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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연판장 불발
김교식 원작
강문석 옮김
라일락 향기가 코끝에 스치는 서울의 봄날. 장충동고개를 넘어 약수동 쪽으로 걸어가던 장교는 큰길에서 골목길을 꺾어들더니 조촐한 일식 단층집으로 들어섰다. 5월 8일 저녁이었다.
“어서 오게, 김 중령.”
집주인인 김종필이 미소로 손님을 맞았다.
“다들 왔어?”
김 중령이라고 불리는 장교는 안쪽을 기웃거리면서 군화 끈을 풀었다.
“다들 모였네.”
집안에는 군복차림의 장교들이 빙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야, 벌써들 왔군!”
김 중령은 방안으로 들어서며 모자를 벗어들고 소리쳤다. 집주인 김종필까지 합쳐 모두 여덟 명의 장교들이 모였다. 잠시 후 술상이 들어왔고 술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몹시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정군整軍에 뜻을 두고 얘기할 적에는 한 60명가량 모였었지?”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마주앉아 있던 장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맞아! 처음에는 한 60명 가까이 되더니 차츰 그 숫자가 줄어들어 오늘은 여덟 명밖에 안 되는군.”
“장가간 친구들이 많고 처자식 때문에 아무래도 몸을 사리는 거겠지.”
누군가가 씁쓰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몸을 사릴 걸 사려야지. 4.19 때 학생들이 무엇 때문에 피를 흘렸겠어? 부정부패를 참다 못해서 젊음을 바쳐 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피 흘린 거 아냐? 그러면 응당 부정부패는 쓰러져야지. 우리 군도 이대로 어물정하고 넘어갈 수는 없잖아?”
늦게 온 김 중령이 차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지난 번 3.15부정선거 때에 군의 지도층에 있는 장성들이 군부대를 두루 다니면서 이 박사와 이기붕 씨를 정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독려를 하지 않았어? 장교라면 어느 누구도 이 같은 사실은 다 아는데 4.19가 지난 지금까지도 버젓이 큰소릴 친다는 건 말도 안 돼.”
이러면서 술상을 치는 장교도 있었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우리가 앞장서서 우리 군의 부정부패를 바로 잡아야 돼.”
“물론, 우리가 앞장설 수밖에 없어. 바로 나중에 어떠한 처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린 물러서면 안 되는 거야.”
모두들 술잔을 들며 평소 가슴속에 품고 있던 정군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에 모인 장교들은 김종필 길재호 옥창호 신윤창 김형욱 석창희 오상균 최준명 이렇게 8명의 중령들이었다. 모두가 육사 8기생들이요, 육군본부에 몸을 담고 있는 장교들이었다.
“에… 너무 흥분만 하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씩 신중히 계획하고 검토해나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집주인이며 이 8명의 장교 중에서는 비교적 정군운동을 맨 먼저 부르짖고 나섰던 김종필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동안 우리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4.19 이후의 군의 정화문제를 논의해 왔고 그래서 육본 안에서도 많은 영관급 장교들이 산발적이나마 정군문제를 논의할 수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개별적이며 산발적으로 정군문제를 거론할 게 아니라 뭔가 조직적이고도 계획적인 방법으로 밀고 나가야할 때가 된 것 같아. 그래서 오늘 저녁에 이렇게 모이자고 한 걸세.”
김종필은 차근차근 말을 이어나갔다.
“… 내 생각에는 말야. 오늘 이처럼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까 우리가 뜻하던 정군에 관한 연판장을 국방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한쪽에서 누군가가 이런 제의를 했다. 다분히 다혈질적인 김형욱이었다.
“이봐, 연판장을 작성하기에 앞서 현재 우리 군에서 물러나야할 장성들이 누구누구인지부터 가려내는 게 어때?”
그날 저녁의 이 비밀회합체를 ‘88구락부’라고 정한 건 육사 8기 8명의 모임이기 때문이었다. 88구락부는 정군의 방향으로 첫째, 3.15부정선거를 방조한 군의 고위급장성들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것과 둘째, 부정으로 축재한 장성들을 물러나게 해야 하고 셋째, 무능하고 파렴치한 장성과 장교를 제거하고 넷째, 파벌조성의 모든 요인을 제거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케 하고 다섯째, 군인의 처우를 개선할 것으로 정하는데 합의했다. 그러고 그들은 정군운동의 구심점을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에게 두는 데도 합의를 보았다. 이것이 주로 김종필 중령에 의해서 결론지어진 것이었다.
“그러면 국방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내는 연판장은 김종필 중령에게 맡기는 게 어떻겠나?”
누군가가 이렇게 제의했으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좋아! 그럼 우선 내가 초안을 잡지. 그러고 나서 여럿이 돌려보고 검토한 다음 채택하기로 하지.”
