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4쿼터 경기 종료를 알리는 부저가 울렸다. 電光板(전광판)의 스코어는 67對 63. 지난해 정규 시즌 9위에 불과했던 TG(舊 삼보) 엑써스가 플레이 오프 진출에 이어 챔피언 결정전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2002-2003 프로 농구 대회 챔피언 결정 6차전을 치른 지난 4월13일. 2000여 명의 농구 팬들로 가득 찬 대구 실내 체육관은 흥분에 휩싸였다. 프로 농구 출범 이후 정규 시즌 3위 팀이 우승하기는 처음 있는 일인데다 그 상대가 지난해 우승팀인 대구 동양이었기 때문. 동양은 이번 정규 시즌에서도 38승16패로 1위를 차지, 큰 이변이 없는 한 무난하게 2연패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했던 팀이다.
그렇듯 강팀인 동양을 4승2패(챔피언 결정전은 7전 4先勝制)로 제압하고 우승 神話(신화)를 일궈낸 TG 엑써스 선수들은 서로에게 샴페인을 미친 듯이 뿌려 댔고, 감독 데뷔 첫 해에 우승 고지를 점령한 전창진 감독은 큰 덩치에도 아랑곳 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선수들은 그런 감독을 하늘 높이 헹가래 쳐 주었고, 때맞춰 그룹 퀸의 「We are the champions」가 울려 퍼지자 땀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관중석을 향해 그동안 응원해 준 데 대해 감사의 큰절을 올렸다.
뒤이어 신문과 방송 등 각종 언론 매체들의 카메라가 은퇴를 앞두고 老壯(노장) 鬪魂(투혼)을 발휘한 허재와 MVP의 영예를 안은 傭兵(용병) 데이비드 잭슨 쪽으로 몰렸다. 그러나 관중석에 있던 수많은 팬들의 시선은 이번 대회가 낳은 최고의 농구 스타 金周成(김주성·24)에게 쏠려 있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한 편의 감동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그의 가족을 보고 있었다.
선수들이 관중석을 향해 큰절을 올린 후 하나 둘 흩어질 무렵 金周成은 관중석 앞으로 다가와 누군가를 찾았다. 다름 아닌 아버지 金德煥(김덕환·53)씨와 어머니 李英順(이영순·44)씨였다. 경기 내내 가슴 졸이며 아들을 지켜봤을 부모님.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코트로 나오게 했고, 金씨 부부는 불편한 걸음걸이로 관중석을 빠져나와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 세상 누구보다 더 듬직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의 품에 안겼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아버지나 등이 휘어 목과 어깨가 맞닿아 있는 어머니의 키는 겨우 아들의 허리 부근에 닿아 있었다.
金周成은 「이분들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삶의 座標(좌표)요 스승」이라는 듯 아버지와 어머니를 萬人(만인)이 보는 앞에서 꼭 껴안았다. 늘 말 없고 부끄러움이 많아 「수줍은 소년」으로 불리는 그였지만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당당한 청년이었다. 아들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지나 않을까 늘 勞心焦思(노심초사)해 왔다는 金씨 부부도 이날 만큼은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키 큰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었다.
안으면 곧 바스라질 것처럼 작고 아담한 체구의 부부 사이에서 어떻게 저렇게 크고 잘생긴 아들이 태어났을까. 金周成과 그의 부모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아들을 「한국 농구의 거목」으로 키운 金德煥·李英順씨 부부. 이 또한 장애인에 대한 偏見(편견)이요, 섣부른 추측일지 모르나 살아온 나날이 결코 평탄치 않았을 이 부부의 삶이 문득 궁금해졌다.
연립주택에 세 들어 사는 부모
필자가 金德煥·李英順씨 부부를 만나기 위해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집을 찾은 건 지난 5월 초. TG 엑써스가 한국 프로 농구 챔피언으로 登極(등극)한 지 꼭 보름 후였다. 그즈음 金周成을 비롯한 TG 선수들은 갖가지 우승 축하 기념 이벤트와 팬 사인회 및 사회단체들이 마련한 초청 행사에 참가하느라 시즌 때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金周成이 집에 머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들어오는데, 그나마 피곤해서 곧바로 쓰러져 자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다는 게 어머니 李英順씨의 설명이었다.
할 수 없이 부모님만 먼저 만나기로 약속하고 찾아간 날은 장마가 한 달 앞당겨 온 듯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金씨 부부가 사는 곳은 사당동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부근에 위치한, 아주 오래되고 낡은 동네였다. 어딘지 모르게 1970년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필자가 복잡하고 좁은 골목길에 어렵사리 차를 세우고 막 우산을 펴는데 金德煥씨가 미리 마중을 나왔던지 골목 어귀에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불편한 다리 쪽 바짓가랑이가 비에 젖을세라 거의 무릎 부근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논에 물꼬를 트기 위해 삽을 들고 나온 농부 같았다.
