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의 삼우제가 지난지 10일이 지났다.
집사람이 장모님유물을 정리하기위해 처재와 친정에 들렸을 때
친정집 거실에 있는 증조부(휘 이석병)의 칙명(勅命) 액자를 촬영해 오라고 했다.
3년전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말씀을 빌리자면, (내가 집사람과 결혼후 2년즘 후) 1990년 경 종손집에서 칙명
(勅命) 이 발견 되어 조부께서 "이조참판을 지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집사람은 어렸을 적 서천 종손집에 놀러가면 하인을 5명 거느린 한옥 대저택에서 지냈는데, 종손며느님의 오랜 병수발과 종손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한다.
또한 내가 결혼 당시 생존해 계셨던 집사람 할머니께서도 참봉집 따님으로 1930년초 한 집안의 막내며느리로 시집 왔으며, 시아버지님(휘 이석병)께서 어떤 벼슬을 지냈는지는 몰랐고, 다만 모함으로 불명예 퇴임하셨는데 구체적인 벼슬을 알리지 않으셨다고 했다.
장인어른 형님은 기독교인이라 장인어른은 둘째 아들임에도 부친의 제사를 지냈고,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댁에서 직접 모셨다. 또한 시골(서천)에 사는 형제들을 서울로 불러 형님의 집장만 뿐아니라, 형제들의 대학진학과 직장까지 알선해 주셨다고 한다.
집사람 본관이 전주이씨고 내가 포은조 20대후손이라 우리 집안에서는 전주이씨와 결혼이 금기시 되었는데, 내 결혼 당시, 부모님께서 "배우자감으로 괜찮으면 500년도 지난 일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냐" 며 집사람과의 결혼을 승인해 주셨다. 양 집안의 역사가 그러하니 장인어른 께서도 굳이 우리한테 가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삼가하는 분위기 였다.
이러한 얘기를 들었던터라 이번 장모님 께서 돌아가신후 칙명에 나온내용을 구체적으로 해석해 볼 겸 집사람에게 액자촬영을 부탁했고, 촬영한 사진을 친구 '이상익'에 보내어 번역을 부탁했다.
번역내용은 아래와 같다.
좌측 : 칙명 숙부인 이씨 봉 정부인자
-광무5년(1901년)6월6일 - 가선대부 이석병처 의법전승전
숙부인 이씨를 정부인에 봉(封)함.
가선대부 이석병의 아내에게 법령에 의해(依法) 이 칙명(典)으로써 임금의 뜻을 전(傳)함.
우측 : 통정이석병위 가선대부이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자
- 광무6년5월5일 (1902.5.5) -
통정대부 이석병을 가선대부이조참판과 동지의금부사 겸직으로 임명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의금부에 속한 종 2품의 벼슬. 의금부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을 맡아하던 관청이다.
위 사실을 종합하면 집사람 증조부 (휘 이석병)께서는
구한말(1897년경?) 대한제국시대에 이조참판으로 재직하시다가
1901년 부인이 숙부인(종3품)께서 정부인(종2품)으로 임명되시고,
본인은 다음해 1902년 동지의금부사(종2품)로 겸직 명을 받았다.
당시의 집사람 증조부께서 활동하던 시기의 역사적인 주요사건은
1894. 동학란 진압과 갑오경장 개혁
1895.3. 김홍집 내각 단행 의정부를 개편하여 內閣이라하고, 내각 총리대신과 대신으로 구성
1895.4.17.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1896.12. 아관파천 (친러노선 진행) ,내각이라는 이름이 의정부로 되돌아감, 내각총리대신도 議政으로 되돌림
1897.8.19.(광무원년) 대한제국이 선포, 중앙정치기구 개편 (議政府에 의정, 참정, 국내부 대신각1인, 내부,외부,탁지부,군부,법무,학부,노상공부 대신각 1인, 찬정5인, 참찬1인)
1904년 10월, 일본이 고문정치, 관제이정소를 설치하여 대한제국 정부조직개편 (내각총리대신도 의정으로 바뀜)
1904. 9.4.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1905.11.17.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1907. 議政이름이 내각으로 다시 바뀌고 1910년 경술국치이후 폐지
추정컨데 대한제국이 선포되어 관직개편이 이루어지기전인 1897년까지 이조참판을 역임하시다 1902년에 수사기관인 의금부수장으로 겸직명을 받으셨고, 그 이후 을사조약전 관직에서 물러나신것으로 추정된다.
종2품의 수산기관장으로 겸직발령을 받은것으로 봐서 유능하신 분으로 추정되나, 그당시 시대상이 외세압력에 의한 행정기구 개편과 이에따른 어수선한 국내정세로 상당히 힘든격무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특이한 점은 1897년 대한 중앙정치기구가 개편되어 종전의 판서, 참판의 관직명이 '대신'과 '찬정'으로 대처되었는데 1902년 고종 칙명에는 이조참판이 나오는 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평이하게 지낸것으로 봐서 일제때 도움을 받지 않았음을 짐작한다. 그런 정황을 감안한다면 집사람 증조부께서는 조선시대 마지막 참판을 지내셨고, 을사조약 이전에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추정된다.
집사람 할머니께서는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되었다고 하셨는데, 그 사유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당시 왕족과 고위관료들간에 이권다툼이 극심했던점과 어수선한 정국을 책임져야 하는 지위에 계시다 국치를 당한 상황에서 '조선의 고위직에 있었다'고 얘기하기 부끄러우셨을 것이다.
양반의 도리와 가문을 중시여기던 나의 조부께서 참판댁 집안과 혼례를 치렀다면 흐믓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부께서는 1896년에 태어 나셔서 내가 중학교 3학년때 1974년 78세에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