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에서 나와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갔다. 이 기념관은 2007년에 개관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2014년에 경상북도의 기념관으로 승격하고, 확장 공사를 거쳐 2017년 6월 30일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유교문화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잘 알 수 있는 곳이었다.
독립관에는 1894년부터 1945년 조국 광복 때까지 51년간 펼쳐진 경북 사람들의 국내외 국립운동이 담겨 있다.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국채보상운동, 자정순국, 만주지역 항일투쟁, 6·10 만세운동, 의열투쟁, 한국광복군 등 경북 사람들의 쉼 없는 항일투쟁과 관련 유물이 소개되어 있는데, 유교와 선비문화를 중심으로 삼다보니 의병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어 총체적인 균형감각에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열관에는 안동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전통마을의 항일투쟁을 한 눈에 볼수 있도록 한 전시실과 영상실, 체험교육실 등이 있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관장님이 직접 기념관을 소개해주셨다. 김희곤 관장님은 경북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경북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해 깊이 연구한 분이다.
선생님의 뒷편으로 '목숨던져 일제에 맞선 자정순국자'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자정순국자'라 함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일투쟁의 의지를 보여주신 분이라고 했다. 경북지방에 가장 많은 자정순국자가 있었다고 한다. 유교의 영향인가?
경술국치 이후 경북사람들의 만주망명이 줄을 이었는데, 1911년에만 해도 2,500명이 넘었고, 1930년대까지 수천명이나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자치단체를 만들고 학교와 병영을 세우는 일이었다. 구미의 임은허씨, 상주의 진주강씨, 성주의 성산이씨, 안동의 고성이씨, 의성김씨, 전주류씨, 진성이씨, 풍산류씨, 홍해배씨, 영덕의 무안박씨, 함양박씨, 영양의 한양조씨, 울진의 경주이씨, 평해황씨 등 만주로 이주한 문중들은 아마도 이곳은 유학자 집안이었겠다.
영상실에서 영상 한 편을 관람했다. 경술국치 이후 애국계몽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택한 만주로의 망명길. 바로 앞시간에 들렸던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선생만 해도 가족과 친인척이 모두 함께 서간도로 갔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과 벌판을 건너고 그곳에서의 혹독한 생활을 견디고, 결의에 찬 신흥무관학교의 훈련모습 등... 보는 내내 가슴이 시리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방식도, 독립운동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으로 나타난 실력양성운동을 한편으로 하고,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사회주의사상단체, 학생운동 등 사회운동이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일어났다. 새로운 주체의 성장이었다.
3 ·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고, 국경을 넘어 국내로 들어와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10월의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1921년 4월까지 간도의 한국인마을을 대상으로 방화, 약탈을 일삼고 한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름하여 간도참변.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고, 항일활동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 간도참변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더 북쪽으로 올라가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확대되었다.(지도에서 녹색은 1910년대, 붉은 색은 1920년 간도참변 이후 활동지역이다.)
또한 지도 오른쪽 아래로 '중국에서 활약한 독립장 이상 서훈자 및 분야별 대표'의 이름과 사진이 있어 더욱 실감이 났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인 남자현 지사가 여성으로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제2의 3.1운동이라 불리는 6.10 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을 맞이하여 장례행렬을 보려고 거리로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솟아올랐고, 이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3.1운동 이후 주춤하고 있던 항일투쟁의 불길이 다시 솟아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 바로 경북 안동 가일출신인 권오설 선생이다. 조선공산당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냈다. 선생은 조선공산당 산하 '6.10 운동 투쟁지도 특별위원회'의 총책임자로서 6.10 만세 운동을 조직하다가 6월 7일 검거되었는데,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1930년 4월 17일 옥사하였다.
6.10만세운동은 공산당 지도부의 구속으로 대규모의 투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이때부터 각자가 가진 생각이 달랐지만 함께 연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던 시도로서 의의가 크며, 실제로 만세운동 이듬 해인 1927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결합하여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를 조직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가운데 전시되어 있는 관은 권오설 선생의 시신을 담았던 철제관.
권오설 선생은 193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는데, 일제는 가족들에게 시신을 바로 넘겨주지 않고, 관에다 납땜을 하고 장례 자체를 치르지 못하게 방해하였다고 한다. 존경받는 청년 독립운동가였던지라 장례식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 것을 우려해서일 것이라고. 결국 마을공동묘지에 급하게 묻어야 했다고.
그간 권오설 선생의 관을 철로 봉했다는 것이 소문으로 있었는데,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2008년에 후손들이 이장을 위해 묘를 열었을 때 녹슨 철로 뒤덮힌 이 관이 발견되어 사실로 드러났다고 한다. 이런 사실 하나 확인하는데, 거의 80여년이 다 되는 시간이 걸렸다니...