『집 찾기가 어렵지 않습디까? 저희가 나가면 되는디, 먼 걸음하게 해서 죄송헙니다. 비가 오면 집사람 몸이 더 안 좋아져서…. 누추허지만 집으로 가시지요』
손에 우산을 들고 있는데도 金씨는 자꾸만 자신의 우산을 필자에게 받쳐 주려 애를 썼다. 심하게 저는 다리 때문에 자신의 한쪽 어깨가 다 젖어도 그는 고집을 접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서 시골 사람 특유의 情과 포근함이 묻어 났다.
金씨 부부가 세 들어 사는 집은 지은 지 2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3층짜리 연립주택. 좁은 골목길을 사이로 비슷한 모양의 연립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서인지 집안은 몹시 어둡고 답답해 보였다. 천장도 일반 주택이나 아파트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金周成의 키라면 머리가 천장에 거의 달락말락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세 8000만원짜린데, 올 12월이면 계약 기간이 끝나요. 남들은 좁다고들 하는디, 우리 네 식구헌테는 궁궐이나 진배없었어요. 남의 집이나마 우리 식구만 오붓하게 살 수 있는 집을 갖기는 이 집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여기로 이사했을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하구만요』
곁에 앉아서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인 李씨도 그날이 떠오르는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金周成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것 같다. 하관이 긴 편인 얼굴도 그렇지만 무슨 말만 하면 소녀처럼 수줍게 웃기만 하는 표정이 더욱 그렇다.
여동생은 실업팀 배구 선수
스무 평 남짓한 집은 부엌이 딸린 거실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모두 세 개의 방이 배치된 구조였다. 그 중 안방은 金씨 부부가 쓰고 건너편의 두 방을 아들 金周成과 딸 金香蘭(김향란·22)이 쓰고 있었다.
『둘 다 합숙소에서 생활하니까 아이들 방은 1년 내내 비어 있다시피 해요. 참, 우리 딸도 운동 선수라는 거 알고 계신가요? 주성이보다 2년 늦게 본 아인데, 배구 선숩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흥국생명에서 뛰고 있지요. 숙소가 용인에 있어 놔서 주말에만 잠깐씩 다녀가요. 주성이도 그렇고. 그나마 시즌 때는 한 번도 못 왔지요. 그렁게 이 집에는 우리 둘만 사는 셈이어요. 둘이 사는 집으로 이만허면 부족헐 것이 없지요』
金周成이 釜山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약하긴 하지만 계속 호남 사투리를 썼다. 그제서야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金씨는 긴 한숨을 토해낸 후 전라북도 장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를 토막토막 들려 주었다.
필자가 「토막토막」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金씨가 말이 많지 않은데다 그냥 속으로 다 삭이며 살아서인지 말을 많이 아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이라면 소설 몇 권이라도 쓸 듯이 줄줄이 읊어 대는 사람들하고는 이야기하는 폼부터가 달랐다.
『전라도에서 먼 경상도 땅으로 간 것은 요 제 다리 때문이지요. 촌에서 살라믄 농사를 지어야 허는디 다리가 이렇게 생겨놔서 일을 헐 수가 있어야죠』
먹고 살기 바빠 사실 어떻게 살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金씨가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부인 李씨가 조용히 일어나 주방 쪽으로 가더니 쟁반에 오렌지 주스 세 잔을 들고 왔다. 자기 집안인데도 걸음걸이가 꼭 빙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는데도 몸이 아파요. 아이들 어렸을 적에는 안 그랬는데, 먹고 살 만해지니까 움직이는 게 조금씩 불편하더니 요즘 와서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요. 그래서 빨래며 청소 같은 집안 일도 애들 아버지가 다 하고 저는 그냥 누워 있을 때가 많습니다』
金씨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다는 아내 李英順씨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곤 오렌지 주스를 막걸리 마시듯 한입에 털어넣더니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서로의 불편함 채워 주고 싶어 결혼한 부부
金씨 부부는 둘 다 전북 장수 읍내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산골 마을에서 小作農(소작농)의 아들 딸로 태어났다. 없는 살림에 재산 밑천인 듯 형제는 많아 金씨는 6남3녀 중 차남으로, 李씨는 2남5녀 중 장녀로 복작거리며 자랐다.
