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현 가요무대 출연 명곡 모음 18곡
삼천포 아가씨
열아홉 순정
기분파 인생
소양강 처녀
아리랑 목동
고향의 품에
진달래 시첩
막간 아가씨
일편단심
향기품은 군사우편
비내리는 호남선
머나먼 고향
고장난벽시계
하이킹의 노래
어머님
천태만상
꽃길
나폴리맘보
괴테, 슈베르트 들장미
독일의 6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5월 말부터 장미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해서
6월 초에 무더기 무더기
장미가 한창이었다.
아름다움을 관조하기엔
너무 강렬하고 화려해서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다.
몇 차례의 비가 지나간 후,
꽃잎을 하나둘 떨구며
절정에서 한풀 꺾인 지금에야
비로소 호젓이 마음의 여유를 두고
장미를 묵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장미의 계절이 오면
떠오르곤 하는 기억이 있다.
본(Bonn)에 살던 몇 년 전,
담장을 타고 오르는
붉은 장미 가득한 길을 지나가는데,
계절의 전령에 취함이었는지
괴테의 시
'들장미(Heidenröslein)'가
흘러나왔다.
Sah ein Knab' ein Röslein stehn...
음절 하나, 즉 모음 하나에
한 발짝,
이렇게 시의 리듬에
몸을 싣고 걸어가다가 문득,
한쪽 발에 규칙적으로
힘이 더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는 노래가 되어 있었다.
이 시의 외재율에 대해,
군더더기없는 단순함으로
아름답게 완결된 구조에 대해,
그 순간,
직관적으로 모두 알아버렸다.
트로케우스(Trochäus, 강약음)니
얌부스(Jambus, 약강음)니
무운시행(Waise)이니
휴지부(Zäsur)니 하는 문학 용어들을
책과 강의를 통해 공부하게 된 것은
이 경험에 한껏 고취되고
흥분한 이후의 일이었다.
용어는 몰랐으되
운율을 이루는 것들의
존재에 대해서만은
그 순간 모두 알아버렸다.
장미에 취해 지낸 6월의 며칠간,
줄곧 괴테의 시
'들장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괴테의 시에 붙인
슈베르트의 가곡 '들장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행히,
이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내연을 담은
정교한 구조물은
관심사의 집결체,
마르지 않는 하나의 샘이기에
벅차서 도저히 한 바가지에
퍼낼 수가 없다.
학습이 아닌 귀중한 체험을 통해
몸소 느낀 운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시의 파격구문과 후렴구,
음운 축약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고 싶다.
운율과 내용은 별개가 아니다.
단어, 음절, 심지어 음운,
즉 알파벳과 문장 부호 하나의 의미까지
모두 분석해서
독자 여러분과 이 시의 세계를
함께 누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다.
예컨대 각 연의 2행이
'Röslein auf der Heiden
(들에 핀 장미)'라
똑같이 반복되면서도,
왜 3연의 2행에만 유독 's 라는
음운이 붙는지,
이것이 오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싶다.
각 연의 2행은 모두 똑같이
'들에 핀 장미'이지만
그에 내재된 의미는 각각 다르다.
1연에서는
'그저 들판에 서 있는
한 송이 작은 장미꽃'일 뿐이었다가,
2연에서는
그 아름다움에 취한
소년의 감정이 담긴 감탄문이 된다.
그리고 3연에서는
das라는 정관사가
음운축약을 통하여 's의 형태로 붙는다.
강약이 반복되는 운율을
해치지 않기 위해
모음을 과감히 생략해 버린 것이다.
소년이 장미를 꺾어서 그것을 취하는 순간,
장미와 소년 사이에는 관계가 형성되고,
소년의 입장에서
그 장미는 특정한 장미,
'그 장미(the rose, das Röslein)'가 된다.
마치 김춘수의 시에서
이름을 불러준 순간
'꽃'이 된 것처럼.
's라는 음운 하나로
이러한 의미를 획득하는
언어 구사의 압축성이 놀라울 밖에.
소년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그래서 소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장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시의 내용에 준하여
'장미를 꺾는' 행위의
문화사에 대해 고찰하고 싶다.
의학 및 과학 저술가들은
'성교 (coitus)',
교구의 목사들은
'간음 (fornication)',
범속한 우리네 필부들은
'그 짓 (fucking)',
시인들은
'꽃을 꺾는 (de-flowering)'이라
표현한다는 '장미 꺾기'는
분명 독자들이
자신의 감각에 맹세하되
솔직한 즐거움을 가질 만한
매력적인 소재가 될 것이다.
