 황혼 Gotzen Dammerung』,『반기독교인』등의 글을 펴냈다. 광기에 사로잡혀
『이 사람을 보라』를 집필하기까지 그는 생명력이 넘치는 비판적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니체의 전 작품을 꾀 뚫는 주제로 하이데거는 5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 주제들은 근본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한다.49) 고전
문헌학 교수로 출발한 니체는 그의 사상의 실마리를 고대 희랍으로 눈을 돌려 인간의 정신생활을 되 집어 보는 데서 찾고 있다. 그는 그리스 신화
시대에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지만,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비참해졌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을 완전히 압박하고
굴복시켰으며 깊은 진창 같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 그것[기독교]은 [인간을] 파멸시키고, 파괴하며 마비시키고 취하게 만들려고
한다.50)
그래서 그는 기독교와 그 도덕적 허구를 비판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종전의 전통적 가치의 전도를 꾀했고, 신들의
종말과 위버멘쉬의 출현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51) 신의 공백을 메울 진정한 인간,
위버멘쉬는 “가치의 전도를 담당하고 힘에의 의지를 구현할 뿐만 아니라, 이 우주 어느 곳에도
기독교적인 최종 목적이 있을 수 없다는, 즉 목적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한 인간이며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한 형태인, 인간의 행위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하등의 고정된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영원히 회귀할 뿐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있는 인간”52)이다.
이 위버멘쉬는 따지고 보면 헤세의 모든 자아 완성적
인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의 수호자였던 신들의 죽음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는데, 이런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고집스럽게 자기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초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관찰해 볼 때 똑 같은 것이 되돌아오고, 그 안의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과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스토아 학파적인 기독교 우월주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출발하여, 파괴된 자아와 삶의 참 의미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니체의 운명애 사상은 니체의 전 철학을 응집해
놓은 중심 사상일 뿐만 아니라, 특히 헤세와 연관지어 고찰해 볼 때, 이 운명애 사상 역시 헤세의 중심 테마에 아주 가까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운명애 사상이 처음 나타난 곳은 『즐거운 학문』이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도 나오며 그 밖에도 그의 여러
저술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니체는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가 스스로 그의 운명을 알고 그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나의 정의는 앞으로도, 뒤로도, [그 것
이외에는] 영원히 다른 무엇도 갖기 원하지 않는 바로 운명애다.53)
운명애란 실제로 사는 삶 속에, 디오니소스적인 생의 축제 속에서 벌이는 삶에 대한
긍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부족하고 불행하고 만족스럽지 않다 하더라도 주어진 자기 삶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여 운명을 받아들일 때, 니힐리즘의 극한적 형식인 영원회귀를 극복하고 자아에 눈을 돌리고 이 현실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운명애는 “부정적인 것을 가치 전환하여 긍정적인 것으로, 병에서 삶의 자극제로 만드는 것”,54) 그러니까 운명애는 생의 철학자
니체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중심 테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어떻게 운명애를 가질 수 있는가?
니체의 사고에 의하면 우선 플라톤적 기독교 윤리를 벗어 버리고 관점주의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모든 인식은 인식주체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평가할 때 얻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진정한 운명애를 갖는다는
것이다. 운명을 아는 것, 끝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나 대가가 가는 길이다.55)
헤세도 또한 지혜의 최고의 목표가 운명을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체험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혜의 가장 최고의 목표는 결코 운명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끝까지 체험하고, 그 암시를 따르는 것이고, 그 인도와 자기
자신을 운명 속에서 긍정하는 것이다.56)
IV. 헤세 작품에서의 운명애
헤세는 니체의 운명애에 대하여 상당히 인상 깊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이것은 『데미안』에서 주인공 징클레어를 통하여 잘 나타난다.
니체-데미안은 헤세-징클레어의 가슴 속에 모든 가치의 전환을 위한 돌을 던졌다.57)
헤세의 『데미안』에서 주인공 징클레어는 니체가 말하는 전통적 교리의 파괴를
통해 각성하며 성장하고 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 나오는 인간 ‘정신의 세 변화에 관하여
Von den drei Verwandlungen’에 나타나는 사상을 『데미안』의 징클레어의 발전의 3단계에 적용시켜보면, 제1단계는 징클레어가 부모의 밑에서 낙타
같이 순종하며 기존의 윤리, 선악관을 지키다가, 제2단계에서는
데미안의 자극을 받아 사자 같은 용기와 의지로 가치의 전도를 꾀하며 크로머 징크스를 극복하게 되며,
마지막 제3단계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새로운 시작과 출발로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것을 알 수 있다.58)
헤세가 언제부터 구체적으로 니체적인 의미에 있어서 운명을 사랑했는가 하는 것, 다시 말해 자기 관점적인 인식과 가치전환으로
자기 자신의 길을 갔는가 하는 것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헤세는
그가 처한 고통의 책임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찾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고, 전 세계의 광기와 무질서를 자기 안에서 발견하였다고 토로하고
있다.59)
그가 내면으로의 길, 자기 자신으로의 길을 가라고
적극적으로 외친 것은 『짜라투스트라의 재래』에서이다. 이 책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운명을 사랑하고 자기의 길을 가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의 일은 우리의 운명을 인식하는 것이며 우리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그
쓰라림을 달콤함으로 바꾸고 고통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의 목표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듯이, 운명과 하나 되는
것이다.60)
헤세는 또한 작가의 사명도 “독자를 자기 자신을 더 잘 알도록 이끌고 자기 자신의
길과 운명과 용기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것”61)으로 보았다.
