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다니엘 13,1-9.15-17.19-30.33-62 요한 8,1-11
용서가 안 된다면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것인 이유
오늘 독서는 그 길고도 긴 수산나와 두 노인 이야기입니다.
두 노인이 다니엘 앞에 서기까지는 두 노인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은 수산나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나타나니까 자신들의 죄상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자신들이 수산나에게 덮어씌우려던 죄를 자신들이 다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두 노인에게는 다니엘이 원수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들의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분을 만나지 못하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유명 피아니스트 블라디스와프 스필만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주인공 스필만이 수많은 친구의 희생으로 살아남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이 되어 총 한 방이면 죽게 되지만, 독일군 장교는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는 그를 살려주고 음식과 옷까지 챙겨줍니다.
독일군에게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한 독일군에게 은혜를 입습니다.
그리고 그가 준 독일군 장교의 코트를 입고 다니다가 폴란드군에게 죽임을 당할 뻔도 합니다.
독일군 장교의 옷을 입었다는 말은 자기 가족과 친구를 죽인 독일을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간음한 여자에게 던질 돌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시며 당신 앞에서는 누구도 이웃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셨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은 가장 잔인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상이 드러나게 할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분 앞에서는 가능합니다.
자녀들이 부모 앞에서는 용서가 가능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은 나의 은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개통령이라 불리는 강형욱 조련사는 입질하는 개를 물에 빠트려버립니다.
물에 빠진 개는 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니면 자기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다른 개나 사람에게 입질할 수 없습니다.
개는 자기 생명의 은인 앞에서, 형제도 부모 앞에서, 그리고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을 하느님 자녀의 지위로 올려주시는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라고 하지 맙시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나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지위로 높여주셨음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까요?
용서는 우리 앞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 죄가 용서받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래서 지옥에 가야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지위에 올려주신 분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앞에서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어떤 형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임금으로부터 사면장을 들고 사형 선고받아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혹시 풀려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형의 말에 동생은 먼저 판사를 죽이고 그 다음엔 자신을 신고한 이를 찾아가 죽일 것이라 말합니다.
형은 동생을 사면할 수 없어서 나오며 사면장을 찢어버립니다.
내가 만나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능력으로 나를 세우셨는지 안다면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용서는 오직 인간의 지위에서 하느님의 지위로 높여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해 주신 그리스도 앞에서만 가능합니다.
누구도 나에 대한 권한을 지닌 분 앞이 아니면 자기 처지를 알지도 못하게 되고 그러면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미움을 덮을 수 있는 더 고마운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용서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7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다니엘 13,1-9.15-17.19-30.33-62
요한 8,1-11
하느님의 뜨거운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과의 만남입니다.
복음서 여러 아름다운 장면들 가운데 참으로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최근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긴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정체성과 신원을 주제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꽤나 피곤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단골 피정 장소인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좀 쉬시기도 하시고 밤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께는 또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체포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둑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복음 8장 4~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자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고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순간 보여주신 예쉼의 태도가 특별합니다.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복음 8장 6절)
이 부분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체 예수님께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요?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어떤 성경학자는 이 부분이 너무 궁금해서 이것만 연구하다가
결국 답을 못얻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는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것은 ‘둘러서있는 고발자들의 죄목’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렵고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경우, 즉답을 피하고 싶을 때, 말없이 땅에 무엇인가 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취하셨을 것입니다.
일종의 김빼기 작전, 냉각 작전이었습니다.
동시에 마음의 여유도 얻고, 아버지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올리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 그 어떤 현자, 솔로몬 할아버지도 내놓을 수 없는 명답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복음 8장 7절)
하느님의 따스한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묵상하며 떠오른 생각 한 가지!
우리도 언젠가 뜨거운 하느님의 따스한 자비를 만나는 순간, 그간 켜켜이 쌓아왔던 모든 죄가 눈녹듯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질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5주간 월요일>
(2023. 3. 27. 월)(요한 8,1-11)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3월 27일의 복음 말씀은, 용서와 화해를 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회개’는 용서와 화해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1독서의 수산나 이야기와 복음 말씀의 여자 이야기는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입니다.
고발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자기 죄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죄만 고발한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고발당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두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수산나는 죄 없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고, 복음 말씀의 여자는 확실히 간음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재판 결과에 초점을 맞추면, 수산나 이야기는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내는 이야기이고,
‘인과응보’가 주제입니다.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이야기이고, 최종적으로 처벌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3-6).”
이 이야기의 상황은 여자를 재판하려고 끌고 온 상황이 아니라, 여자를 처형하려고 끌고 온 상황입니다.
<재판은 이미 끝났고, 형을 집행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증인이나 목격자가 아니라 처형을 집행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온 것은, 여자를 재판하라는 뜻이 아니라, 처형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라는 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진짜 관심사는 여자를 처형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처형하라고 말씀하시면, 그들은 예수님이 평소에 용서와 자비를 강조하신 것과는 모순되는 말을 했다고 선전할 것이고, 또 로마법을 어겼다고 로마 당국에 고발할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법에서 간음죄는 사형죄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여자를 용서하고 풀어 주라고 말씀하시면, 율법을 안 지켰다고 최고의회에
고발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는데, 무엇을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키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각자 자신의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라는, 또는 자신의 죄를 먼저 생각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요한 8,7-8).”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남의 죄를 묻기 전에 먼저 너희부터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죄인을 처형할 때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한다는 신명기 율법에서 온 말씀으로
생각됩니다(신명 17,7).
그것은 거짓 증언을 막기 위한 율법입니다.
만일에 증인들이 거짓 증언을 했다면, 그들은 거짓 증언을 한 죄와 살인죄를 함께 짓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증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회개’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야기 속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거짓 증인들이 아닙니다.>
‘죄 없는 자’ 라는 말을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라는 말씀에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어떻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뜻으로는 “돌을 던지지 마라.”이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사형’은 목숨만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도 빼앗는 일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9-11)”
여자를 끌고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군중이 모두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은 것 같고,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양심의 가책’이 항상 회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그리고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마태 18,14). 예수님은 바로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내가’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회개’는 내가 살기 위해서,
즉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나에게 맡겨진 숙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