『그때는 세 끼 굶지 않으면 잘산다고 할 정도로 다들 사는 형편들이 어려웠어요. 그러다 본게 몸이 아파도 웬만허면 참고 살았지요. 다급할 때만 이웃 동네에 있는 의원에 가 약을 지어 묵거나 침을 맞았는디, 지금 생각혀 보믄 그 당시 의원은 면허는커녕 정식교육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고등학교만 나와도 배운 사람 취급을 받던 시절이니까 그럴 만하지요』
두 사람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金씨의 경우 세 살 되던 해 한쪽 다리가 빠져서 한의원을 찾았다. 그런데 의사가 침을 놓으며 신경을 잘못 건드렸던지 오른쪽 다리에 마비증세가 왔다. 그 후 오른쪽 다리는 남의 것인 양 감각이 없었고,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치료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흔히들 제 걷는 모양새만 보고 소아마비로 아는 분들이 많은디, 전 소아마비는 아닙니다. 소아마비일 것 같으면 살기가 훨씬 덜 퍽퍽했을 것이구만요. 소아마비는 그래도 다리를 마음대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그게 안 돼 앉아 있을 때도 이렇게 다리를 쭉 펴고 있어야 허요. 그러니 몸을 많이 써야 하는 농사 일을 못 헐 수밖에요』
부인 李씨도 두 살 때까지는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크고 건강한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세 살이 될 무렵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갑자기 가슴이 툭 튀어나오고 등이 굽으면서 흔히 말하는 곱사등이가 되었다. 이후 그들은 외롭고 힘겨운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두 사람이 중매로 만나 결혼한 것은 1978년 봄. 각각 나이 스물아홉과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金씨는 아내의 첫 인상에 대해 『막내동생처럼 귀엽고 예뻤다』고 하고, 李씨는 『삼촌처럼 자상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고향에서 식을 올린 직후 부부는 양가에서 마련해 준 돈 80만원을 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해운대 부근 달동네에 전세 70만원짜리 방을 얻어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부인 李英順씨에 의하면 두 사람이 눕고 나면 자투리 공간이 거의 없는 그곳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길렀다.
『저희가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간 것은 이 사람 오빠 때문이었어요. 처남은 당시 부산 서면 시장에서 靑果物商(청과물상)을 혔는디, 잘허믄 利文(이문)이 많이 남는다고 저보고 와서 거들라고 허더라구요. 그래서 갔는디 생각했던 것보다 잘 안 되았어요. 그래가지고 몇 달 만에 그만두고 다닌 곳이 신발공장이구만요』
1970년대 말 부산은 운동화 수출로 꽤 많은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군소 하청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들어섰는데, 그 중에는 무허가 공장들이 많았다. 공장이라고 해봐야 달동네에 있는 가정집을 개조했거나 공터에 천막을 치고 할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다. 직원도 열 명 안팎이었고, 대부분 부녀자들이었다. 이들이 공장에서 하는 일은 하루 종일 앉아서 운동화 밑창을 붙이거나 끈을 만드는 일이었다.
『다리가 이러니까 일할 곳도 마땅치 않은데다 받아 주는 데가 거의 없었어요. 그나마 신발 공장에 취직헌 것도 몇 날 며칠 찾아가 통사정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다리를 많이 쓰지 않고 그냥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장애인이라면 무조건 고개를 젓던 시대니까 누굴 탓할 수도 없었구만요』
아이를 가진 것 자체가 축복
새벽에 나가 밤 늦게 들어오는 고된 일과의 연속인데다 하루 종일 본드와 신나 냄새에 취해 머리가 지끈거리는데도 金씨는 힘든지 몰랐다. 그저 직장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운이 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한 직원은 金씨가 유일했다. 업체不渡(부도)나 공금횡령으로 몇 달씩 월급이 나오지 않는데도 金씨는 결근하거나 늑장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해가 바뀌었고, 부부 사이에는 첫아이인 金周成(김주성)이 태어났다. 정상적인 몸이 아님에도 부인 李씨는 아들을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주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낳았다. 2년 후에 낳은 딸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는 자꾸 병원에 가서 낳으라고 했는데 제가 집에서 낳겠다고 했어요. 돈도 돈이지만 낯선 사람들한테 제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지요. 그리고 의사가 없어도 혼자서 낳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가진 것 자체가 저한테는 더 없는 축복이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열 달을 기다렸으니까요. 낳을 때 하루 종일 진통을 했다는데도 아팠던 기억이 없습니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설레고 행복한지 李씨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周成이는 낳을 때부터 팔다리가 유난히 길었어요. 어떻게 된 게 이제 막 태어난 애가 百日(백일)은 된 것 같다며 다들 놀라워했지요』
그렇지만 그 당시엔 李씨도 아들의 키가 지금처럼 크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친정 식구들을 닮아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크려니 했을 뿐이다.
