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단 한명의 죄인도 남겨두지 않겠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영성생활 안에서 제 눈을 확 잡아끄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입니다. 그는 사목자로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단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 신자들의 영성생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따라서 비안네 신부님은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나 럭셔리한 가재도구, 메이커 옷, 취미활동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은 거의 ‘유령의 집’과도 비슷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루 온 종일 신자들 영성 생활의 쇄신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심성의껏 고해성사에 전념하셨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마치도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듯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 지상에 단 한 명의 죄인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영웅적 사도직을 수행했습니다.
만학도로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기적적으로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러나 서품 즉시 시작된 가난하고 착한 목자로서의 삶은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별이 되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청빈한 생활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단 한 벌 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워낙 전반적으로 너덜거렸기에 수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신자들이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니 수단 하나 새로 해 입으라고 돈을 마련해드렸습니다.
꼭 새로 해 입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 옷 그대로였습니다. 화가 난 신자들이 다그쳤더니, 그 돈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준 후였습니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댄 적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신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왜 그렇게 하고 다니셨을까? 묵상해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떤 날 하루 24시간 가운데 18시간을 고해소 안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사제로서 고해소에만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은 6시간 가지고 미사도 봉헌해야 했습니다. 강론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잠도 자야했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목에 전념하느라, 영혼구령에 시간을 바치느라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침식사는 언제나 우유 한잔이면 족했다고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 시간이 없으셨던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하루 한 끼로 때우셨답니다. 식사 시간은 길어봐야 5분 내외였답니다.
비안네 신부님 성덕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충실, 그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습니다. 본당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고 경건하게 봉헌하는 것, 그리고 성체성사에 앞서 꼭 필요한 또 다른 성사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을 충실히 행함으로 인해 성인이 된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년
예레미야 30,1-2.12-15.18-22
마태오 14,22-36 또는 15,1-2.10-14
주님을 만나는 법; 불가능에 도전하라!
누군가가 저에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본 적 있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머리로, 신학으로만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저는 그때 아직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신학교에서 예수님 음성을 들은 때가 가장 인격적으로 만난 때였던 것 같습니다.” 라고만 말했습니다.
도대체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저 역사 안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리사이-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불가능에 도전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은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뿐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왔어도 아직은 깊이 만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오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청한 이것을 우리도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저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할 꿈을 꿉니다.
그래서 그 꿈이 이루어지면 비로소 그분이 함께하셨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근래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이룰 꿈은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성취될 것이기에 지금부터 돈을 조금씩 모아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통장은 어느 선 이상은 돈이 넘지 못하게 스스로 그 액수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형에게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성장 가능성이 큰 종목의 주식에 그 돈을 조금씩 넣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을 준비하다 보니 불가능한 것을 청하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한 것은 세상에서 큰 업적을 내는 일이 아니라 우선 자신을 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것을 알고는 형을 통해 저축하는 일을 멈출 결심을 하였습니다.
사제로서 재물을 모으는 일은 자신을 이기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생존할 만큼만 가지고, 생존할 만큼만 먹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루를 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지, 무조건 세상을 바꾸려다가는 자기 자신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분은 세상을 바꾸려거든 먼저 이불부터 정돈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1996년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해였습니다.
이때 함께 금경축을 맞는 몇몇 사제들을 초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였는데,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신 분은 학자셨습니다.
자신이 50년 동안 사제생활을 해 오며 이룬 업적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선정된 분은 알바니아 예수회 사제이신 ‘안톤 룰릭’이었습니다.
다음은 바로 안톤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종교탄압이 즉각 시행되었고 저의 동료 예수회 사제들에게는 임의 재판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모두 믿음의 순교자로 기쁘게 죽어갔습니다.
마치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빵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리듯이 말입니다.
1946년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미사를 온 몸으로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산채로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저의 팔을 벌리고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하는 희생을 원하셨습니다.
