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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유대인
롬 2:17-24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17-24 / [율법과 유대인] 여러분 유대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자기들에게만 주셨기 때문에 자기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무 문제가 없고, 자기들은 또 하나님의 특별한 친구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8)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배웠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낼 줄 알고 그 중에서도 자신은 옳은 것만을 좋아하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19) 그 사람은 또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야말로 눈먼 사람의 길잡이며, 어둠 속에서 길 잃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등불이라고 믿습니다. 20) 그리고 모든 지식과 진리로 가득 찬 하나님의 율법을 다 알고 있으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어린아이처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자신합니다. 21) 그렇다면 왜 그런 사람이 남은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남더러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자신은 도둑질을 합니까? 22) 남더러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자신은 간음을 합니까? 우상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자신은 돈을 신처럼 받들고 있습니까? 23)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왜 그 율법을 어겨 하나님의 명예를 욕되게 합니까? 24) ㄱ) `너희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방한다'고 한 성경의 말씀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ㄱ. 70인역 사52:5)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형식화되고 교만해져 율법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들 중에서 욕을 먹습니다.
스스로 믿으니 (17-20)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우월감과 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율법과 하나님을 자랑하는 그들의 교만과 위선의 무익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분별하고, 맹인의 길을 인도하고, 어둠에 있는 자의 빛으로 자처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 어리석은 자의 교사,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출 19:6)으로서의 특권은 주장하면서 언약을 지켜야 할 책임은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그들이 존경하는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마 3:9).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1-24)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간음을 행하였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도둑질을 하였습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로마 황제의 상이 새겨진 로마 동전을 우상 숭배라며 사용하지 않거나 로마의 독수리 휘장을 혐오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따라 우상을 가증하다고 하면서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모순을 범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사야가 했던 예언을 바울이 인용한 말입니다(사 52:5). 이사야 당시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실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밝혀 그들의 우월감과 자만이 근거 없는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적용: 유대인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로부터 욕을 먹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될 수도 있고, 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노자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스스로 충분한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을 도우러 나서는 것은 마치 허수아비가 불을 끄러 덤비는 격으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제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고 오히려 위험해지는 상황이 생길 수가 있다.〈서른, 노자를 배워야 할 시간〉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간 유대인들은 자기의 욕심에 맞으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욕심에 맞지 않으면 부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심이 믿음을 향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칭찬 받는 믿음과 관계를 맺는 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외형보다 내용을 채우라
이규현 목사
판단하는 사람들 안에는 우월주의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보다 낫다는 교만과 자기자랑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교만을 낳았고, 택함을 받은 유대인이라는 자랑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했는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 안에는 놀라운 지혜들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길과 교훈들을 잘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가진 특혜는 대단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유대가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노벨상을 받고, 세계 경제권을 쥐고 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굉장한 지혜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롬 2:18)」 그런데 이런 율법을 가진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이 지나친 구별의식과 자기 확신을 갖게 한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19-20절에서 자기 자랑과 확신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선생으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은 부족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도 자기에게 적용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가르치는 것에 바빴습니다.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1~24)」 유대인들의 문제는 율법을 자랑하고 가르치면서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는 잘하면서 자신은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 가운데 모독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남을 판단하지만 그들의 삶은 유대인들의 혈통답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남의 잘못이나 약점을 지적하기는 쉬워도 그렇게 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 중의 하나가 남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한 실력을 갖지 않아도 눈과 입만 있으면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도둑질, 간음, 우상숭배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함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기도 했고, 광야에서도 모압의 여인들과 간음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어기면서 남들을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태도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하는, 명백히 잘못된 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자랑을 멈추라고 책망합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완전한 것처럼 착각하고 남을 가르치려는 것은 외식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랑거리들이 생깁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든가,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든가,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지만, 자기 자랑과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역 현장에서 오랫동안 열심히 봉사를 하다 보면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봉사했지만 세월이 지나고 관록이 붙고 어려운 일들을 힘겹게 감당하다 보면, 그것이 나의 의가 되고 자랑이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분노가 생겨서, 협조를 잘하지 않거나 편안하게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보면 미움이 일어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듭니다. 자기의 열심과 헌신이 의가 되어서 나중에는 무기가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이것은 안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수고했지만 자기 자랑으로 오히려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내가 믿었기 때문에’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내가 믿은 것이 의가 되고 자랑이 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엡 2:8~9)’ 주어졌습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무언가 나는 특별해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 의가 생깁니다. 