『저희 친정 식구들 체격이 상당히 좋은 편이에요. 오빠나 동생들 키가 모두 180cm를 넘어요. 옛날 분 치고는 아주 큰 편에 속하는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어머니 키가 170cm 정도 되시거든요』
흥국생명에서 배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딸 金香蘭도 키가 180cm가 넘는 것으로 보아 金周成의 키는 확실히 외가 쪽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전주에 살고 있는 외사촌 둘도 현재 배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데 모두 180cm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李씨도 작은 키는 아니다. 척추 측만증을 앓지 않았더라면 李씨의 키도 170cm는 족히 넘지 않았을까 싶다.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李씨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몸이 불편한지 자꾸만 자세를 바꾸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안색도 처음과 많이 달랐다. 시간을 더 끌다가는 몸살이 날 것 같아 하루나 이틀 뒤 한 번 더 오겠노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부부도 어디 갈 데가 있는지 외출 준비를 했다.
『요새 서초동에 있는 한 醫療機器(의료기기) 판매 센터에서 무료로 물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며칠 받아 보고 효과가 있으면 의료기를 구입할까 헙니다. 周成이는 무조건 사라고 허는디 비싼 돈 들여 사 놓고 無用之物(무용지물)이 되면 어떡허나 혀서 미리 검증을 좀 하고 있는 것이구만요』
아내의 손을 꼭 붙들고 지난해 여름 아들이 사 주었다는 장애인용 승용차로 향하는 金씨의 뒷모습이 참 따뜻해 보였다.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살던 때
다음날 아침 다시 사당동으로 향했다. 전날 밤 金周成으로부터 오전에 1시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TG 球團 측에서 선수와 가족들을 초청해 호텔에서 조촐한 저녁 식사 겸 祝賀宴(축하연)을 열기로 한 날이었다. 날씨는 전날과 달리 화창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전화도 없이 잘 찾아오셨네요?』
초인종을 누르자 고개를 한껏 숙인 金周成이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문을 열어 주며 한 말이었다. 전날 필자가 다녀간 이야기를 미처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金周成이 상의 셔츠를 입는 동안 그의 방을 구경했다. 세 평이 될까 말까한 방은 싱글 침대 하나만으로도 餘分(여분)의 공간이 없을 정도로 꽉 차 보였다. 게다가 침대도 보통 크기여서 그가 누우면 정강이 아래쪽으로는 空中(공중)에 붕 뜰 것 같았다.
『다리를 좀 접고 자면 되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어요. 釜山에 살 때는 방이 너무 좁아 對角線(대각선)으로 잤는걸요, 뭐. 그것도 네 식구가 한 방에서 자야 했기 때문에 동생이랑 부모님이 많이 불편하셨을 거예요. 근데 전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식구들이 늘 함께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소문대로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게 속이 꽉 찬 배추 같았다. 기회만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된 공간을 갖고 싶어 안달하는 요즘 20代들과는 많이 달랐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부모님을 꼽곤 하던 이 거대한 靑年(청년)은 『나는 너무 평범하고 순탄하게 자랐기 때문에 뭔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면 실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부터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전 저희 부모님이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과 다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너무 가난해서 불편한 건 있었지만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저희 남매를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공장에서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늘 따뜻한 밥을 지어 놓고 저희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으니까요. 그리고 「남에게 해 끼치지 말고 항상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配慮(배려)하며 살라」는 충고를 두 분 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부모님의 반대
그는 신체적인 결함에도 늘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성실하기까지 한 부모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가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기어이 同行(동행)했다는 것이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장난감이나 인형을 사 달라고 졸라 댄 적도 없고, 매일 콩자반에 김치만 주는데도 반찬 투정 한 번 없이 밥을 잘 먹었다. 키에 비해 위가 작은 편인지 金周成은 하루에 네 끼 이상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어디 밖에만 나갔다 오면 밥을 찾아 이웃 주민들은 『너처럼 군것질 모르고 밥 잘 먹는 아이는 열 명이라도 키우겠다』며 金씨 부부를 몹시 부러워했다고 한다.
『周成이의 키는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자란 게 아니고 유치원 때부터 꾸준히 자랐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벌써 150cm를 넘었으니까 또래 아이들보다 늘 머리 하나가 더 있는 키였지요. 그런데 키에 비해 몸이 너무 약했습니다. 키는 또래 아이들과 월등하게 차이가 나면서도 체중은 비슷했지요』
그 때문에 金씨 부부는 아들이 운동 선수가 되는 걸 극구 반대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부모 몰래 높이뛰기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걸 알고 학교 육상부로 찾아가 끌고 오다시피 데려온 적도 있다.