결정은 쉽게 났다. 이제 그들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논의해오던 정군문제를 비로소 본궤도에 올려놓기 시작한 셈이다.
“많은 전우들이 6.25 때 전사했어.”
술기운 탓이었을까. 갑자기 누군가가 울먹이며 과거를 회상하자,
“많이들 죽었지. 우리가 임관된 지 불과 1년 만에 6.25가 터졌잖아?”
“그래. 6.25가 터지기 직전에 우린 중위 계급장을 달았고 일선 소대장 아니면 중대 부관으로 동란을 맞았으니까….”
“우리 8기생 가운데 몸에 총을 한번 이상 안 맞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걸세.”
“수석으로 졸업했던 이헌영이도 대위 때 전사했지 아마?”
“그렇지. 그때 육사교장이셨던 김홍일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던 친구 아냐?
“아까운 전우들이 많았어. 그 전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친구들 몫까지 기어코 성취시켜야 돼.”
8명의 젊은 장교들은 다시 한 번 결심을 다졌다.
“헌데 우리가 정군을 위해서 연판장을 돌리고 행동을 취하는데 있어서 그래도 우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어떤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이런 제의를 내놓았다.
“뒷받침해 줄 힘? 그런 게 뭐가 필요해? 우리 여덟 명이 뜻을 합해서 밀고 나가는 게 바로 힘이지. 그것 말고 또 무슨 힘이 필요해?”
다혈질적인 김형욱이 내뱉듯이 말했다.
“아니, 그건 김 중령이 잘 모르는 소리야. 뭔가를 일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우리를 이해해주는 뒤 배경이 있어야해.”
한쪽에서는 이런 주장도 나왔다.
“사실 4,19 때에 내려진 비상계엄령이 아직도 발효 중이잖아? 계엄령 하에서 군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정군을 들고 나와 연판장을 낸다 어쩐다 하는 것도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게 아니겠어?”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줄곧 말이 없던 최준명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모든 시선은 일시에 최준명에게로 쏠렸다.
“지금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인 조재미 장군 알지? 그 양반은 전에 내가 모시던 분이거든.”
“오, 그래?”
“6.25동란 때 같은 부대에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비교적 가까운 사이야.”
“조 장군은 원래 강직하고 일의 옳고 그른 걸 분명히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잖아?”
“내가 직접 모셔봐서 알지만 사심이 없고 정의감도 있는 분이야. 그러니 내가 한번 그 양반에게 우리의 정군의지를 말씀드려 볼까?”
“좋아! 조재미 장군만 우리를 이해해준다면 얼마나 든든하겠나? 안 그래?”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일의 성사를 위해서는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있는 조재미 장군의 이해와 막강한 힘의 뒷받침이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오늘 우리의 이 비밀모임을 정리해보도록 하지. 첫째, 우리의 뜻인 정군방향을 글로 써서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제출한다. 둘째, 건의문은 내가 작성하고 그걸 여럿이서 다시 검토한 다음에 확정짓는다. 그러고 우리가 제시하는 정군의 기본방향은 아까 채택된 다섯 가지 항목으로 결정한다. 셋째, 우리의 정군작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성사시키기 위해 조재미 장군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도록 한다. 이러면 됐지?”
김종필은 말을 마치면서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다.
“참 한 가지 더.‘
옥창호가 의견을 달았다.
“우리의 이 정군작업은 어디까지나 우리 군의 정예화를 위해서 취하는 매우 막중한 일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동지가 필요하다고 봐. 따라서 육본 안에 있는 우리 8기생 동지들은 물론, 기수는 비록 다르더라도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젊은 장교들을 포섭하자 이거야.”
“그거 좋은 얘기로군. 지금 그렇잖아도 우리 육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서클이랄 수 있는 모임들이 많이 있어. 그 나름대로 정군문제를 얘기하고 있잖아? 따라서 차제에 이걸 일원화시키는 것도 시급한 문제야.”
이들 8명은 이날 저녁 많은 얘길 나누었다. 그들은 울분을 토하며 우국지정에 열띤 정열을 분출시키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일부 군장성급의 비리를 규탄하고 부정과 부패를 개탄하는 심정으로 이같이 울분을 터뜨렸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더딘 진급에 대한 불만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휴전이 될 무렵에 대부분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나 휴전 후 7년이나 지난 지금 겨우 중령에 머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휴전되면서 군은 팽창되었으나 장교 소모의 속도가 둔화되면서 진급 정체현상이 불가피해진데 원인이 있었다. 즉 8기생들은 소위 임관에서부터 소령이 되기까지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휴전이 된 후 7년 동안 겨우 한 계급밖에 진급이 되지 않았으니 이런 측면에서도 그들은 뭔가 욕구불만 같은 게 있었다.
최준명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 조재미 장군을 찾은 것은 이런 모임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최 중령, 오랜만이군! 헌데 웬일이지?”