저의 사제적 희생제사는 사제로서의 전 삶을 조롱과, 배척과, 고문과, 감옥살이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아주 추운 외딴 산골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은 자신의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 용서의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한 번에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밤새 기도를 해야 조금씩 마음이 누구러졌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세례와 동시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물 위를 걷고 이 과정에서 가장 확실하게 주님을 만난 사람은 본인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용서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물 위를 걸어보아야 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참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저는 이제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루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함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비틀거리며 하루하루 나아가다 보면 물 위를 걷고 있는 저를 발견하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분이 되지 않으면 그분을 온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한 우리의 궁극적 길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을 이기는 불가능의 길을 시작하며 우리도 주님께 청해봅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복음: 마태오 15,1-2.10-14: “사람을 더럽히는 것”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음을 가지려 온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고 따지러 왔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2절)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이었다. 원래 정결례 규정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이웃 사랑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문자와 관습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불러 말씀하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11절)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참된 중심이 마음의 정결에 있음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예수님께서 음식 규정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위선과 교만을 문제 삼으셨다고 말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악한 의지와 부패한 마음”이라는 것이다(“마태오 복음 강해”, 51강).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손의 씻김보다 양심의 씻김을 바라신다.” 겉은 깨끗해 보여도 마음 안에 미움과 시기와 거짓이 있다면 참된 정결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 자체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신다.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창세 1장 참조)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창조된 것은 모두 좋은 것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배척할 것이 하나도 없다.”(299; 1티모 4,4 참조)
그러므로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이다. 교회는 외적 절제와 단식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회개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19절)이야말로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음식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체성사의 은총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다. 성 바오로는 경고한다. “합당하지 않게 빵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1코린 11,27)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중대한 죄를 의식하는 사람은 먼저 고해성사를 받은 뒤에 성체를 모셔야 한다.”(1385) 성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총의 성사이지만, 그것을 합당하지 않게 받아 모시면 오히려 심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성체가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정결해야 한다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신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13절) 성 히에로니모는 이 말씀을 해석하며, 하느님께서 심으신 것은 믿음과 사랑과 진리이고, 인간의 교만에서 나온 가르침은 오래 남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리사이들의 문제는 전통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전통을 하느님의 뜻 위에 놓은 것이었다.
교리서도 같은 원칙을 가르친다. “전통은 하느님 말씀에 봉사해야 하며, 그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83-87 참조) 참된 전통은 복음을 보존하고 전달하지만, 인간적 관습이 복음의 정신을 가리게 될 때는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14절) 성 그레고리오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이를 인도하려 하면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적 지도자의 첫 번째 조건은 지식이 아니라 겸손과 회개이다.
교리서는 양심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양심은 진리에 따라 형성되어야 한다.”(1783-1785) 성경을 자기 생각대로 왜곡하면 우리도 눈먼 인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말씀을 배우고, 성령의 빛 안에서 분별해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외적 형식에 머무르지 말고 마음의 회개로 나아가라고 부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입술을 깨끗하게 하려 하지 말고, 먼저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마음이 깨끗하면 말도 깨끗해진다.” 우리의 손은 씻겨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씻겨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주님께 이렇게 청하자.
“주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형제를 살리는 말이 되게 하소서. 저를 눈먼 인도자가 아니라, 당신 빛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우리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어서, 어떤 모습으로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컵이 하나 있습니다. 이 컵에 연필을 꽂으면 연필꽂이가 됩니다. 물을 담으면 물컵이 되고, 물을 담으면 술잔이 됩니다. 이렇게 컵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 마음도 이 컵과 같습니다. 자기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자기의 정체성이 변하게 됩니다. 피곤함을 담으면 피곤한 사람이, 기쁨을 담으면 기뻐하는 사람이 됩니다. 또 적대적인 마음을 담으면 싸움꾼이 되고, 반대로 사랑을 담으면 사랑꾼이 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자기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것이든 다 담을 수 있는 만능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 쓸데없는 쓰레기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쓰레기를 담으면 무엇이 될까요? 냄새나는 쓰레기통이 되고 맙니다.