'장미를 꺾는다'는 소재는
주지하다시피
괴테만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여기서 나는 중세의 민담 및
구전문학에서
문학적 소재를 재발견한
19세기 독일 문학의 흐름과
그에 영향을 받은
여러 장르의 독일 예술을
소개하고 싶다.
15세기 '미술'을 중심으로 한
'고대의 재발견'을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한다면,
19세기 '문학'을 중심으로 한
'중세의 재발견'에 대해,
나는 이 시기야말로
'진정한 독일 르네상스'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숱한 천재들을 배출했고
그 중심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우뚝 서 있었듯이,
'진정한 독일 르네상스' 역시
숱한 천재들을 배출했고
그 중심에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버티고 있었다.
나는 중세 이후 전승된
민요와 민속담시들이
괴테에 의해 예술시로
승화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여러분과 함께
향유하고 싶다.
한편 이 시 '들장미'는
'담시(談詩. Ballard)'이다.
담시, 즉 발라드란
한자 그대로
'이야기가 담긴 시'라는 뜻이다.
괴테는 담시를 일컬어
서사, 서정, 극이라는
문학의 기본적인 세 형식이
어우러진 '원란(Ur-Ei)'이라 불렀다.
'근원적인 알',
말 그대로 괴테 문학의 총체가
응축 집결된 창작의 원천이었던,
'담시'의 의미에 대해서도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괴테가 민속담시를
'예술담시'로 승화시켰던
19세기에 만개한
또 하나의 예술 형식이 있으니,
나는 '예술가곡'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곡'은 시와 음악이라는
독립적인 장르가 결합한
독특한 예술 형식이다.
19세기는 말과 음악이
독특한 형태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대였다.
원시 언어에서는
본래 말과 음이 또렷이
분화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중세로부터 전해져 온 민담 등이
원형을 유지하며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운문의 형식을 빌려
말이 음과 함께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 자체는
음악성을 가지는데,
괴테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민담들에 보다 정교한
음악성을 부여했다.
가곡 작곡가들은
시 자체의 음악을
해치지 않은 채로,
시를 잘 이해하면서
곡을 붙여야 하는
'재해석과 창작'이라는
이중의 의무를 가지게 된다.
나는 이제 말과 음,
가사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시 자체의 운율과
음악의 선율은
뼈와 근육처럼 함께
움직이는 관계이다.
혹자는 독일시의
독일어 의미도 모르겠는데
골치 아프게 웬 운율?
이렇게 손사래를 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 나의 경험을 들어 말했듯이
운율이란 학습을 통해
인지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일찍이 문학에 심취했다.
1815년경 10대 후반의
젊은 슈베르트는
괴테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고,
괴테의 젊은 열정에 동화되었다.
담시가 괴테 문학 창작의
원천이었듯이,
가곡은 슈베르트 음악
창작의 원천이었다.
그가 자신의 가곡을
실내악, 독주곡 등에
변주하여 사용했다는 사실은
가곡이 슈베르트 작품의
본질이라는 점을 웅변한다.
그는 시의 의미와 운율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슈베르트가 자신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의미를 증폭시키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음악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훼손하거나
압도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의 가곡을 들으면
원시의 의미와 운율에 대한
존중이 느껴져서
그 수줍고 겸손한 성품에
미소짓게 될 때가 있다.
여기서 슈베르트의 음악을
과연 '낭만주의'라는 범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의혹 역시 한번 제기하고 싶어진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와
종교 음악은
형식적 측면에서 '고전주의'에 가깝다.
슈베르트 음악의 정수인
대표적 가곡들을 고려할 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적 특성에 부합하는
'낭만주의' 시들을
텍스트로서 선호했다.
시의 성격은 슈베르트 음악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따라서 그의 대표곡들 중
'낭만주의' 성향 작품들이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나의 용어로
작곡가를 규정짓게 되면
그의 다른 곡들을
본질 그대로 간파하는
시야가 좁아지게 되는 위험이 있다.
슈베르트 가곡 일부는
시의 성격에 따라
고전주의적 형식을 갖추기도 하고
심지어 중세의 악사가
콧노래를 웅얼거리는 듯한
경우도 있다.
이 의혹에 대한 답을 찾아가려면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정의 및 발생 배경까지
들먹여야 할 것이다.
괴테의 시 '들장미'에는
라이하르트, 토마셰크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곡을 붙였다.
그 중 오늘날까지
꾸준히 살아남아 사랑받고 있는
가곡을 꼽으라면
단연 슈베르트의 '들장미'와
베르너의 '들장미'를 들 수 있다.
