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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처음 보는 장면, 처음 겪는 일, 처음 나누는 대화인데, 일찍이 경험했던 것이라고 느끼는 때가 있다. 이런 현상을 '기시감'이라고 한다. 프랑스어이다. 처음 와본 거리를 걷다가 문득 ‘언젠가 여기에 와본 적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는데, 처음 경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일컬어 데자뷰라고 부른다. 데자뷰는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already seen’, 한자로는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한다. 1900년 프랑스의 의학자 플로랑스 아르노(Florance Arnaud)가 처음 이러한 현상을 규정하였고, 이후 초능력 현상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던 에밀 보아락(Emile Boirac, 1851∼1917)이 처음 데자뷰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데자뷰는, 그 체험을 「잘 알고 있다」라고 하는 감각뿐만아니라, 「확실히 본 기억이 있지만, 언제, 어디에서의 것인가 기억할 수 없다」라는 위화감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같은 체험을 꿈으로 보았다고 하는 기억 바로 그것을 체험과 동시에 만들어 내는 예도 많다. 그 경우 확고한 감각으로서 꿈을 꾸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주 예지몽과 혼동되는 경우도 있다. 즉, 데자뷰 현상과 꿈이라는 기억이 겹쳐져서 예지몽이라고 하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데자뷰는정신분열증의 발병의 초기나, 측두입간질의 증상으로서 많이 나타날 수 있지만, 건전한 성인에게 발생하는경우도 드물지 않게있는 일반적인 감각이다. 일반대학생의 72%가 데자뷰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하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일부 심령학계에서는 이를 전생의 기억이나 예지력 같은 초능력현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현대의학에서는 '지각 장애'의 일종으로 파악한다. 과거에 매우 보고 싶어 했던 것, 누구한테인가 생생하게 들은 것 따위가 잠재해있다가 어떤 찰나 현실에 겹쳐지는 '기억의 착오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경험했으니 자신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재생되는 수도 있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완벽하게 같지는 않다고 한다. 기시감은 정상인이나 비정상인 모두에게 가능하다. 정상인의 기시감은 대개 몸이 피곤하거나 술을 마셔 정신 통제능력이 떨어졌을 경우 처럼 신체의 조절기능이 저하됐을 때 나타난다. 하지만 정상인은 그것이 착각임을 금방 깨닫고, 빈도도 잦지 않다.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은 여기서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반면 병적인 경우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가져온다. 떠오르는 모양이나 색깔, 강도는 정상인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좀더 자주 나타나고, 다른 사고장애나 환청, 망상을 동반하기 쉽다. 주로 신경증, 정신분열, 간질환자들이 잘 겪는다. 기시감은 감기가 걸리면 콧물과 기침이 나오듯 하나의 증상일 뿐이므로, 그 자체를 독립적인 질환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기시감과 반대로 잘 알고 있는 장소를 처음 보는 장소로 여기는 현상은 '미시감'이라고 한다.
오늘 여러분은 혹시 길거리에 가다가 과거에 본 것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은 없는가?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데, 정치인들을 보면서 과거에 본 사람을 떠올리는 것도 그러한 현상의 하나가 아닐까? 조금도 더 나아간 것 같지 않은 정치판을 보면서 데자부를 보는 것 같다는 말이다. 반민주적인 것들이 사라지고 진보만 할 것이라 믿은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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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늘아래 새로운것은 없다" 라는 말처럼 어쩌면 인간은 시대의 차이일 뿐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
은 것 같습니다. 때문에 교수님과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현 정치상황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엽기적인 일
들을 통해 피곤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교수님! 다소 웃기는 예시이기는 합니다만 인간 진화의 과정을 보면 인간이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에서 호모사
피엔스로 진화하기까지 약 700만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인간이 나라를 건국하고 정부를 수립하여 정치를 시작
하고 법률을 규정하는 등의 지적 진화는 1만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살펴보았을 때 눈앞의 상황은 변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인류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인류의 지적
발전은 광속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 상황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을 우울
한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닌 인류의 발전과도기로 보는 것이 바람직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수님께서 쓰신 글에는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 망했어.,,이민을 추천한다” 라는 말은 없지만 이 글과 최근에 교수
님께서 기재하신 글을 보면 현실에 대한 피곤함이 느껴집니다.
물론 저같은 인간따위가 교수님의 심경에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이글을 쓰는 이유는 교수님께서 느끼시는 현실의 피곤함이 누적되어 비관주의로 발전할
것이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교수님! 다른 학생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이 학교로부터, 교수님으로부터 단순하게 법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희망
과 열정을 같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현실의 피곤함은 뒤로 하시고 교수님의 수업과 논문하나하나가 인간의 지적 진화에 공헌한다 라는 그런 인류애
(???웃기는 단어 선택입니다)적인 관점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더 좋은 관점을 가지고 있으시겠지만요)
헛소리가 길었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눈앞의 현실에 변화가 없다고 비관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갑자기 내가 비관론자가 된 것 같다만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나는 낙관주의자다. 그리고 끝없이 현실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그것이 더 나은 발전의 기초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교수님! 저의 글쓰기 실력 부족으로 교수님께 오해를 드렸군요. 제가 싼 글을 읽어보니 교수님을 비관론자로 보는듯한 뉘앙스가 다분하군요 다시 정정합니다. 교수님 께서 비관론자라고 글을 쓴것이 아닌 교수님께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취지로 글을 쓴건데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런 뜻이 아니였습니다.
글을 급하게 쓰다보니 글의 취지에 빗나갔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