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
김정원
정작 당신은 맨발로 살면서 달구지 끄는 소에게는 짚신을 신기고
우렁이들 모꼬지하는 물꼬 곁, 삐비꽃 휘날리는 논둑에 저고리 걸친 삽을 꽂아두고, 난닝구 바람으로 백로인지 사람인지 모르게 허리 굽혀 벼논에서 종일 혼자 피를 뽑고
야산에서 솔잎과 삭정이 모은 땔나무를 지게로 나르고
자정까지 새끼 꼬아 가마니 짜서 닷새마다 한재장에 내다 팔고
자식들이 받은 표창장으로 안방을 도배하고
공책 찢어 바삭한 박하잎 말아 궐련 피우며 소똥과 검불과 왕겨 섞어 두엄을 만들고
둠벙에서 미꾸라지 잡아 추어탕 먹고 마루에서 문지방 베고 라디오를 듣다 낮잠에 빠지고
남은커녕 자기 새끼들에게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고
식은 구들장 지고 굼벵이처럼 웅크려 자는 아이들 추울까, 밥 지으려고 쌀 씻는 어머니 손 시릴까, 첫닭이 울면 자명종처럼 일어나 가마솥에 물 붓고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징 치고 꽹과리 두드리며 열두 발 상모가 허공을 가르는 농악대 따라서 얼쑤, 얼쑤 춤추고 노래하고
서당도 학교도 교회도 절에도 다니지 않아 허영의 지식과 출세와 장수와 인연이 멀고
딸은 일찌감치 방직공장에 보내고, 아들이 명문고등학교 진학 시험 보려고 광주에 가는 날 아침에 낙방하라고 한울님께 빌고
한 해를 시작하는 설날이지만, 운수나 사주나 토정비결 볼 생각 없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먹물들처럼 깊이 고민하지 않고
지구에 부담되지 않게 장작이 된 몸으로
미루나무 우듬지 까치둥지만 한 초가에서 잠결에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간
뒤따르고 싶은 평민이어서 빛나는
나의 아버지!
줄탁
하늘의 갈색 섬 매 한 마리가
내리꽂히기 직전, 강변 갈대숲에
오금이 저리는 뱁새들처럼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
톡,
톡,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
음파 탐지기같이 하늘 어미가
그 신호의 출처를 찾아서
탁,
탁,
쪼아 환하게 통로를 내주자
이윽고 삐약삐약
천지에 가득한 새싹들의 가락歌樂
갈망은 소통을 부르고
소통은 봄날을 부화한다
차창에 붙박힌 한 사람을 보았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내일모레가 설날이었다. 그러니까 세모의 새벽 다섯 시였다. 어머니가 자취방으로 전화를 하셨다. 비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청천벽력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저녁밥을 드시고 평상시처럼 주무시다가 편히 가셨다고 했다. 허무했다. 무논 같은 천성대로 이웃과 자연과 맨발로 어울리며 순풍에 돛단배처럼 살다, 훌쩍, 하늘로 날아간 신천옹이었다. 향년 67세!
작은형과 택시를 타고 광주에서 담양으로 달려갔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아이 얼굴처럼, 아버지 일생처럼 고요하고 깨끗했다. 태어나 중학교 다닐 때까지, 아버지가 손수 지은 삼간초가에서 함께 산 시간이, 행복한 인연이 압축한 단편영화처럼 펼쳐졌다. 가난한 세월이 질주했다. 그 사이 차창에 붙박인 한 사람을 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