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큰스님의 상좌 한 사람이 청량사라는 절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데 그 절은 너무 헐어서 비가 오면 법당 천장이 줄줄 새었다 . 양동이나 세수대야를 받쳐서 물을 받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곳에서 도를 닦던 젊은 상좌는 법당을 개수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예술적인 재주가 탁월했다.학생 시절에 바가지 공예를 한 경험도 있었다. '만일 바가지 공예품들을 전시한다면 많은 신도들이 와서 줄줄이 사 줄 것이 아닌가. 더구나 내 뜻이 갸륵하고,큰스님의 후광과 부처님의 원력도 있고...전시회는 성공할 것이다.그 돈으로 지붕을 새로이 고치도록 하자.' 상좌는 바가지 오십여개를 들어다 놓고, 수도하는 틈틈이 바가지에 그림을 그리고 예쁜 글씨도 써넣었다. 부처님의 가호때문인지 작품들 하나하나가 잘 되었다.작품들을 보면서 스스로도 놀랐다. 중노릇을 걷어치우고 이러한 예술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재미니ㅆ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그렇지만 이 바가지 공예는 어디까지나 절의 지붕 개수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 바가지를 네 발로 밟아라.
그는 자기의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잘 된 것 하나를 골라 예쁘게 포장을 해 가지고 큰스님을 찾아갔다. 큰스님은 여느때나처럼 수미산같이 가부좌를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큰 절을 한 다음 그는 작가 지금 착수한 갸륵한 일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아. 그래 너 잘했구나..얼마나 고생을 하느냐?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큰 스님이 이렇게 말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싸가지고 온 작은 품의 포장을 뜯어 스님 앞에 내밀었다. 그런데 큰스님은 차갑게 말했다. '그것 내 발로 밟아라.' 그는 눈앞이 아찔했다. 공들여 만든 작품울 어떻게 내 발로 밟아 깨뜨린단 말인가?그렇지만 스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어서서 바가지 작품을 밟았다.깨지지 않자 큰스님이 소리쳐 말했다. '더 세차게 밟아!' 그는 힘을 다해 밟았고 그의 발바닥 밑에서 작품이 와삭 깨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과 머리통이 깨어지는 둣 싶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큰스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놈아...바가지 팔아서 뭘하겠다는 것이냐? 중은 신심이 제일이야..'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어금니 끝에 불만과 억분을 놓고 씹고 또 씹었다.동냥을 주지 못할망정 왜 바가지는 깨뜨린단 말인가..그렇나 그의 속을 뚫어 본 스님이 말했다.
'이놈아,잔재주가 많으면 중노릇하기가 힘들어..'
소설가 한승원 님의 <스님의 맨발>에서 발췌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1912년(임자)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합천 이씨 가문에 탄생하셨다. 꼿꼿한 선비로 알려진 이상언을 아버지로,강상봉을 어버니로 하여.. 속명은 영주라 하였다.'남에게서 배운 것은 소학교 6년과 <자치통감>이 전부여..'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스님은 책을 읽다가 대나무 숲속이나 밤나무 밑에 가서 명상에 잠겨 있곤 했다.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명상.. 스님은 방황과 절망을 계속하다가 영가 대사의 증도가를 얻어 읽게 되었다.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캄캄한 밤중에 횃불을 만난 듯한 감격을 맛보았다.'아..이런 공부가 있었구나.' 드디어 양식을 짊어지고 덕산 대원사 탑전에 들어가 불철주야 영맹정진 40여 일만에, '마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고 시끄러운 움직임과 멈추어 고요함이 하나같이 된 경지'에 이르렀다.1935년, 24세에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떠나면서 출가시를 읊으셨으니,
해인사 백련암에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해인사에서 수계 득도하였으니, 이로부터 10년간을 천하 제방선원에 안거하면서 생식과 벽곡과 담식, 그리고 장좌 불와로 인역 고행 정진을 감행하셨으니, 언제나 지혜가 섬삭하고 선기가 활발발하였다. 29세시에는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철통같은 어듬을 깨뜨리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기 본래 성품을 보았다.이때의 오도송은 이러하다.
보조 스님의 저서를 독파한 성철 스님은 '먼저 깨달은 후에 닦는다.'는 사상에 대하여 아쉬움을 느꼈다.깨달음이 단박에 이루어지면 닦음도 또한 담박에 이루어지는 '돈오돈수'가 참으로 견성의 경지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1947년에는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에 공주규약을 설정하고, 청담,우봉,보문,향곡,일도,자운,월산,성수,도우,법전 등 대덕 스님들과 더불어 불조의 정법을 발양함으로써 여기에서 교단 정화의 기초를 다졌다.
삼십년 넘게 입은 누더기 옷
스님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거짓으로 수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청빈한 수행 납자답게 잔혹할 정도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스님 입고 계신 옷은 몇년째 입으셨습니까?' '거의 사십년 되었어.이것이 두 벌인데 번갈아 입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못났으므로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어..' 1993년 11월 4일 새벽, 거처인 해인사 퇴설당에서 상좌들을 부르시고, 후사를 부촉하시며,'때가 되었다.'하시고 일필휘지로 임종게를 수서하시되
하시고 열반에 드신다. 세수는 82세가 되시고, 법랍은 59년이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