『주성이가 키가 크면서도 순발력이 좋으니까 무슨 운동이든 잘하겠다며 탐을 내는 선생님들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도 못하게 한 건 저희 집 형편이 운동 선수를 뒷받침해 줄 만큼 넉넉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몸이 약해 툭하면 쓰러졌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누구의 권유도 없이 스스로 하고 싶다며 불태우던 농구 熱情(열정)까지 잠재우지는 못했다.
中1 때 키 180cm
金周成이 농구에 관심을 갖고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이 무렵 그의 키는 이미 180cm에 육박했고, 그는 당시 중고생 사이에 한창 유행이었던 「스리 온 스리(3대 3) 길거리 농구」에 푹 빠져 있었다.
『농구 선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는 우연히 친구 집에서 김영만 선배가 뛰는 중앙大 경기를 보고 나서였어요. 그냥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하는 동네 농구와는 차원이 달라 굉장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잘하면 대학도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니까 한번 도전해 보고 싶더라구요. 근데 제가 다니는 부산 해운대 중학교에는 농구부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농구 선수가 될 수 있을까. 몇 날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학교 체육 선생님에게 부탁해 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담임이 체육 교사여서 그는 방과 후 相談(상담) 요청을 했다. 그리고 농구 선수가 되고 싶으니 길을 좀 터달라고 매달렸다.
『가정방문을 통해 저희 집 사정을 훤히 꿰고 있던 선생님은 처음에 반대하셨어요. 체력 소모가 많은 농구 선수가 되기에는 몸이 허약한데다 집안 형편까지 어려워 여러 가지로 힘들겠다고 판단하신 거죠. 그렇지만 저도 그냥 장난 삼아 한번 해보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이 열린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하늘이 도왔는지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체육담당 박선평 교사가 3학년 때도 담임이 되었다.
金周成은 다시 상담을 했고, 담임은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제자가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감복해 다른 학교로 전학해 농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도록 모든 수속과 절차를 밟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가능성 테스트를 통해 장학금까지 받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진학한 학교가 부산의 농구 명문 東亞高(동아고)였다. 이 학교는 부산 中央高(중앙고)와 더불어 수많은 농구 스타들을 배출했다. 현재 프로 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주희정(삼성), 조우현(LG), 신동한(SBS) 등이 그보다 두세 해 먼저 졸업한 선배이고, 박지현(동양)은 동기다.
농구 시작 1년 만에 청소년 대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솔직히 좀 따라가기가 힘들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실력을 연마해 온 친구들에 비하면 기술적으로도 한참 뒤쳐져 있었고, 또 체력적인 한계를 극복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체육관을 스무 바퀴씩 돌았는데 저 같은 경우 열 바퀴만 돌아도 벌써 기진맥진해져서 훈련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다 집까지 멀어 잠자리에 들 때면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늘 천근 만근이었습니다』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훈련에 불만을 품거나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건 부모님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남매를 키우며 꿋꿋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 아버지만 생각하면 힘이 저절로 솟구쳤던 것이다.
『늦게 시작한 만큼 피곤하고 힘들어도 남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하고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단체훈련이 끝난 후에도 혼자 남아 운동장을 돌며 개인 운동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다락 문고리에 철사줄로 링을 만들어 놓고 슈팅 연습을 했어요』
피나는 노력 덕분인지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키가 이미 190cm를 넘어 고교 선수 중 최장신이라는 소문이 퍼져 하루는 중앙大 정봉섭 체육부장이 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 金周成이 연습하는 걸 내내 지켜보더니 운동화며 트레이닝복 등 운동 용품 일체를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곤 주기적으로 방문해 운동용품뿐만 아니라 용돈까지 손에 쥐어 주며 『힘내라』며 등을 두들겨 주곤 했다. 金周成에게 정봉섭 부장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든든하고 따뜻한 삼촌 같은 사람이었다.
『제가 人福(인복)을 타고 났는지 정봉섭 부장님말고도 도와주신 분들이 참 많았어요. 이상범 감독님은 거의 한 가족처럼 지내다시피 했고, 우현(조우현)이 형과 형의 어머니는 우리 집이 너무 멀다며 자기 집에서 지내도록 한 뒤, 친동생 친어머니처럼 저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또 희정이(주희정) 형의 할머니는 사는 형편이 우리 집과 별 차이가 없는데도 제가 놀러 갈 때마다 용돈을 주시곤 했죠. 그 정 많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아직도 믿겨지지 않아요』
농구 덕분에 그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농구 실력도 키와 함께 쑥쑥 자랐다. 그 결과 농구를 시작한 지 딱 1년 만인 1996년 청소년 대표에 발탁되어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았다.