비록 니체가 기독교 전체에 대해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비판을 쏟아 붓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데, 그
이유도 따져보면 예수가 비교적 도덕에서 자유롭고 진정한 운명애를 가졌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반기독교인』에서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죽음을 진정한 운명애로
보았다. 그가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긍정하고, 온갖
모욕과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권리도 주장하지 않고 저항도 안 하며 오히려 그를 해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니체는
진정한 운명애를 발견했다.62)
헤세 역시 기독교에 대한 혐오와는 달리 인간 예수에 대해서는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헤세가 이해한 운명애는 자기의 것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그것을 간직하는 헤세의 ‘고집 Eigensinn’과도 같은 것이다. 많은 헤세 독자들은 『데미안』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회개도 안 하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도둑에게 카인의 표적을 붙여 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운명애의
관점에서 보면 이 것도 곧 이해가 된다. 비록 그가 도둑이지만 고집스럽게 자기의 길을
가고,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개성을 지킨 것은 니체의 운명애의 헤세적인 변형이다.
헤세는 많은 작품에서 주인공들을 통해서 운명을 사랑하는 인간상을
구현하고 있다. 또한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이 “자기 운명을 인식하여 사랑할 때까지 그의 길잡이 구실”63)을 한다.『페터 카멘진트』에서
주인공은 고향 니미콘을 떠나 도시에 가서 많은 체험을 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운명을 정확히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는 “물고기는 물에,
농부는 땅에 속해야 하며,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니미콘 출신의 카멘진트가 도시나 세계인이 될 수 없다는 것”64)을 확실히 깨닫고 고향에
머무른다. 『수레바퀴 아래서 Unterm Rad』의 한스나 『크눌프 Knulp』에서의 크눌프 모두 생에 애착을 느껴 구차스러운 삶을 계속하고 싶지 않아 자연의 품에 안긴다. 한스는 흐르는 물에, 크눌프는
계속 떨어져 쌓이는 눈 속에 운명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의 산 삶이 구차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들은 불평과 불만이 없다. 비난도 안 한다. 그들은
그냥 삶의 마지막 축제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중국적 관조 Chinesische Betrachtung」에 나타난
헤세의 운명애관을 보면 주인공들의 이런 운명애에 바탕을 둔 죽음을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의 운명을 사랑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어찌 긴 삶과
명예와 지위와 부를 추구하겠는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안에 평화를 간직한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들을 위협하고, 어떠한
것도 그들에게 적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그들의 운명을 지니는 사람들이다.65)
『대리석 공장 Die Marmorsage』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어서 온전히 그의 작품에 속하는 그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66)고 말하고 있다.
한 편으로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내면의 길을 가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인데, 이것 또한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헤세의 작품의 주제이다. 자기의 운명이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존재, 자기의 일, 자기가 가는 길이 소중함을 깨달은 자이다. 헤세는『데미안』에서 “모든 인간의 길은 자기
자신으로 이르는 길이며, 그 길의 시도이며 암시”67)라고 선언하고 있다. 인간이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선을 밖에서부터 안으로 돌려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 정상적이다.
『싯다르타』에서 주인공 싯다르타는 유명한 스승의 가르침과 길을 따르다 자기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각성이었고 완성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각성의 장’에 싯다르타의 내면의 독백을 보게 된다.
내가 빠져나오려 하고 극복하려는 것이 바로 이 자아였다. [...] 나는
이제 이 이상 더 파편 조각 속에서 비밀을 발견하기 위하여 내 자신을 죽이고 토막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서 나를 배울 것이며,
나의 제자가 되고, 나를, 싯다르타의 비밀을 알려고 하겠다.68)
V. 나오는 말
헤세가 작가로 출발하려는 튀빙엔 시절에 그에게 최초이자 가장 강렬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니체이다. 헤세는 니체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사상적으로도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헤세와 니체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니체의 주요
사상(영원회귀,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가치의 전도, 허무주의 등)이 구체적으로 헤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그 흔적이 그의 작품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상당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헤세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니체의
운명애도 사실은 니체의 중요한 사상과 그 근저에서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이런 점을 헤세의 작품 속에서도 읽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니체의 운명애와 헤세의 운명애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왜 헤세 문학에 있어서 니체의 운명애 사상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는 내면세계와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길이 니체의 사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헤세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헤세 연구가들은 헤세의 이런 경향을 지금까지는 주로 낭만주의나
신비주의나 동양의 노장 사상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들 사상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사상이 니체의 운명애
사상이다. 지금까지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학문적 접근이 거의 없었다.
