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을 포기하다
5월 15일이 되었을 때 프랑스의 상황(常況)은 절망(切望)으로 급변(急變)했습니다.
전날 네덜란드는 폭탄(爆彈)의 비(雨)에 놀라 더 이상의 항전(抗戰)을 포기(抛棄)하고 백기(白旗)를 들었고,
로테르담(Rotterdam) 인근(隣近)까지 진격(進擊)해 들어갔던 프랑스 제7군은 네덜란드에 고립(孤立)되어 서서히 말라죽어갔습니다.
세당을 돌파(突婆)한 A집단군은 놀랄만한 속도(速度)로 영불해협(英佛海峽)을 향해 돌격(突擊)해 들어가면서 저지대국가에 있던 연합군은 급속히 퇴로(退路)가 차단(遮斷)되어 갔습니다.
↑공습 전의 로테르담(위), 공습 후의 로테르담(중간) 폭격으로 폐허로 변한 로테르담
5월 20일이 되자 상황(狀況)은 극명(克明)해졌습니다.
A집단군 선도부대(先導部隊)가 해안(海岸)에 다다랐고 동시에 B집단군도 함께 압박(壓迫)을 가해 들어오면서 연합군 주력(聯合軍主力)인 제1집단군은 완전히 고립(孤立)되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드골(Charles de Gaulle, 1890년 11월 22일~ 1970년 11월 9일)이 지휘(指揮)하는 기갑부대(機甲部隊)의 단말마적(斷末魔的)인 반격(反擊)과 2개 사단(師團)이 궤멸(潰滅)되면서도 끝까지 아미앵(Amiens)에서 저항(抵抗)한 영국원정군의 투혼(鬪魂)이 있었지만 마른의 기적(奇蹟)을 재현(再現)하지 못했습니다.
↑아미앵에서 격전을 치룬 후 후퇴하는 영국군, 프랑스 아미앵 대성당에서 지난 8일 열린 1차대전 아미앵 전투 100주년 기념식에서 주요 인사들이 성당을 둘러보는 모습.
[EPA=연합뉴스]
그보다 더한 것은 전의(戰意)를 상실(喪失)한 프랑스군의 행태(行態)였습니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닥치자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여파(餘派)가 남아서인지 급속도(急速度)로 싸울 의지(意志)를 포기(抛棄)했습니다.
사실 스톤(Stonne)에서 2대의 프랑스군 전차(戰車)가 13대의 독일군 전차를 격파(擊破)하기도 했던 것처럼 일선(一線)의 병사(兵士)들은 열심히 싸웠습니다.
문제(問題)는 이들을 통솔(統率)해서 전략적(戰略的)으로 전쟁을 지휘하는 자들의 태도(態度)였습니다.
↑스톤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결정타를 날린 프랑스 전차병, 하지만 이런 용전 분투와 달리 지휘부는 전쟁을 포기했습니다
결국 지휘부가 우왕좌왕(右往左往)하며 시간이 흐르자 시나브로 사병(士兵)들도 의지를 상실해 갔습니다.
20년 전에 그들의 아버지처럼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은 사라졌습니다.
반론(反論)이 있을 수 있지만 5월 20일을 넘어서며 프랑스군이 제대로 싸우지 않은 것은 주지(主旨)의 사실(事實)입니다.
독일군이 바쁘다는 이유로 항복(降伏)을 받아주지 않자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가 후속부대(後續部隊)에 항복을 애걸(哀乞)하는 굴욕적(屈辱的)인 모습까지도 연출(演出)되었습니다.
↑프랑스 포로. 프랑스 북부, 1940 년. 사진 : 독일 연방 문서 보관소
↑곳곳에서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모습이 연출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1884년 6월 18일 ~ 1970년 10월 10일)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세차례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고, 프랑스 공방전에서 프랑스 항복이후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구출되었다.
희망(希望)이 보이지 않자 영국 원정군 사령관(遠征軍司令官) 고트(John Standish Surtees Prendergast Vereker, 6th Viscount Gort, 1886년 7월 10일~1946년 3월 1일)는 본국(本國)에 철군 의사(撤軍意思)를 전했습니다.
지난 5월 9일 정권(政權)을 잡은 직후 독려(督勵)를 위해 파리에 갔지만 레이노( Paul Reynaud, 1878년 10월 15일~1966년 9월 21일) 프랑스 수상(首相)으로부터 "우리는 패(敗)했고 더 이상 방법(方法)이 없다"는 넋두리만 들었던 처칠은 즉각 철군(撤軍)을 수락(受諾)했습니다.
프랑스가 항전 의지(抗戰意志)가 없음을 확인(確認)했기에 귀중한 원정군을 사자 우리에 남겨놓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레이노(右)를 만난 후 처칠은 프랑스를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독일의 진격(進擊)은 그칠 줄 몰랐고 결국 40여만의 연합군 잔존 병력(聯合軍殘存兵力)을 됭케르크 (Dunkerque)의 해변(海邊)으로 몰아넣자 연합군은 해변(海邊)에서 몰살(沒殺) 될 위기(危機)에 놓였습니다.
분명히 이들을 처단할 칼자루를 독일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히틀러의 명령이 5월 24일 독일군에게 하달(下達)되었습니다.
"진격을 중지(中止)하라! 이제부터 루프트바페(Luftwaffe)가 연합군을 처단(處斷)한다."
↑각종 선박을 이용해 됭케르크에서 탈출하는 영국군
비록 3일 후 명령(命令)이 철회(撤回)되고 독일군의 탱크들은 다시 시동(始動)을 걸었지만 일초의 시간도 아까웠던 연합군에게는 무려 34만의 대병력이 안전(安佺)하게 영국으로 탈출(脫出)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희생(犧牲)을 마다하지 않았던 영국 해군과 공군의 놀라운 투혼(鬪魂)이 뒷받침되어 이루어진 기적(奇績)이었지만 영국군의 철군(撤軍)은 결론적(結論的)으로 홀로 남겨진 프랑스의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렸습니다.
↑신임 프랑스군 총사령관 웨이강(左)도 전임자 가믈랭(右) 못지않게 무능했습니다
이 당시 덩케르크 철수작전(撤收作戰)은 히틀러의 미스터리와 더불어 이후 인구(引咎)에 계속 회자(回刺)되지만 사실 진짜 이해(理解)하기 힘든 모습을 연출(演出)한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가믈랭이 5월 19일 웨이강(Maxime Weygand, 1867년 1월 21일~1965년 1월 28일)으로 교체(交替)되었지만 그 또한 무능(無能)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의 향방(向方)은 어쩌면 포위망(包圍網)에 고립(孤立)된 영국군의 구출(救出)에 많은 영향을 받을 상황(狀況)이었는데, 별다른 노력(努力)을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