이때부터는 서울의 주요 대학 감독들이 그를 서로 자기네 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 물밑 경쟁을 했다. 전통적으로 동아高 출신 선수들은 중앙大로 진학한다는 걸 알면서도 각기 다른 조건과 혜택을 제시하며 스카우트 작전을 폈다. 金周成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 무렵 농구판에는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서울의 모 대학 감독이 그의 부모님에게 수억원의 수표를 내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글쎄요, 워낙 말씀이 없는 분들이라서 그 대학의 감독이 찾아온 건 알고 있지만 그렇게 큰돈을 들고 왔다는 얘기는 하지 않던데요. 분명한 건 수억원이 아니라 수십억원을 들고 왔어도 저희 부모님은 모두 거절하셨을 거라는 겁니다. 부모님은 제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信義(신의)를 저버릴까 봐 늘 걱정이셨거든요. 특히 어머니는 저를 볼 때마다 「어려울 때 도와주신 분들에게 등을 보이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강조하시곤 하셨어요』
결국 그는 일말의 가능성도 내보이지 않은 채 모든 대학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중앙大를 택했다. 그리고 선배인 신동한, 송영진(LG), 황진원(코리아텐더) 등과 함께 허동택(허재·강동희·김유택) 트리오가 활약하던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중앙大를 대학 농구의 最强팀으로 만들었다. 연세大와 고려大가 兩分(양분)해 가던 주요 대회 타이틀을 모조리 獨食(독식)하며 제2의 중앙大 전성시대를 연 것이다.
공장 廢業으로 失業者가 된 아버지
아들이 대학 농구 간판 스타로 급부상하고 있을 무렵 부산에 있던 金씨 부부는 生活苦(생활고) 때문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98년 IMF 寒波(한파)가 닥치면서 신발 업체들이 줄줄이 破産宣告(파산선고)를 하는 바람에 金씨가 다니던 공장도 廢業(폐업)하고 만 것이다. 10년 직장이었다고는 하지만 퇴직금이 있는 회사가 아니었기에 金씨는 그야말로 빈 손으로 일터를 나와야 했다.
1998년 이후 金씨는 지금껏 실업자로 살고 있다. 서울을 오가며 부지런히 일거리를 찾았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장애인을 고용하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金씨처럼 나이 든 사람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金씨는 아들이 걱정하고 신경 쓸까 봐 어렵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직장도 잃고 아이들도 둘 다 떠난 마당에 더 이상 부산에 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 신림동에 전셋집을 하나 얻어 上京(상경)하게 되었다.
1999년 2월에 이사했으니까 올해로 서울 생활 5년째. 金씨 부부는 특유의 親和力(친화력)으로 많은 이웃을 만들었다.
『저희 아버지가 겉으로 봐서는 말씀도 없고 좀 무뚝뚝한 성격인 듯하지만 실은 여리고 정이 아주 많은 분이세요. 그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상처도 많이 입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저희들 앞에서는 속상해하거나 남 욕하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추구한 無所有의 삶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의 한 기억 속에는 밤 늦게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가 평상에 쓰러져 흐느끼듯 뭐라고 중얼거리던 모습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여동생과 둘이서 아버지의 양말과 상의를 벗긴 후 방으로 옮기던 기억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마도 보통 아버지들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아픈 內面(내면)을 처음으로 본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막연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우리가 혹시나 당신이 不具(불구)라는 사실 때문에 상처를 입을까 봐 밖에서 온갖 冷待(냉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집에서는 정상인들과 똑같이 대접받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셨던 거죠. 술과 담배로 견디면서 말입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늘 과묵한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弱者(약자)에게 강하고 强者(강자)에게 약한 세상이 아버지에게만 관대했을 리 없다. 金周成이 성공해서 어머니 아버지가 견뎌 온 세월을 보상해 주고 싶다는 각오를 다진 건 그때부터였다. 나름대로 고집 있고 오기 있던 아버지에 비하면 어머니 李씨는 그야말로 천사였다. 용서하고 좀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살면 화낼 일이 없다는 게 어머니의 人生之論(인생지론)이었다.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어떤 被害意識(피해의식) 같은 게 자리잡을 틈이 없었다.
『어머니는 굶지 않을 만큼의 糧食(양식)과 눈과 비를 가릴 수 있는 집만 있으면 되지 더 욕심부려 뭐 하겠느냐는 無所有(무소유)의 삶을 실천해 오신 분이에요. 그런 어머니의 삶은 그대로 제 안의 신앙이자 종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金周成이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봤다. 행사 때문에 오전 10시에는 나가 봐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 나머지 이야기는 다시 부모님에게 듣기로 하고 외출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는 오후에 있을 祝賀宴 때문인지 검정색 양복 차림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항공모함(김주성의 발 사이즈는 330mm) 같던 구두가 그의 발에 꼭 맞는다는 게 신기했다.