니체의 운명애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헤세 문학이 지향하는 것, 내면의 길,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길에 대한 근거가 분명해 진다. 운명애는 내면세계이며, 자기의 길을 가는 것 또한, 그것이 투쟁이든 체념에서 나온 것이든,
운명애이다. 헤세의 대부분의 소설 작품이 성장 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데, 주인공들은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은 후 완성에 이른다. 완성에 이르게 된 것은 주인공들이 그들의 운명을
인식하고 부터이다. 주인공들의 성장 과정은 그들의 운명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운명을 인식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고 다른 사람의 길보다는 자기 자신의 길을 갈 때 가능하다. 니체의 운명애 속에서 완성된 위버멘쉬와 헤세의 자아 완성의 주인공들은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사람이다. 헤세 작품의 완성자들은 그러므로 모두 운명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완성을 상징하는 에바 부인이 카인의 표적을 지녔듯이
헤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니체의 운명애 사상 속에 완성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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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sung
Hesse und Nietzsche I - Mit
Schwerpunkt auf amor fati
Hong, Soon-Kil (Mokwon Uni)
Mit der
Tatsache, daß Hesse wahrend seiner Tubinger Zeit von Nietzsche einen starken
Einfluß aus sein Leben und Schaffen bakam, hat die vorliegende Abhandlung ihren
Ansatz. Nietzsche war fur Hesse zum Teil “ein neuer Prophet”, “ein
philosophischer Gigant”, aber auch zum Teil “ein großer, Denkwege gehender
Dichter.”
Nietzsche und Hesse haben ein gleiches Millieu und eine
gleiche Erziehung hinter sich; sie kommen aus einer pietischtischer Familie, als
Pastorensohne litten sie unter dem Druck der kirchlichen Zucht und Ordnung. Sie
waren und blieben Rebellen gegen das Christentum und unternahmen die Umwertung
aller Werte, sei es in der Moral oder in den herkommlichen Sitten und
Gebrauchen. Sie waren alle der lateinischen sowie der griechen Sprache machtig
und beschaftigten sich mit der altertumskundigen Arbeit. Sie zogen das
Gedankengut der Renaissance vor und hatten einen pessimistischen Ausblick gegen
die Kultur sowie Zivilisation der Zeit. Trotz all dieser Verwandtschaft teilt
sich ihre Ansicht in einigen Punkten, namlich in Dualitatsgedanken, im
Naturgedanken u. a. Nietzsche ist Anhanger des Darwinismus, wahrend Hesse zum
Humanismus steht.
Nach Heidegger sind die Hauptgedanken Nietzsches
folgenderweise zu formulieren: 1. die ewige Wiederkehr des Gleichen 2. der
Ubermensch 3. die Umwertung aller Werte 4. der Nihilismus 5. der Wille zur
Macht, die sich im Grunde genommen alle miteinander verknupfen.
Nach
Nietzsche seien die Gotter tod und es lebe der Ubermensch. Aber er solle den
Nihilismus mit Hilfe des amor fati uberwinden. Er solle einerseits ein Mann von
Mut und Wille sein, andererseits sein Schicksal lieben und seinen Weg
eigenstandig gehen. Diese Grundgedanken Nietzsches befinden sich im Werk Hesses
in der Formel amor fati. Der Eigensinnige, wie Hesse und seine Helden, deckt
sich zu dem Bild des Ubermenschen Nietzsches.
Man findet leicht die
Quelle des Grundthemas Hesses, den Weg zu sich selber, nach innen, im
Zusammenhang mit den Grundgedanken Nietzsches. Das Motiv amor fati wohnt im
Werke Hesses inne.
Nicht nur der Held Sinclair, sondern auch Klein, in
Klein und Wagner, laßt sich fallen, gibt sich einverstanden mit dem Ende seines
Lebens. Die anderen Helden wie Camenzind, Siddhartha, Goldmund, Leo, Knecht u.
a. haben nicht die Absicht, ihr Schicksal zu andern. Sie erkennen ihr Schicksal
an und lieben es ohne verneinende Gebarde. Das nennt Hesse Vollendung, und
diesen Vollendeten nennt Nietzsche den Ubermensch.
첫댓글 사상가 중 젤 좋아했던 분

'니체'
지금은 기억의 저 구석탱이에 자리잡구 계십니당^^ 꿈꾸는 자님, 덕분에 지난 날의 기억이 꿈틀거립니당^^감사함을 날리며

다시 읽구 싶으데 눈이 아퍼서리..프린트해서 다시 읽어 보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