나는 선하고 하나님이 구원하실 만해서 구원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악하고 문제가 많아서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현대판 유대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내가 나은 것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으로 수준이 높고 멋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세상적 기준으로는 그런 사람이 많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비추어본다면 누구나 소망이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경계해야 하는 것은 나의 자랑거리를 쌓는 태도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좋은 말은 혼자 다하면서 실제 삶은 전혀 아니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면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만 믿고 사랑한다고 노래 부르면서 정작 돈 앞에서 다른 사람 이상으로 부들부들 떤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자랑이 되면, 그 순간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이 되고, 어떤 좋은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로막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외식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을 꾸미는 것에만 열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에서 외형적인 것을 추구하기가 쉽습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롬 2:25)」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바울은 단호하게 너희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무할례자가 되며 할례가 무익하다고 말합니다. 이방인이라도 율법을 행하면 할례자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말입니다. 바울의 말은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외적인 기준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종교적 형식주의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할례라는 형식이 아니라 할례를 받은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직분을 가질 때 직분 자체보다 직분에 마땅한 영적 실력을 가지고 있느냐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조건들을 갖추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의하지 않으면 세월이 흐를수록 변화되기 보다는 형식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앙의 외식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과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다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과 홀로 있을 때의 모습, 주일의 모습과 월요일 아침의 모습, 집 안에서와 교회에서의 모습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과 실제 나의 모습의 간격을 좁혀서 점점 일치를 이루는 작업이 평생 우리가 해야 할 영적 순례에서의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 간격이 너무 크면 굉장한 위선이 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내면에는 죄책감과 수치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좀 더 그럴듯한 모습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것 중의 하나가 종교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열심을 냄으로 내 연약함을 숨기는 도구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굉장한 충성이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자 하는 노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신앙을 가지려면 외식주의와 씨름을 해야 합니다. 신앙의 외식주의와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모든 행위가 허위에 빠지고 자기를 기만하고 남을 속이게 됩니다. 결국 외식으로 거짓된 가면 속에 숨겨진 자아는 하나님과 진실한 대면을 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점점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결국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죽은 신앙이 됩니다. 외식은 신앙이 안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왜 그렇게 맹렬하게 비난하셨고, 죄인과 세리는 거부하지 않으셨을까요? 죄인과 세리들은 자기 모습 그대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가면을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죽은 종교인이 될 것인가, 생명력 넘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점점 변화되어 갈 것인가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가면을 쓰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모습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허구 위에 신앙이 쌓일 뿐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늘 우리가 신앙적 외식에 빠지지 않도록 예민하게 바라보면서 일평생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위선은 오래된 신자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외식은 스스로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삶이 노출된 사람들의 경우에 위선이 더 쉽습니다. 무엇보다 저와 같은 목사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진짜 위험한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은 분명히 축복된 일이지만 두려운 자리입니다. 주님은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하는 것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사는 것의 간격을 좁히는 데 실패하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정작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 소홀하게 되면 위선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빠지기 쉬운 오류는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마치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성도들에게 호통을 치듯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자가 100% 말씀을 다 지켜야 말씀을 전할 수 있다면 설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직함입니다. 자신이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지 말고 정직함으로 청중들과 함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죄인임을 전제하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들어야 할 첫 번째 청중이 자신일 것입니다. 설교자의 목회 일번지는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한 설교를 찾을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과 정직성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인가 보다 내용만 추구한다면 우리는 함께 속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의 차이를 좁혀가는 것, 나는 말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설교자나 성도들 모두가 일평생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외식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성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실제 모습보다 더 부풀려지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기로 결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사랑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방이 잘되는 비결은 정직함입니다. 정직함이 없는 만남은 거짓된 친밀감을 만들 뿐입니다. 그러면 몇십 년이 지나도 온전한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진실한 모습을 표현하면 초기 단계에서는 서로에 대해서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진정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부 관계에서도 거짓된 친밀감으로 만난다면 그 가정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정직함으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하시지 않았습니다. 죄 지은 것을 감추고 숨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가죽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그 가죽옷은 짐승을 잡은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의의 옷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정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으신 보혈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과거의 아픈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했던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이 가장 안전한 사람입니다. 외식주의는 복음을 믿지 못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의로 자기 삶을 붙잡고자 할 때입니다.