각종 대회마다 MVP와 기록상을 수상하며 대학 농구 최고의 스타로 자리잡은 金周成은 2001년 5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東아시아대회에 출전해 국제적인 스타로서의 성장 가능성도 검증받았다.
중국 격파의 恨을 풀다
이 대회에서 그는 한국이 숙적 中國을 100對 97로 제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움직이는 萬里長城(만리장성)」이라는 닉네임으로 NBA에서 뛰고 있는 왕즈즈(214cm, 휴스턴 로케츠)와 야오밍(223cm, 댈러스 매버릭스)을 철저히 차단한 게 바로 金周成이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근 20년 만에 中國을 이긴 이 경기에서 金周成은 28득점을 했다. 長身(장신)임에도 빠르기로 소문난 金周成 특유의 스피드와 유연성으로 두 巨人을 꽁꽁 묶어 놓은 뒤 코트를 마음껏 누빈 것이다.
이 경기를 지켜본 농구 전문가들은 金周成을 NBA에 진출해도 위축되지 않고 훌륭하게 적응할 선수로 평가했다. 이에 대한 보답인 듯 그는 이듬해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도 서장훈과 투 톱을 이루며 왕즈즈와 야오밍의 공격을 無力化(무력화)시켰다. 결국 한국이 102 對 100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는 데 수훈갑 선수가 되었다.
萬里長城에 막혀 긴 침체기에 빠져 있는 듯했던 한국 남자 농구를 아시아 最强(최강)으로 끌어올리며 활성화시킨 것이다. 이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金周成은 그 해 12월에 열린 百想(백상)체육대상 시상식에서 농구 부문 수상자가 되었다. 아울러 그 해 1월에는 프로 농구 드래프트 종합 1순위 선수로 지명되어 삼보 TG 엑써스 유니폼을 입었다. 연봉 상한선인 8000만원을 받기로 사인한 후였다. 드래프트制 도입 전이라면 최소한 10억원은 받을 선수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전창진 감독에 의해 金周成의 이름이 呼名(호명)되는 순간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농구 천재 허재였다. 2002-2003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허재는 金周成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승에 도전, 자신의 농구 인생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다며 그가 추첨되기를 주문을 외다시피 했었다.
서장훈과의 1인자 대결
『TG는 학교 선배님들이 많아 호흡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해서 꼭 우승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金周成이 TG 엑써스 유니폼을 입은 직후 모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포부다. 이 말은 1년여 후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입단 초기 농구 관계자들은 TG의 우승 가능성에 대해 그렇게 높은 확률을 두지 않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학 농구 최고 선수를 영입했다고는 하나 신인인 만큼 프로 무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할지 여부는 더 두고 봐야 한다는 것과 기존 선수들이 너무 노쇠하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주성이는 프로 데뷔 전부터 삼성의 서장훈 선수와 많이 비교되곤 했어요.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이죠』
대부분의 농구 관계자들은 서장훈의 우세를 점쳤다. 둘 다 장신임에도 스피드가 빠르고 유연성이 뛰어나다는 점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득점력이나 슛 블로킹은 물론 가장 중요한 파워 게임에서 단연 서장훈이 압도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전문가들은 대학 농구 때와 마찬가지로 金周成의 체력을 최대 약점으로 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金周成의 당시 체격 조건이 키 205cm에 몸무게 92kg인 데 반해 서장훈은 키 207cm에 몸무게 115kg이었다. 키는 겨우 2cm 차이인데 체중은 무려 20kg 이상 차이가 난 것이다.
『체력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못한 것 같아 주성이한테 죄스럽고 미안하고 그래요. 어렸을 때 좀더 잘 먹였더라면 몸이 훨씬 좋았을 텐데…』
가난 때문에 한참 크는 시기의 아들에게 야채만 먹인 것에 대해 金씨 부부는 몹시 가슴 아파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을 줄 아는데, 金周成의 경우 어렸을 때 고기 구경을 못해 지금도 좀 과하다 싶으면 바로 배탈이 나거나 체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회 내내 저희 부부는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주성이는 정규 시즌만 54게임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었잖아요. 그런데 플레이 오프까지 뛰었으니, 몸도 약한 애가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金周成은 이번 시즌에 플레이 오프 6강, 4강, 결정전까지 도합 67게임에 출전했으니 체력의 한계에 부딪쳤을 만도 하다. 체중이 무려 6kg이나 減量(감량)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럼에도 그는 평균 17점 득점에 9리바운드를 기록했을 정도로 코트를 종횡무진 누볐다.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은 정신력으로 버텼을 거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틀리지 않았음직하다.
