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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을 마치고 항아리 곡선을 살펴보는 황충길 명장의 눈빛이 날카롭다. 황 명장은 "하느님 은총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은총에 보답하려면 더 혼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말한다. |
토방(土房)에 흙냄새가 가득하다.
나무방망이로 '퍽~퍽~' 흙 두들기는 소리와 '쏴아~쏴아~' 장맛비 퍼붓는 소리가 얼추 박자가 맞는다. 고적하면서도 애달픈 이중주다. 사진을 찍으려고 해
도 도무지 고개를 들지 않는다. 떡가래처럼 뽑아낸 점토를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물레를 돌려가며, 이따금 방망이로 쳐대며 틀을 잡는다. 그런데 시선을 거의 땅바닥에 둔 채 귀를 옹기에 바짝대고 물레를 돌리는 광경이 마냥 신기하다.
옹기가 제꼴을 갖추자 옹기 명장(名匠) 황충길(바오로, 70)씨가 고개를 들었다.
"명장은 손과 귀에도 눈이 달려 있나 봅니다?"
"선 잡는 거예요. 항아리 곡선."
"눈으로 봐야 선을 잡을 수 있잖아요?"
"그거야 손이랑 머리에 박혀 있지."
과연 명장다운 말이다. 충남 예산군에 있는 전통예산옹기의 황 명장은 17살 때부터 옹기를 만들었다. 아버지(황동월)와 할아버지(황춘백)도 옹기장이로 한 생을 살다 갔다.
그는 고용노동부가 숙련기술자들 가운데 최고 장인을 선정해 부여하는 '대한민국 명장(옹기부문)' 칭호를 1998년에 받았다. 옹기장이에게 낙인과도 같은 가난과 설움에서 벗어난 것은 그때부터다.
"난 옹기를 안 하려고 기를 썼지, 잘 만들려고 기를 쓰지 않았어. 하지만 어떡해. 아버님이 옹기 굽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나니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게 옹기밖에 없는 걸. 생각이고 자시고 식구들 입에 풀칠하려면 별 수 없었지."
**가난과 천대는 옹기장이의 숙명
1970년대 한 연구자료에 의하면, 그때까지도 전국의 도공이나 옹기점에 찾아가 선조의 종교를 물으면 십중팔구가 천주교라고 대답했다.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한 교우들은 옹기를 구워 내다 팔거나 화전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여자는 옹기를 머리에 이고, 남자는 등짐을 지고 다니면서 교우들 소식을 수소문하고, 신부들 은신처를 찾았다. 윤의병 신부의 군난소설 「은화」에 이런 장면이 자세히 나온다.
황 명장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천주학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쫓겨나 충청도 일대 옹기굽는 교우촌을 전전했다. 할아버지는 옹기점 뒷일을 거들며 기술을 배우고, 할머니는 옹기를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녔다. 부모의 삶도 그러했다. 황 명장은 "나 역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옹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조부모는 몸뚱이만 갖고 점말(옹기점 마을)을 찾아다녀도 밥은 굶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같은 천주교인이니까 먹고 살라고 잠자리와 쌀, 된장, 흙을 그냥 내준 거지. 어머니도 나를 업고 옹기를 팔러 다니셨는걸."
그는 가난과 사람들의 천대가 싫었다. 여름이면 땀에 젖은 속옷을 몇 번씩 짜입어가며 옹기를 만들고,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워가며 가마에 불을 넣어도 돌아오는 건 가난과 빚밖에 없었다. 또 어디를 가건 "옹기점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좋은 흙을 찾아 떠돌다 1975년 예산군 오가면 오촌리 10평 남짓한 움막에 정착했다. 하지만 플라스틱에 이어 냉장고까지 보급되면서 옹기는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다.
"죽어라 하고 만들어 놓으면 뭐해. 판매상들이 값을 후려쳐서 싣고 가는데. 일꾼들 품삯 떼주고, 빚낸 거 이자 갚고, 자식들 공부시키려면 실어보낼 수밖에 없어. 1983년 쯤일거야, 이 동네에서 나까지 네 집이 옹기를 구웠는데, 세 집이 못 버티고 야반도주했어. 그 사람들 떠난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나도 몇 년 뒤 그만두려고 하니까 어머니 아프시고, 또 몇 년 뒤 그만두려고 하니까 목돈 들어갈 우환이 생기고. 그래서 하늘의 뜻이니 여기서 눌러앉자고 단념한 거지." 그는 그 가난 속에서도 초등학생 아들 3명을 대전으로 내보내 공부시켰다.