일제 강점기에 많은 지사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현실사회주의와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선 이후,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철저히 배척되고 역사의 기록에서 지워졌다. 그동안 권오설 선생의 고향인 안동 가일마을 출신의 많은 분들(특히 권씨문중의)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동안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도 좌익이라는 굴레를 씌워 온갖 시달림을 당해야 했는데, 많은 분들이 고향인 안동을 떠나 대구로 나가 살고 있다고 한다. 권오설 선생의 양자인 권대용 선생님(아래 사진 가운데 은빛순례단 조끼를 입은 분)도 그 중 한 분으로 안동을 떠나 대구로 나가 살고 있다. 권대용 선생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숨죽여 살 것을 강요당했던 그 긴 세월이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났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곳은 영화 <박열>의 실제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박열과 옥중결혼한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가 재판을 받는 모습을 재현해놓은 곳이다. 경북 문경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유학을 했으나 3.1만세운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다. 노동과 학업을 함께 해야 하는 고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일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사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하던 중 가네코 후미코를 만났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정부와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검속을 통해 일본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들을 학살하거나 검거하면서 민심을 막아내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도 체포되었다. 죄목은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테러를 하려고 계획했다는 것. (다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자결(타살이라는 설도 있다.)하였고, 박열은 22년 2개월의 수감생활 끝에 1945년 10월 석방되었다.)
해방 이후 반공주의를 표방하고, 도쿄에서 활동하고, 김구선생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기도 했다. 일본에서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는 모임에 가담했으나 내부갈등으로 그만 두었고 이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고, 1974년 평양에서 72세로 죽었다.
김희곤 관장님의 말씀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본래 아나키스트들은 정부문서에 굳이 자신이 결혼했다는 것을 올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박열과 후미코는 혼인신고를 했다. 왜 그랬을까. 박열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은 죽는다고 해도 가족이 있으니 그들이 시신을 인수할 거다. 그러나 후미코는 그냥 공동묘지에 묻히고 말 거다. 그래서 혼인신고를 했다. 죽어서도 함께 묻히고 싶다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가네코 후미코의 묘는 경북 문경에 있는 박열 선생의 선산에 있고, 박열 선생의 묘는 평양 애국열사능에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 왼쪽에 안경을 쓴 이는 한국인을 변론했던 후세 다츠치. 2004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애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은빛순례단에 함께 하시는 분들은 어찌나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지... 존경스럽다. _()_
김희곤 관장님의 열정적인 해설, 안동지역 순례자들의 지극한 경청 속에서 경상북도 독립운동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관장님의 이야기를 다 적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독립운동기념관을 관람하면서 이념과 사상이 달라 서로 갈등하면서도 자주독립이라는 목표 아래 함께 손잡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가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해방 이후 분단정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반목과 대립의 세월, 고통의 나락에 빠져 허덕이는 삶을 어떻게 함께 사는 삶으로 변화시킬 것인가가 과제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은 남북평화시대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돌아보게 하는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은 어떤 나라를 꿈꾸며 목숨을 바치었을까.
그 마음과 삶을 생각하면서 다함께 외쳤다. 한반도 평화, 피어라!
기념관 관람을 마친 후,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긴 시간을 갖지는 못했지만, 이부영 은빛님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8.15해방 이후 미소양국이 남쪽과 북쪽을 분할점령하였고, 그들의 세계분할구도와 더불어 국내외 정치세력들이 분열되어갔다."면서 해방 이후 미소공동위, 이승만의 정읍발언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저는 독립운동 유적지에 가면 늘 생각하는 게 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목숨바쳐 가며 구하고자 했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나된 나라가 아니었을까. 만약 해방 전후 역사에서 좌우합작운동이나 남북협상운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시기 역사를 무엇이라고 썼겠는가. 미국과 소련이 준비하는 분할구도에 맞춰 그냥 분단을 했다,라고 쓸 것인가."
"은빛순례운동은 어떤 의미로 보면 해방 이후 완성되지 못한 독립의 꿈을 제대로 실현해보자는 운동이다. 머리털 허연 늙은이들이 남북분단의 아픔과 더불어 이렇게 계급, 계층, 종교적으로 나뉘어서 대립과 분열의 싸움을 계속 하는 것에 책임을 느끼고, 이제 미래세대에게는 더 이상 그런 나라를 물려주지 말자는 바람이 담겨있다. 이후 우리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것도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는 것도 그런 바람으로 이어져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희생자가 얼마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치명적인 전쟁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켜야한다는 명제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 아직도 북측과 전쟁을 해서라도 멸망시켜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답답하다.
우스개 소리로 문재인 정권이 똘똘 말아서 대한민국을 북에게 팔아넘기려한다는 주장이 노년층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쌀값이 오르는 것도 현정권이 몰래 북에게 쌀을 보내서 그렇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눈 감지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자. 문재인 대통령이 남쪽에서 대통령을 지내고 있는데 대통령 자리를 왜 내놓겠는가.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이 일부 국민을 현혹하고 있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일부 인사들은 나라와 국민으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받고 지도층으로 살아왔다. 국민 대다수는 지난 70여년 동안 전쟁위협 공포 아래 살아오다가 최근 남북이 평화공존으로, 핵폐기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들은 이를 가로막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현실은 저기 앞서 가고 있는데 철지난 낡은 이념으로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분들과 진지하게 토론해야 한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와서 은빛순례 대화를 가지는 것도 그 필요성을 알리려는 뜻이 있다. 부디 이 한반도평화를 지키는 일에 함께 나서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