아들이 사준 승용차로 아들 경기보러 다녀
金周成의 부모인 金德煥·李英順씨 부부를 두 번째 만난 날 오후 7시 30분. 서울 르네상스 호텔 한 연회석에서 이번 우승을 自祝하기 위해 TG 엑써스 구단 측이 마련한 선수 가족 모임이 있었다. 저녁 식사와 함께 그날의 감동을 되새기기 위해 설치된 대형 자료 화면을 보는 것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휴가를 받아 本國(본국)으로 돌아간 용병들을 제외한 선수 전원과 가족들이 참석했다. 金씨 부부도 모처럼 盛裝(성장)하고 다른 가족들 틈에 끼어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다시 보고 또 다시 봐도 또 눈물이 나네요. 얼마나 힘들었을까도 싶고. 그런데도 우리 주성이는 이기니까 하나도 힘들지 않더래요. 그러면서 저한테 그래요. 앞으로 해드리고 싶은 게 너무 많으니까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라구요. 그동안 받은 것도 많은데 뭘 자꾸 해주겠다는 건지…. 우리 주성이가 얼마나 효잔지, 그렇게 힘들고 지치도록 운동을 하고도 집에 오면 꼭 제 팔다리를 주물러 주곤 해요. 이번 대회를 끝내고 돌아온 날도 자다가 제가 앓는 소리를 좀 했던지 한밤중인데도 일어나 제 팔다리를 주물러 주더라구요』
어머니 李씨는 이제야 필자가 낯설지 않다는 듯 살짝 아들 자랑을 했다. 프로 무대에 데뷔한 이후 받은 상금이며 상품권은 모두 자신에게 주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월급을 다 써도 좋으니 언제든 사라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그 중에서 제일 값지게 받은 선물은 지난해 TG 입단과 함께 받은 돈으로 사준 승용차라고 한다.
『차가 있으니까 없던 발이 생긴 것처럼 너무 편하고 좋아요. 사실 저는 조금만 걸어도 몸이 많이 아프거든요. 그래서 지방 경기를 보러 갈 때면 아예 하루 묵고 오거나 아니면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차가 생기니까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金周成이 미리 받은 年俸(연봉)의 일부로 부모에게 사준 차는 그랜저 XG인데, 장애인용으로 주문 제작된 것이다.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金씨가 편하도록 왼쪽 다리로도 브레이크와 엑셀러레이터를 밟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부부는 이 승용차로 전국을 돌며 아들이 출전하는 경기를 觀戰(관전)했다. 정규 시즌 중 단 세 게임만 빠졌는데, 그날은 딸 향란이 출전하는 배구 경기와 겹쳐서 그쪽으로 갔다고 한다. 그렇게 여행을 하듯 돌아다녔더니 구입한 지 아직 1년도 안 되었는데 走行(주행) 거리가 3만km에 육박했다고 한다.
NBA를 꿈꾸며
李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남편 金씨는 아내를 위해 소담스럽게 담은 뷔페 음식 한 접시를 들고 왔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듯 많이 먹으라며 아내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저런 모습이 끝없는 시련과 가난 속에서도 아이들을 바르고 훌륭하게 키운 게 아닐까 싶었다. 한편 金周成은 다른 테이블에 동료 선수들과 앉아 한창 식사 중이었다. 필자도 무얼 좀 먹을까 하고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앉고 보니 전창진 감독과 농구 관계자들이 合席(합석)한 자리였다.
『주성이가 있는 한 저희는 내년에도 우승할 자신이 있습니다. 주성이의 이번 NBA 캠프 참가는 일종의 투자전략입니다. 능력 있는 선수는 더 큰 선수로 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사기 진작에도 좋고 실력도 더 향상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金周成은 5月 말 한 달 일정으로 미국으로 출국한다. 덴버 너게츠의 여름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번 훈련 참가는 TG 엑써스의 수석코치인 제이 험프리스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NBA에서 10년 동안 선수생활을 했고, 너게츠 코칭 스태프와는 특별한 親分(친분)을 쌓아 온 험프리스가 주선한 만큼 구단 측에서는 金周成이 NBA 선수들의 플레이를 경험할 더 없이 좋은 기회라고 했다. 金周成 본인 역시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제 꿈은 기회가 된다면 NBA에 진출해 더 좋은 선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NBA」에 유난히 힘을 주어 발음하는 金周成의 남다른 覺悟(각오)를 들었기 때문일까. 그의 키가 왠지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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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어디 신문이죠;;조선일보인가?;;중간중간 한자가 많군요;;
월간조선 이라는 잡지입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내년에는 꼭 동부가 우승하기를........
김주성 선수 참 대단하네요 신인상 받고 베스트5상까지 받았는데 정말 타팀으로 가지 않고 동부에 계속 남아줬으면 좋겠네요
게임 마치고 온 날에도 어머님께 안마를 해드린다는 대목은 정말 감동이군요...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