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야화> 공혜왕후 한씨
한명회 딸로 성종의 첫번째 왕비 유순한 성품에 효심 깊었다 전해져
시조부 세조한테도 높은 평가받아 병환으로 19세 때 승하
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1456~1474년) 한씨는 한명회의 딸로 언니 장순왕후(章順王后)에 이어
두번째로 왕비에 오른 인물이다.
그만큼 세조에서 성종 대에 이르는 시기 한명회의 정치적 위상이 막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딸로, 한명회와 여흥 민씨 사이에서 1456년 한양의 연화방에서 태어났다.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살 연하의 잘산군과 혼인했다.
<세조실록> 1467년(세조 13년) 1월12일 기록을 보면
“잘산군이 영의정 한명회의 딸을 영응대군 이염(李琰)의 집에서 친영(親迎)하였다”고 적혀 있다.
잘산군과 친영의식이 포함된 혼례식을 행했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이때 세조가 손자며느리를 높이 평가한 것이 주목된다.
“세조께서 우리 주상 전하의 배필을 가리실 때에 뜻에 맞을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께서 덕용(德容)을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셨다”는 기록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2년 후 그녀에게는 큰 행운이 찾아왔다.
예종 사후 제안대군, 월산군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있던 남편 잘산군이 왕위에 올라 성종이 된 것이다.
<성종실록>의 총서에는 성종이 왕자 시절에 형 월산군과 더불어 궁궐에서 글을 읽고 있을 때,
“마침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고, 환관이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으니,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넘어지며
기운이 쭉 빠지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왕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언어와 행동이 침착하여 평상시와 다름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성종이 일찍부터 왕의 재목임을 나타내고 있지만, 성종이 왕이 된 것에는 한명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장순왕후가 세자빈의 지위에서 사망한 만큼 왕의 장인으로서의 프리미엄을 맘껏 행사하지 못했던 한명회로서는
공혜왕후가 왕비가 됨으로써 그 한(恨)을 풀게 된다.
성종의 즉위와 동시에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던 공혜왕후는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됐는데,
그녀의 품성에 대해서는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덕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유순하고 고요한 성품을 타고났다”고
<성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정희왕후·소혜왕후·안순왕후 세 대비를 극진한 효도로 받들어 진기한 것을 구해 올리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착한 품성의 소유자이면서 왕실 어른을 모시는 데도 빈틈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성종이 어린 후궁을 가까이하는 과정에서는
마음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실록>에는 “후궁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너그럽고 대범하여 중도(中道)에 맞으셨으며….
(중략)
왕후께서는 장차 후궁을 뽑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의복을 극히 정밀하게 장만해두었다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내리시고,
복식과 완구를 끊임없이 내려주면서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셨다”고 설명했다.
이는 후궁에 대한 투기가 없음은 물론이고 그녀들에게 최대한 은혜를 베풀어준 정황을 기록한 것이다.
공혜왕후 승하 후에 성종의 계비가 된 폐비 윤씨가 후궁에 대한 투기가 대단했던 상황과 묘하게 대비되는 장면이다.
착한 품성으로 남편을 잘 내조하고 대비들에 대한 효심도 대단했던 공혜왕후의 생은 길지 않았다.
1473년 7월 병환으로 친정인 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성종도 하루걸러 이곳에 거동할 정도로 왕비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그녀는 병이 회복돼 다시 궁궐로 돌아왔으나 병환이 다시 커졌고, 다음해 3월에는 다시 구현전(求賢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구현전에는 성종과 대비들이 날마다 거동해 왕비의 쾌차를 빌었지만 공혜왕후는 1474년 4월15일 1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최후의 순간에도 왕실의 어른들과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함을 한탄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왕후께서 훙서(薨逝)하기에 임박하여, 한명회와 부인이 여러 날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명하여 밥을 먹게 하고,
더불어 결별하여 이르기를, ‘죽고 사는 데에는 천명이 있으니 영영 삼전(三殿)을 여의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하시고 드디어 돌아가셨다.”
그녀의 능은 경기 파주에 이미 조성돼 있던 친정언니 장순왕후의 공릉(恭陵) 동쪽에 조성됐고, 순릉(順陵)이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