또한, 외식주의는 허영의 문제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허영은 더 무서운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헌금을 하다가 즉사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는데 일부를 숨기고 재산 전부를 바친 것처럼 속였습니다. 교회의 출발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오염시킨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허영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도와 교회와 하나님을 속이고 거짓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영적 허영심이 들면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포장술을 개발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것과 그것에 걸맞은 신앙의 내용을 가진 것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직분으로 자기를 포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성도의 순수하고 진실한 헌신을 보면서 오랫동안 믿으면서 놓친 것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평가나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반응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래 믿어왔다는 것은 늘 도전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변화 없이 세월만 흐르면 겉만 딱딱해집니다. 이것이 외식입니다. 날마다 몸부림치지 않으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과 다른 내용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런 신자들의 모습 때문에 교회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조금씩 줄여가야 합니다.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너무 민감하면 유혹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고자 하는 태도를 경계하십시오. 칭찬에는 독이 있습니다. 칭찬보다 비판이 우리에게 더 유익합니다. 칭찬과 비난에 너무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내면의 영적 중심이 중요합니다. 칭찬한다고 없던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비난한다고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칭찬에 부풀린 내 모습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모습에 속아서 내용을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파산상태입니다.
신앙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혼자 얼마나 말씀을 묵상하고 홀로 하나님과 얼마나 독대하며 기도하고 있는가? 사실 교회에서의 활동은 신앙생활에서 빙산의 일각입니다. 개인의 삶의 많은 영역 속에서 기도와 말씀 묵상과 은밀히 돕는 행위들이 실제 삶입니다. 교회 안에서 드러나는 활동이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개인의 삶 속에서의 신앙생활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홀로 있을 때 스쳐 지나간 생각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작은 유혹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외부 평가와 인정, 사람들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노력들이 ‘영성의 삶’입니다. 인정과 칭찬을 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삶에 중심이 있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은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습니다. 혈통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내용이 채워지지 않은 외형적인 자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유사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앙의 내용을 채우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영적인 부도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시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늘려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 얼마나 좋은 말을 하느냐의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이 시대에서 큰 도전입니다. 교회의 교패를 대문 앞에 붙일 때에도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층간 소음에 불평하지 않고, 싸우지 않을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교패를 붙이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 삶을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으실 수도 있고, 영광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은 겉과 속이 같다.”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신자, 이름만 갖춘 신자가 아니라 이름에 어울리는 영적 실력을 갖춘 신자가 진짜 신자입니다. 위선적 삶은 헛됩니다. 겉모습을 아무리 포장해도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위와 노력들, 신앙적 경력과 과거의 헌신들, 어떤 것이라도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자랑도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일에 걸림이 된다면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자랑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만 자랑하고자 할 때 그 신앙이 가장 안전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많이 한 분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에 숨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자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허영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고 주의 공로를 의지해야만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고, 헛된 자랑으로 나를 부풀려 신앙이 겉으로만 요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함과 진실함이 드러날 때,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나는 향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참된 신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실패
로마서 2:17-29 / 피영민 목사
서 론
로마서의 전체 주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핵심 구절은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행, 권력, 재물 등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의입니다. 나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는 죄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혹자들은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그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며 비아냥거립니다. 당장 밥 먹고 살기도 바쁜데, 내세의 문제까지 생각하며 살 여력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호흡이 멎는 순간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라는 영원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의 일생과 이 땅에서의 이생,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생도 중요하고 이생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삶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나그네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행을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7~80년 여행을 다니고 그 끝에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매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결코 사소한 문제이거나 무시할 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 가운데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입니다. 마귀가 없애려고 발버둥 쳤지만, 없앨 수 없었던 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귀가 없애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서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천명하면서, 어떤 인간도 자기 힘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피력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의를 갖지 못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모든 인류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부도덕한 이방인들에 대해서, 그리고 2장 전반에는 도덕적인 불신자들, 후반에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유대인들이나 불의한 이방인들 모두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사실에서는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기가 훨씬 어렵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해도 세리들과 창기들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의가 없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천국에 들어갈 의를 주시도록 간구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만,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특별히 이 세 번째 그룹의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들은 외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들은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살기위해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생활에 누구보다 열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헌금, 찬양, 기도 등 