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사 답사기)
"내일은 경흥사 답사를 가니까 선생님께서 차를 갖고 오세요."
교실 조교가 전화를 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내일이면 달리 하는 일도 없으니까 바람도 쏘일 겸 참가키로 했다. 조교가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차를 갖고 오라는 걸 보아서는 동양미술사를 전공하면 의무적으로 답사를 다녀와야 하는 듯싶다. 수업의 한 과정이라 싶었다.
경흥사는 경산에서 청도쪽으로 치우쳐 있는 산의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유월의 풍광은 더 없이 맑고 싱그러웠다.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사찰이라선지 적막에 묻힌 절의 분위기는 깊은 산사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 절을 답사한 이유는 모셔져 있는 부처님의 조성시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 민심이 많이 피폐해졌다. 더구나 전란을 겪은 민심은 이 세상의 저 너머에 있을 또 하나의 세상을 동경하였다. 사찰건립이 유행처럼 번져나가면서 불상 건립도 왕성했다. 그때 건립한 불상이므로 조선 후기 양식을 추출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주지 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절일을 하는 보살님이 법당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열심히 불상의 사진을 찍었다. 옷의 주름이든지, 신체의 비례 등에서 양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불상의 양식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석사 과정 신입생들은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학부 때의 전공이 불교미술과 다른 학생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불교미술에 관해서는 백지에 가까운 학생이 많았다. 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에게 신입생에게 불상에 관해서 대강이나마 공부하는 방법을 이야기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자꾸 예전에 병원에서 수련을 받던 생각이 났다. 그때도 교수님은 회진 때 몇 마디 말씀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환자를 진료하는 실질적인 기법들은 선배한테 배웠다. 답사 때에 교수가 같이 나가지 않을 때는 그렇게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문예미학으로 하였다는 장선생은 불교미술이 너무 생소하다고 했다. 내가 기초이나마 설명을 해주겠다고 하였더니 고마워했다. 이왕이면 신입생도 들어보면 좋겠다 싶었다.
"손의 모양을 수인이라고 하며---"
장선생만 열심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저네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약간은 씁쓸하였다.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인 백승균 교수님을 만난 것은 민학회 답사 때와 시민강좌 때였다. 민학회 답사 때에 시골 마을을 찾아가면 허름한 차림의 지방 사학자란 분들이 그 고장의 역사 이야기를 해준다. 솔직히 말해서 학문적인 논리성은 거의 없고, 전해오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것을 역사라고 설명한다. 나는 귀담아 듣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곤 했다. 그러나 백교수님은 강사가 아무리 무명인이라도 정말 열심히 경청했다. 처음에는 지식수준이 낮은 평범한 할아버지쯤으로 생각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철학을 하시는 교수님으로 계명대학에서 목요철학세미나를 처음 개설하신 분이었다. 나는 크게 깨우침을 얻었다. 학문을 하는 자세는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장선생만 내 차를 탔다. 석사 과정을 다른 대학에서 마친 탓에 우리학교가 무척 낯설다고 하였다.
"선생님 요즘 젊은 세대들은 너무 쌀쌀맞지요."
"하기야 요즘 세대들은 우리가 젊었을 적보다는 좀 이기적인 것 같네요."
"저도 그래요---, 학교의 학사 일정을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인사도 않고."
장선생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내 딸보다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면서 그 정도의 불편함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첫 학기 때는 학사 일정을 몰라서 수강신청도 제 때에 하지 못했다. 우리 때와 달리 모든 일정이 컴푸터로 처리된다. 컴푸터 다루기가 미숙한 내가 일학기 때 수강신청을 잘못 하여서, 2학기 때에 몰아서 하느라 고생깨나 했다.
"선생님이 설명할 때도 걔들은 무관심하데요. 저들과는 이해관계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만약에 교수님이 나와서 한 마디 하였다면 그럴까요?"
"그야 내게는 들을 게 없으니까 그랬지요. 장선생이 너무 모른다고 하길래 내가 말한건데."
나도 얼버무리고 말았다.
"걔들도 나처럼 백지이던데 뭘."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경산에 있는 그의 아파트 앞에 차가 닿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오면서 공부를 왜 하는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문득 민학회 강좌 때마다 앞자리에서 열심히 강의를 들으시던 백교수님이 떠올랐다. 그래 공부란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는 건데, 그래서 공부를 하겠다고 노년에 대학원에 다니는데, 젊은이에게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되지. 우리와는 세대도 다르고, 그럼, 암 그렇고 말고.
억지를 부려도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낡아지게 한다지만 아무래도 공부법은 우리 세대가 옳았다 싶다.
첫댓글 이동민선생님, 연세 들어도 학구적 열정 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