Vienna Boy's Choir)
이 시의 '트로케우스(강약음)' 운율을
슈베르트가 리듬의 '강약'으로 \
슈베르트의 악보
베르너의 악보
![외국곡] 들장미(Heidenröslein)-베르너(Werner) 작곡 : 네이버 블로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lh3.googleusercontent.com%2Fproxy%2FlVZmrcZaKN4nFqsJpuKsS9eqyR--11lmAeg36MUxVbFcIpLN9J3lyR_1D6e_zLFqZyWECZO1EWxjwH2VvXNFs-PLdclWshbw7JQgftAWFIzcFlrztg2c0PiaIfhqnmNET1LlPZdJozr8IO856OD-mO-uBL_CR071XzjhjEtLM0a-8GRwPN_KbpM1y2JQmwGQF4fqhGbWmnPcyzKHFAKx-dFqPb5rDoJwcxWgSHvuEL-6UD8tuGNJLXBbq6GlQgN4r52LNKgxjiwSdqllt9IoX_jbECkeqD5W0GEc-xnAJ4-SrUEi6LbunFQAaqJqAjP6y774MfUmkHpjr_TK8OKyWQ)
나는 슈베르트가 시 속에 나타나는
풋사랑의 싱싱함과
고뇌를 음으로 어떻게 그려내었는지,
소년의 단호함과
장미의 섬세함 사이의
긴장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악보에 실린 음과
악상기호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세히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이 곡에 나타나는
'사랑'의 의미를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다.
괴테와 슈베르트는
이 작품 속에서
'사랑'이라는 공감대를
통해 만난다.
20대 초반의 청년 괴테는
제젠하임 목사의 딸
프리드리케 브리온을
연모하고 있을 때
이 시를 썼고,
10대 후반의 청년 슈베르트는
테레제 그로프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괴테의 이 시에 곡을 붙였다.
이 젊은 나이의 괴테가
사랑에 대해 얼마나
원숙한 통찰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슈베르트 또한
괴테의 솜씨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시와 음악이 가곡이라는 형태 속에서
어떤 결실을 맺는지에 대해,
가지런히 마무리하며 글을 맺고 싶다.
그러나,
에세이 하나에
그 모든 내용을 담는다는 것은
너무 벅찬 일이다.
위에서 말하고 싶었던 사항들을
결국 하나도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는데,
그냥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벌써 숨이 가쁘다.
그래서,
존경해 마지않는 위대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선생을,
사랑해 마지않는 섬세한 \
란츠 슈베르트 씨를,
그냥 어느 정도
배제해 버리기로 했다.
지난 시대의 예술을 이야기할 때
충분한 이해를 갖추는 동시에\
자의적 상상으로
왜곡하지 않는 것은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윤리이자 예의라고 생각한다.
'예의'라는 것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것은 강제성을 띠지 않되
갖추는 편이 늘 바람직한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하는 말을,
그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고려해야 한다.
한편 그들에 대한
예의만큼이나 중요한 건
우리에게 던져진 의미이다.
예술 작품은 고인 우물이 아닌
흐르는 강물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 세계에
그 생명의 물길이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거나
옭아맬 필요가 없다.
감상자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해석과
재창작의 특권을 누려야 한다.
그들에 대한 예의를
반드시 갖춘 채 말이다.
이제, 나는, 괴테도 슈베르트도
의도치 않았을,
새로운 의미를
과감히 도출하는 특권에
독자 여러분까지
공모시켜버리고 싶다.
다시,
독일의 6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5월 말부터 장미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해서
6월 초에 무더기 무더기
장미가 한창이었다.
아름다움을 관조하기엔
너무 강렬하고 화려해서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다.
몇 차례의 비가 지나간 후,
꽃잎을 하나둘 떨구며
절정에서 한풀 꺾인 지금에야
비로소 호젓이 마음의 여유를 두고
장미를 묵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사랑과 아름다움과 관능 속에
눈을 현혹시키며
한껏 교란되어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의 장미는 꽃잎을
흩뿌리며 시들어 있었다.
들뜬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인생과 무상함이라는
전혀 새로운 의미가 다가온다.
나는 괴테와 슈베르트의
음악을 해석하고 수용하며 연주하는
세 명의 성악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 명의 연주를
차례로 배열하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연출에
도전하는 셈이다.
마침 이 시 속에는
세 명의 작중 화자가 있다.
장미, 소년, 그리고 시의 모든 의미를
현명하게 파악하는
전지적인 시적 자아.
흥미롭게도
이 세 명의 성악가들은
마치, 각각의 역할을
노래하는 것 같다.
슈베르트 들장미,
바리톤 :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피아노: 제랄드 무어 (1'44)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지적인 해석.
전지적 관찰자 시점을 가진
시적 화자가 노래하는 듯한
연주를 들려준다.