종교생활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 가운데 가장 하나님과 친밀해 보이는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메시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런 종교적인 유대인들에 관해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자부심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개만도 못한 자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에게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영어로 ‘Jew’라고 하는데, 이 말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로부터 기인합니다. ‘유다의 후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다인’, 혹은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의미는 창세기 29장 35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유다’의 의미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백성이 되라’는 것이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백성이 되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칭송받는 백성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2장 29절 말씀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육신적인 유대인이 참된 유대인이 아니라 내면적인 유대인이 참된 유대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게 찬송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언어유희가 사용된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 칭송을 받는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실상 하나님께 칭송받지 못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 이름이 찬송이냐? 너희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데 찬송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칭송받지도 못하는 백성이 되었구나!” 표면적으로만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꼬집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가장 중요한 지파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포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안정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민으로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도와주는 분이지, 영적으로 구원해 주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분으로 생각지는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의 내용은 2장 17~20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의 심중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민이자 대단한 특권을 가진 백성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잘못 이해하여 오용하고 남용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망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영적인 시각 장애인이요, 어두움에 있는 자요, 영적 어린아이로 여기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고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적용할 줄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누리는 자부심은 악한 형태의 것이었고, 잘못된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을 많이 읽고, 헌금도 많이 하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백성인양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는 소속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소유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 방언, 통변 등 각종 은사와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다할지라도 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그들은 철저한 종교인일지 모르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의를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닙니다. 회개한 적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도 없는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Ⅱ.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실패
유대인들은 스스로 선민이요, 이방인들의 빛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실패한 자들이었습니다. 21~24절에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부풀어 오른 풍선을 바늘로 터뜨리듯 유대인들의 교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문장이 끝나야 될 것 같은데, 이어지는 21절에도 문장이 끝나지 않고 유대인들의 교만에 대해 엄하게 추궁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실패와 교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감정이 그만큼 격앙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나는 도적질, 간음, 우상숭배, 율법을 범하는 것들을 싫어한다. 남을 비판하기도 싫어한다”고 자랑했지만, 바울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전혀 다른, 도적질을 일삼고 간음을 저지르고 우상숭배하며 타인 비판하기 좋아하는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바리새인이었을 때,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반박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위선적인 유대인들 때문에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위선 때문에 이방인들이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전도의 가장 큰 걸림돌은 기독교인들의 실패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위선에 질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거짓말, 간음 등에 실망해 교회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 나가자고 하면 “대형 교회 목사들도 다 간음하던데 거기 가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실패 때문에 불신자들이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유대인들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 없이 신앙생활 하는 기독교인들로 인해 불신자들에게 교회가 멸시를 당하고 배척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특권은 구원이 아니라 도리어 멸망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인이라는 사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결정적인 실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이 자기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이 완전한 의를 주시기 때문에 그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죽기 5초 전이라도 믿으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Ⅲ.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오해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외적으로 종교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실체로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고,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항상 읽고 듣는 사람들이었고,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처럼 보였습니다. 또 옷도 종교인처럼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구원받은 백성들처럼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참된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28~29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례는 오늘날 포경수술과 같은 것인데, 내적으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외적,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실체로서 믿음이 없다면 육신의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고 순종도 없다면 그 할례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도리어 할례를 받지 않은 무할례자가 할례자를 판단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 상자가 하나 있는데, 그 안에 보증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진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보증서만 상자 안에 들어 있고, 진품 다이아몬드가 상자 속에 들어 있지 않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진품 다이아몬드이지, 보증서가 아닙니다.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어도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고, 교회에 등록했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고, 부모님이 목회자, 장로, 권사님이라고 해도 막상 자기 영혼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의지하는 참된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떤 외형도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외형적인 것은 내적인 실체가 없는 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잘 믿는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외형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날에 물으실 질문은 “죄가 있느냐?”(Are you guilty?)입니다. 영혼을 걸고 도박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멈춰야 할 줄 믿습니다.