"출세시키려고 보낸 게 아냐. '깡통을 찰지언정 옹기는 만들지 마라. 옹기 만드는 거 구경도 하지 마라'며 내보냈어.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지."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다. 96년 냉장고형 김칫독을 개발해 서울에서 열리는 농어민대축제에 올려보냈는데, 그 아이디어 제품으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이어 2년 뒤 명장으로 선정됐다. 그때부터 모든 게 불같이 일어났다. "1년 내내 신문사, 방송사, 잡지사에서 찾아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어. 전국에서 폭주하는 주문을 받느라 전화가 계속 통화 중이니까, 어떤 사람은 예산전화국에 '그 집 전화 고장났는데 왜 며칠 째 안 고치냐'고 항의를 했다더라고."
그는 여세를 몰아 미국 뉴욕 교민사회가 주최한 한가위 모국상품박람회에 옹기를 실어 보냈다. 담당 공무원은 "그걸 미국에 갖고 가서 뭐하려고 하냐?"며 시큰둥했지만, 박람회장에서 가장 먼저 매진된 게 그의 항아리였다. 교민들에게 항아리는 고향 풍경이 담긴 추억이자 향수였다. 덕분에 수출길이 열려 미국 메릴랜드주 주지사 감사장과 무역의 날 수출탑 도지사상(2005년)도 받았다.
**옹기는 고향이고 어머니다
그는 항아리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마당을 거닐며 "옹기는 한국인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까맣게 잊고 지낸 고향집 풍경이 떠올랐다.
어릴적 고향집 뒤뜰에 장독대가 있었다. 어머니는 초봄이 되면 "장맛을 버리면 한 해 음식을 다 버린다"며 정성스레 장을 담갔다. 여름에 마루 뒷문을 열면 항아리들이 키 순서대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독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는 어머니가 심어놓은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무슨 보물단지나 되는 듯이 아침 저녁으로 뒤뜰에 가서 항아리를 반짝반짝 닦았다.
그는 "정취도 정취지만 옹기가 숨을 쉬는 것은 정말 놀라운 과학적 원리"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흙이 옹기 만드는 점토야. 점토를 불에 구우면 미세기공이 생겨서 숨을 쉬어. 그 숨구멍으로 물은 통과하지 못해도 공기는 통과하거든. 창호지랑 똑같아. 정화와 발효가 그래서 이뤄지는 거야. 사람들이 언젠가 옹기의 숨구멍에 귀를 기울일 날이 올거야.
그의 전통예산옹기는 월 평균 1000명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그에게 명장 반열에 오른 비결을 묻자 "정성"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성이 부족하면 호박떡이 설익는다고 하잖아. 지성이면 감천이야. 난 지금도 좋은 흙을 찾기 위해 경북 고령, 전북 정읍 등지를 헤매고 다녀. 그리고 반드시 흙을 트럭에 실어 출발시키고나서 그 뒤를 따라와. 아버님이 가마 앞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듯이, 나도 작업장에서 흙받이 걸친 채로 죽으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
막내아들 진영(라우렌시오, 39)씨 내외가 그의 곁에서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다. 자식들에게 "깡통을 차더라도 옹기는 하지 마라"고 누누이 일렀지만 막내아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나섰다. 그 덕에 가업이 맥이 끊기지 않고 4대째 이어지고 있다.
"아들이 대를 잇겠다고 말하는 순간, 무거운 뭔가가 어깨를 콱 짓누르더라고. 내 삶과 고통을 저 녀석이 어떻게 감당하겠다고 나서는 건지 말이야. 내 십자가를 아들에게 떠넘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아들이 이틀이 멀다하고 야단을 맞으면서도 그럭저럭 잘 배우고 있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옹기와 천주교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다"며 "신자들은 옹기를 단순한 전통 용기가 아니라 신앙 선조의 고난과 열정,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상징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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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처럼 단단한 그의 손이 '돌돌돌' 돌아가는 물레를 타고 점토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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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장독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항아리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