조재미는 평소에 아끼던 최준명의 방문을 받고 기뻐했다. 몇 마디의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난 다음 최준명은 88구락부에서 벌이고 있는 정군운동과 며칠 전의 모임에서 정군에 관한 연판장을 국방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내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끝을 맺었다.
“저희들의 이번 전군운동을 각하께서도 적극 밀어주십시오.”
“그건 말도 안 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조재미가 소리치듯 말했다.
“최 중령, 최 중령은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지? 4.19 학생의거가 일어나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났고 이기붕 일가가 자살한 게 바로 엊그제 일이야. 10년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고 지금 나라 안팎이 뒤숭숭해 있지 않느냐구?”
조재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과도정부가 출범했다고는 하나 이제 얼마 안 된 까닭으로 계엄을 풀지 못하고 있질 않아? 따라서 우리 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질서를 유지해가면서 이 어려운 고비에 대처해야할 시기인데 군의 책임 있는 장교들이 정군이다 뭐다 하는 걸 벌이다니? 이건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물론 최 중령이 말하는 뜻이나 젊은 장교들이 들고 나온 정군문제를 전적으로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란 뜻이야. 내 말 알아듣겠나? 아무쪼록 자중하도록.”
그러나 최준명은 조재미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정군의 불가피성과 정군의 목적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를 거듭 설명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조재미의 뜻을 돌릴 수는 없었다. 조재미는 우선 시기가 나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고 아무리 명분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대사에는 시기가 있는 법인데 지금은 그 시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 중령, 돌아가서 정군을 추진하는 동료들을 간곡히 말리게나. 좀 더 기다렸다가 나라 안팎이 조용해지면 그때 거론하자 말야.”
결국 최준명은 혹을 떼러 갔다가 도리어 혹을 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조재미 장군을 설득해 보려고 찾아갔으나 오히려 설득당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던 것이다. 하기는 서울지구 계업사령관의 입장으로서는 어쩌면 최준명이 보는 시각과는 다른 측면에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갑자기 물러났고 자유당 정권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그 여파라고나 할까. 그 시절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는 각종 데모들이 연일 잇따라 일어났다. 부산에서는 혁신세력집결 촉진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동해에서는 무장간첩이 나타나 교전 끝에 2명이 사살되고 2명이 생포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다시 또 부산지역에서는 만여 명 학생들이 국회를 해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서울과 부산에서는 교도관들까지 데모를 벌이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크고 작은 사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던 때라 조재미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이 최준명의 요청을 거절하였다는 것도 이해가 될 법한 일이었다.
☞ 功七過三이라는 말이 있다. 잘한 업적 7할과 못한 과오 3할을 축약한 말로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자였던 등샤오핑이 전임자인 마오쩌둥을 평가하면서 사용한 말이다. 덩샤오핑의 공칠과삼은 현대 중국인들이 마오쩌둥을 평가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를 공칠과삼으로 내려서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취할지 선택하는 덩샤오핑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을 수용하는 중국인들의 의식도 알 수가 있다. 세월이 흘러 5.16군사혁명 56돌을 앞두고 있지만 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여전히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감행한 세력을 반역으로 보는 쪽과 오늘의 대한민국 번영은 5.16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쪽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공칠과삼'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배경에는 박정희는 독재자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박정희 평가의 어두운 면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功七過三은 알려진 대로 모택동에 대한 등소평의 평가다. 등소평은 중국 '문화혁명' 기간 모택동에게 숙청되어 시골에서 하방생활을 해야 했다. 일종의 귀향 살이었다. 그의 아들은 문화혁명의 광풍중에 자살시도를 하다 실패하고 평생 불구자로 살았다. 등소평의 입장에서 모택동은 정적 이상의 혐오스러운 존재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모택동에게 '부관참시'의 정치적 보복을 하는 대신 '과오를 교훈삼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역사의 한 장면을 중국역사 발전의 토대로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의 한 장을 넘길 수 있었고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로 향할 수 있었다. 스스로가 극복하기 힘든 처지였으므로 국민들과 정적의 공감까지도 이끌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지금의 중국발전을 일굴 수 있었다.
박정희의 과오를 없던 것으로 하자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역사적 맥락에서 제대로 평가하고 역사의 한 장을 넘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과거의 온갖 오욕을 무시로 현실에 끌어들여 정쟁의 소재로 삼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계속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다. 박정희의 독재는 역사적 맥락을 떠나 보편적 가치의 측면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 시대의 일부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번영을 박정희를 빼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어찌 보면 박정희를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도 그를 기반으로 한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보장된 적이 있었던가. 공칠과삼은 박정희에게 적용되기 딱 좋은 평가다. 이는 박정희를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스스로를 긍정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에 대한 좋은 해법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 제목 <연판장 사건>도 전체의 뜻과 부합되는 <整軍 연판장 불발>로 바꿨음을 밝혀둔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