결 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땅을 밟은 지도 이제 131년째가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시민종교의 하나로 전락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종교란에 대부분 기독교인이라고 쓰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없이 종교적인 유대인들처럼 그저 의미없는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음 내키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시민종교가 된 것입니다. 불교라고 쓸 수 없으니, 기독교라고 쓰는 정도입니다. 영국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일평생 태어날 때와 결혼할 때, 그리고 죽을 때 총 세 번 교회를 나간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될 정도입니다. 이런 성도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한국 기독교도 점차 시민종교의 하나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 속에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천국 들어갈 만한 의와 공로가 없습니다. 그러면 외적인 종교의식에는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집안에, 부모님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 집안도 기독교인 집안이었습니다. 부모의 믿음, 교회 배경, 종교의식이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만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죗값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나는 이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를 얻어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종교적 위선이나 의식이나 외형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자로,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표면적 신앙인과 참 신앙인
(롬2:17 ~ 29)
EX) 몇달 전의 일입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친교실로 가는데, 어린 꼬마 몇이 저에게 달려 와서 호들갑을 떨며 "목사님! 목사님! 교육관 뒤쪽 주차장 근방에 있는 나무가 쓰러졌어요. 목사님! 한 번 가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말을 듣고 교회 뒤쪽에 있는 주차장으로 가 보았더니 정말 높이 5~6미터나 되는 큰 나무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그 나무는 열대성 나무로 보기에 괜찮은 나무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1.5미터 정도 높이의 부분이 부러지면서 쓰러진 것입니다. 저는 자세히 관찰하려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건강하게 보이던 나무였지만, 나무 속은 시커먼 색깔로 변하여 완전히 썩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나무가 오랫동안 속으로 병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심하게 바람이 불자, 견디다 못해 중간 줄기가 부러져서 땅바닥에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저는 쓰러진 그 나무를 통해서 한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건강한 나무라 할지라도 나무의 속이 썩어버렸으면 그 나무는 건강한 나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모습보다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모습입니다. 허우대는 멀쩡해도 속병 들었으면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EX) 제 친구 중에 '성화백'이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입니다. 이 성화백이라는 친구는 어릴 때부터 넉넉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얼굴도 넉넉하고 허리도 넉넉하여, 바싹 마른 저와 비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해주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작년 선교대회 때 한국을 방문하여 이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허우대는 말짱한데, 속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오래 만에 만났다고 음식점을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음식을 잘 먹지를 못합니다. 속이 아프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이 40세가 될 때까지 미술한다고 총각 딱지 떼지 못하고, 허구 헛날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독한 술을 매일 매일 몸에 부어대고, 하루종일 담배를 피워대다 보니 40세 밖에 되지 않는 젊은 사람의 몸이 심하게 망가져 버렸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꼭 속빈 강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겉보다 속입니다. 포장지 보다 내용물이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겉모습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겉모습도, 형식도 중요합니다. 곡식 알갱이가 만들어지려면 반드시 껍질이 필요합니다. 물은 잔에 담겨질 때에 비로소 그 모양을 지닐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의 형식과 겉모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맹이보다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형식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겉으로 보이는 형식적인 것만을 중요시하는 표면적 신앙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Jewish, 즉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명예롭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 그 자체만을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사실만을 자랑하였습니다. 이렇게 이름 값도 못하는 유대인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하여 바울은 28.2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EX) 과거 한국이 일본에 36년 동안 점령당했을 때,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몸 속에 같은 피가 흐르는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같은 한국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이 한국 사람답게 행동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친일파들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에 빌붙어서, 같은 동족들의 등을 쳐 먹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일파를 일본 사람들보다 더 미워하고 아예 한국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었고, 그들의 몸 속에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태어난지 8일 만에 이방인들과 구분하기 위한 거룩한 할례의식을 통과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겉모습만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속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육체에만 할례의 흔적이 있었지, 구별된 백성이라는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모습만 유대인이라 해서 그들을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 속에 유대인과 같은 모습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뭐뭐 하는 척하는 모습이 표면적 유대인의 모습이요, 또한 표면적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표면적 신앙인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을 적용하지 않는다:
EX)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유행어가 많이 바뀌어졌습니다만, 수년전 만해도 예수믿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숨쉬기 위해 수면위로 입을 내놓고 '뻐금 뻐금'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1탄입니다. 그런데 2탄은 예수 믿는 사람이 물에 빠져서까지 물고기들과 말이 하고 싶어서, 입만 물 속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을 잘합니까? 참 말 잘합니다. 그런데 2탄 이후, 후속시리즈를 제가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3탄인지, 4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물 속에 빠진 예수믿는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물 속에서까지 물고기 말을 듣고 싶어 귀만 물 속으로 향할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의 귀를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귀가 굉장히 커졌습니다. 옛날에 비해서 유명한 교회의, 유명하신 목사님들 설교를 굉장히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디오로 보고, 테이프로 듣습니다. 또한 동시간 대에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인터넷 화상중계로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신앙생활하기 좋은 세상인지 모릅니다. 문제는 좋은 설교를 하도 들어서 귀는 대단히 수준이 높아졌는데, 삶의 모습은 항상 그대로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유명하신 분들의 설교를 듣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메시지가 주어져도 그 말씀을 지식으로 알기만 한다면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지식 자체가 나를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교훈도 알고 하나님의 뜻도 알았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요즘 말로 말하면 그들은 성경공부도 하고 제자훈련도 하고 신학공부를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그 말씀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21~22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겠습니다.“그런 여러분이 남은 가르치면서 왜 여러분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는 당신들이 도적질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당신들이 간음을 하고, 우상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당신들이 금붙이 등으로 만든 신상을 훔쳐가지 않았습니까?”
