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방 편 품(方便品)
‘방편품’은 열여섯 번째인 ‘여래수량품’과 더불어, 예로부터 <법화경>의 커다란 중심을 이루고 있는 장(章)이라 하여 왔습니다. 특히 이품은 적문(迹門)의 기둥이라 불리고 있는데, <법화경> 전반의 설법 가운데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방편의 ‘방’이라는 글자는 사전을 살펴보면 ‘정사각형, 그리고 [바른]것’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편’이라는 것은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방편이라는 것은 ‘바른 수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거짓도 방편’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조금씩 왜곡되어 온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본래는 ‘그 사람, 그 상황에 걸맞은 교화의 수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확실하게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품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랜 명상(三昧)에 들어 계셨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점차로 삼매를 마치시자, 그 누구의 질문도 기다리지 않으시고 사리불(舍利弗)을 이야기의 상대(對告衆)로 하여 설법을 시작하셨습니다.
우선 석존께서는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매우 깊고도 미묘한 것이라서, 이 우주의 근본적인 진리를 남김없이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 근본 진리는 너무나도 깊고도 멀어서 성문(학습주의 수행자)과 벽지불(연각, 다시 말해 체험주의 수행자)은 도저히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러한 사람들의 이해력(根機)에 알맞도록 각가지 가르침으로 나누어 설해 밝힘(方便)으로써, 사람들이 조금은 구제되기도 했지만 그 가르침 속에 있는 참뜻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말씀하신 석존께서는 웬일인지 입을 다물고 마십니다. 한동안 조용히 계시던 석존께서는 재차 입을 여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만두자, 사리불이여! 이를 설명하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가 성취한 진리란, 오직 부처님과 깨친 이만이 모든 법의 참 모습을 알기 때문이다.
성취한(깨친) 진리(十如是)라는 것은 이 세상의 온갖 존재와 현상의 참 모습으로서,
이른바 이 세상의 온갖 존재와 현상에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모습(相)이 있고,(如是相)
저마다 가지고 있는 성질(性)이 있으며,(如是性)
저마다 가지고 있는 바탕(體)이 있고,(如是體)
저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力)이 있으며,(如是力)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작용(作, 에너지의 작용)이 있고(如是作)
저마다 가지고 있는 원인(因)과(如是因)
저마다 가지고 있는 조건(緣)에 의해(如是緣)
생긴 천차만별한 결과(果)이며(如是果)
저마다 가지고 있는 영향(報)에 의한 것으로서,(如是報)
이러한 변화는 단 하나의 우주 진리에 근원을 둔 것으로, 그 실제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즉 모습(相)에서부터 영향(報)에 이르기까지를 파헤치면(本末究竟)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성이기 때문에’ 평등(等)한 것이다.-(如是本末究竟等)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듣고 있던 사람들은 너무나 어려워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따름 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석존께서는 지금까지 설해 오신 방편의 가르침(각각의 사람과 경우에 알맞은 적절한 가르침)은 결국 그와 같은 부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며 방편이라는 것도 매우 훌륭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되니 더욱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의 최고의 진리에 관해 설하시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열등한 방편의 가르침도 찬탄하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두 가지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혼란스러워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이때 견딜 수 없던 사리불이 이에 관해 질문을 하자, 석존께서는 ‘그것을 설명하면, 도리어 많은 사람들이 의혹에 사로잡힐 터이니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고 하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끈질긴 사리불의 세 번씩이나 거절당했지만 계속 집요하게 간청합니다. 이를 삼지삼청(三止三請)이라고 합니다.
석존께서는 처음부터 이 법을 설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의 질문도 기다리지 않고 설법을 시작하셨던 것으로, 이러한 망설임을 보이신 것은 사실상 사람들이 꼭 들어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리불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일동이 모두 마음속으로 각오를 한 것을 보시게 되자, 드디어 설법을 시작하려고 하셨는데 웬일인지 그 자리에 있던 5천명의 청중들이 갑작스럽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퇴장을 하고 말았습니다. 석존께서는 한참 동안 그 광경를 바라다보실 뿐 그들을 말리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물러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신 후 다시 설법을 시작하셨습니다.(이를 오천기거(五千起去)라고 합니다)
그 설법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오직 하나의 중대한 목적’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이를 “일대사인연”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평등한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부처님의 지혜에 모든 사람들이 눈뜨도록(開)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부처님의 경지로 인도한다.’하고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설해지기 때문에 가르침의 진리에 여러 가지의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부처님이 방편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분별하여 가르치게 된 것도 모두 다 이러한 목적에 귀일(歸一)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기필코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을 해야 될 시기가 온 것이다. 알겠는가? 여러분이 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한다면 누구든지 부처님이 될 수 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이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거짓된 것은 결코 아니다. 여러 가지 방편의 가르침이, 눈앞에 닥친 것에 대해 다만 잠정적으로 사람들을 일시적인 제도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목적인 부처님의 지혜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불탑(佛塔)에 경배하며 한 마디 “나무불(南無佛)” 하고 소리 내여 염했거나, 혹은 어린애가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부처님의 그림을 장난삼아 그렸더라도 그것은 모두 다 부처가 되는 연(緣)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한낱 부질없는 일조차도 역시 최고 진리의 길, 즉 ‘부처가 되는 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방편이라고 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따라서 ‘방편 곧 진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까지 내가 무상의 진리에 바탕을 두고 설해온 “연기의 가르침”을 비롯한 갖가지 방편의 가르침을 순박하게 듣고 청정한 마음이 되어 있는 여러분은 반드시 ’부처가 되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모두가 보살이다. 이 진실을 깨닫고 그에 대해 커다란 기쁨을 가지게 되면, 여러분은 미구(未久)에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 라고 부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방편품’의 설법을 끝마쳤습니다.
이와 같이 이번시간에는 방편품의 대략적인 줄거리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다음시간에는 십여시, 일대사인연, 개시오입, 일불승, 그리고 일념삼천에 대하여 좀더 깊이 있는 연구를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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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