그는 시의 운율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으며,
시와 음악이 담은 내용을
원숙한 연륜으로 궤뚫고 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소년과 장미 사이의 에피소드에
크게 동요하지 않은 채
거리를 두며 바라본다.
가끔 숨 죽이며 긴장하거나,
알듯말듯 안타까운
탄식을 자아낼 뿐이다.
각 연의 마지막 행,
즉 6행과 7행은
이런 후렴구로 반복 마무리된다.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특정한 장미와
특정한 소년 사이의 사건은
이 후렴으로 마무리된다.
마치 카메라가
Zoom-Out되는 듯한 느낌으로
거리를 둔 채로 관찰된다.
특정한 장미('s Röslein)는,
다시 들에 핀 수많은 장미 중
하나가 된다.
이 시에 나오는 소년과
장미의 이야기는
특정 상황의 묘사일 뿐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요,
남녀 관계의 원형이다.
이 사건은 개별적이고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사 모든 남녀에게서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숱한 인생의 경험을 거친
노년의 성악가,
전지적 작중 화자는
새삼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안다.
이는 인간사의 수레바퀴 속에
숱하게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숙명임을.
디스카우
슈베르트 들장미,
소프라노 : 바바라 보니,
피아노: 제프리 파슨스 (1'51)
반면 미성의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는
장미의 역할을 노래하는 것 같다.
바바라 보니 역시
시의 운율과 구조를
명쾌하게 들려주고 있으며,
이 시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를 잘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직은 젊은 여성인 그녀는
서슬 퍼렇게 분노한다.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보는
디스카우와는 달리,
그녀는 시 속의 장미에게
자신을 철저히 몰입시키고 있다.
바바라 보니의
장식음과 비브라토는
괴테가 장미에게 부여한
바로크적 관능과 호색을
완벽하게 환기시킨다.
2연과 3연 5행의 'leiden',
즉 고통스럽게 참는다는
부분의 처리는
쾌락과 고통,
환희와 분노가
뒤범벅이 된 성애의
에로틱한 신음을
연상케 할 정도다.
가시를 곤두세운 장미가
소년에게 대꾸하는 부분,
'난 널 찌를 테야,
네가 나를 영원히 기억하도록'을
말하는 바바라 보니의 음성에는
몸서리쳐지도록
시퍼런 날이 벼려져 있다.
Vienna Boy's Choir)
슈베르트 들장미,
빈 소년 합창단의 독창자로
발탁된 이 소년은
실제 나이와 성별이 그러하듯
시 속 소년의 역할을 노래하는 듯하다.
장년 혹은 노년의 현명함을 얻은
디스카우가
초월적인 경지에서 모든 것을
관조했고,
인생의 단맛 쓴맛을 알고 있는
바바라 보니가
청년기 질풍노도의 감정을
분출했다면,
인생의 초기 단계에 선 이 어린 소년은
그저 아무 영문 모른 채
무심하기만 하다.
이 소년은 결 곱고 풋풋한 목소리로
매우 성실하게 노래하고 있지만
시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숙고한 것 같지도,
통찰을 얻은 것 같지도 않다.
또한 모국어이기에
그나마 운율을 어느 정도 직관할 뿐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 점이 오히려 듣는 이에게
독특하고 미묘한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관상 귀엽고 단순한 시의 정서와
더욱 잘 어울리는 느낌을 준다.
아름다움을 그저 명상하지 못한 채
소유하고야 마는 젊은 날의 미숙함,
상대에게 쓰라린 상처를 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 의미도 모르는
비극적인 순진함,
노래하는 소년은,
의도하지도 연출하지도 않은
그 자체의 모습으로 순수하게,
이미 시 속 소년의 모습을 투영한다.
이 연출 속에서,
나는 '인생의 단계'라는
의미를 본다.
괴테도, 슈베르트도,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도,
바바라 보니도,
빈 소년 합창단의
솔로이스트도,
이 시와 가곡 속에서
'인생의 단계'라는 의미를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나를 용서하리라 믿는다.
이것은 예술의 수용자요,
또 다른 해석자이며,
창작자이자,
최종 종착지인,
감상자가, 감상자 됨을 만끽하며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지는 장미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보면서,
동시에 세 명의 성악가를 통해,
완숙해지는 인생의 단계를 듣는다.
문득 궁금해진다.
초년부터 노년까지
\모든 연령층의 독자가
두루 드나드는 이 공간에서,
어느 연주가 가장
깊은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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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란 가요무대, 장윤정 가요무대, 윤수현 가요무대 , 괴테, 슈베르트 들장미
靑山 노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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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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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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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뱃사공
장윤정트위스트
여고졸업반
나하나의사랑
여자의일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