EX) 어느 바닷가에 어미 게와 아기 게가 있었습니다. 어미게가 아기게에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애야! 똑바로 걸어라! 왜 그렇게 똑바로 걷지 못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기게가 대답을 했습니다.
"엄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먼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보여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어미게는 아기게 앞에서 걷는 시범을 보여주려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미게는 계속 옆으로 걸었고 그 모습을 본 아기게도 계속 옆으로 걸었습니다.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면 자녀가 본 받습니다. 교회 중진들이 말씀대로 살면 일반 성도들이 본받습니다. 표면적 신앙인의 첫 번째 특징은 말씀을 그저 듣기만 하여 귀는 커졌는데, 그 말씀을 삶에 현장에서 적용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23절입니다.“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또 24절입니다.“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 그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전도의 방법이 나빠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내린 결론에 의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그 안에 보여야 할 주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뚫어지게 보면서 판단하고 있습니다. Non-Christian들은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제2의 Bible, 걸어다니는 Bible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불신자 아내가 나를 보고 있습니다.
불신자 남편이 나를 보고 있습니다. 불신자 부모님이 나를 보고 있습니다. 불신자 자녀, 불신자 친척, 불신자 친구들, 불신자 이웃들이 나를 보고 있습니다.
EX) 주일 저녁예배에 훌륭한 외부 목사님이 오셨다고 광고가 되어 예배당이 꽉 차있었다. 참석한 많은 사람들 중에는 부인은 그 교회의 교인이었지만 남편은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는 한 부부가 참석하였습니다. 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누구든지 예수를 자기의 구주로 믿어 영접할 사람은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남편의 귓전에 대고 말을 하였다.
“여보. 당신도 지금 앞으로 나가서 믿기로 결심하지 않겠어요?”그러자 남편은 아무 반응도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부인은 다시 한번 남편에게“여보. 지금이 바로 당신이 믿기로 작정할 아주 적절한 때인 것 같아요”라고 하였으나. 남편은 여전히 아무 반응 없이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좀 쌀쌀한 어조로 남편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 밤 드디어 당신이 결심을 하는 줄로 생각하며 기대했어요.”그러나 남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집에 돌아 온 후에 그 부부는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때에 남편이 입을 열어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오늘 당신은 나에게 앞으로 나가서 믿기로 결심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을 안 나타내었소. 내가 일부러 무례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은 크리스챤이고 나는 아니오. 그런데 나는 그 동안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지를 못했소. 당신도 카드 놀이를 하고. 나도 카드놀이를 하지 않소? 당신도 댄스 파티에 가고. 나도 댄스파티에 가지 않소? 당신도 극장에 잘 가고. 나도 잘 가지 않소? 당신도 담배를 피우고. 나도 담배를 피우지 않소? 당신도 때에 따라서 술을 마시고. 나도 술을 마시지 않소? 나는 내 자신을 살펴보아도 당신과 내 생활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데. 내가 새롭게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단 말이오. 나를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오. 진실로 크리스챤인 당신과 불신자인 나와의 차이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순복음교회 성도로 등록했다면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많이 믿어 온 세월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오는 8월이면 창립7주년이 됩니다만, 저는 어떤 분이“교회가 세워진지 얼마나 되었습니까?”라고 물어오면, 솔직이 부담이 됩니다. 교회가 올바르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세워진지 오래 되었다고 그 세월, 자랑하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표면적 교회인지, 아니면 참 교회인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인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고, 그 언약의 표시인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의식 때문에 그 율법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고, 형식만 좇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순종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그럴듯하게 가르쳤습니다.
남이 보기에 그럴듯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내용보다 껍질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만 신앙인 이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표면적 신앙인 입니까? 아니면 참 신앙인 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진실을 보기 원하십니다. 겉으로만 뭐뭐 하는 척하는 표면적 신앙인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교회를 오래 다닌 것으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손에 붙잡혀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다는 모태교인이라고, 내가 매주일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순복음교회 교인이라고, 내가 집사라고, 내가 참 신앙인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참 신앙인을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