당시 유다교의 최고 권위자들인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합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습니다.”(마태 15,2)
이들의 문제 지기는 십계명이나 모세오경에 기록된 성문화된 율법이 아니라, 구전 율법이라 할 수 있는 조상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는 행위는 위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에서 묻었을지 모를 ‘제례적 부정함’을 씻어내는 영적 의식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전통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을 얽매고 정죄하는 잣대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거시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1)
진정한 정결함의 기준을 외부에서 내면으로 이동시키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외부의 환경, 물리적인 음식, 타인에 의해 겪게 되는 상황 등입니다.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 의도, 그리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말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손에 묻은 먼지가 아니라 마음의 얼룩이라는 것이지요.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외적 형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없다면, 우리 역시 스스로 만든 조상들의 전통에 갇혀있는 현대의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쓰레기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돌을 옮기려고 할 때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다면 주변의 돌부터 움직여라(비트겐슈타인)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8.04.화.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마태 15,13)
뜨거운 태양 아래 묵묵히
그늘을 드리우는 한 그루 나무같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심으시고,
우리는 그 생명을 가꾸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는
기도와 고해성사 안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려놓은 사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은 많지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은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성찰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가'였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우리들 삶임을
그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에게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생명의 호흡이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고해성사에 바치며
죄인을 품어 주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과거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다는
사실을 몸소 증언했습니다.
작은 시골 본당을 충실히 지키고
성실히 섬긴 그의 삶은,
한 영혼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모든 삶의 출발점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였습니다.
비안네 성인은 겸손을 통해
오히려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사람은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드러냈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기보다 하느님께 이끌었던
참된 사제였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것이
우리의 세상이 하느님의 향기로
새로워지는 귀한 복음입니다.
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마음의 날 되십시오.
먼저 그늘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위로가 되고
복음의 쉼터가 되는
우리들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 -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스님들이 계율에만 집착하여
중생의 어려움에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면
허수아비에 승복을 입혀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도 교회 교도권에 집착해서
신자들의 어려움에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면
허수아비에 수단을 입혀놓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어도
예수님은 할 얘기는 하십니다.
사제로서의 신원의식을 잃지 않고
소신껏 가치를 살아내기 위해서
교회의 자정능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제 역시도 할 얘기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미움을 받을 용기를 소신껏 실천하셨고
결국 죽음에 내몰리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죽지는 못하더라도
사제는 적어도 진리를 증언하고
눈먼 이를
구덩이로 안내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자정능력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야 교회가 썩지 않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생활성서 - 소금항아리]⠀
신앙은 깨끗한 손을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흘러나온 말 하나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입니다.
⠀
2026/8/4/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
마태오 복음 15장 1-2.10-14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
겉과 속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우리는 자주 겉모습에 신경 쓰며 살아갑니다. 예의 바른 말과 부드러운 표정, 남들에게 흠잡히지 않을 행동들을 갖추어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지요. 물론 이러한 태도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더 깊은 곳을 보십니다. 우리의 손이 깨끗한가보다 마음이 깨끗한가를 먼저 물으시지요.
누군가를 향해 쉽게 내뱉은 말, 속으로 품은 미움, 상처 주고도 모른 척했던 침묵,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에 조금씩 자국을 만듭니다.
그래서 신앙은 겉으로 완벽해지기보다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마음이 조금씩 사랑을 닮아가는 일이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누군가를 살리는 말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친절과 다정함이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대구대교구)⠀
생활성서 2026년 8월호 '소금항아리'에서⠀
복음말씀
제1독서
<네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내가 야곱의 천막을 되돌려 주리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30,1-2.12-15.18-22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한 말을 모두 책에 적어라.”
12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의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너의 부상은 심하다.
13 네 종기에 치료 약이 없고 너에게 새살이 돋지 않으리라.
14 네 정부들은 모두 너를 잊어버리고 너를 찾지 않으리라.
참으로 나는 네 원수를 시켜 너를 내리쳤으니 그것은 가혹한 훈계였다.
너의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컸기 때문이다.
15 어찌하여 네가 다쳤다고, 네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고 소리치느냐?
네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1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야곱 천막의 운명을 되돌려 주고 그의 거처를 가엾이 여겨
그 언덕에 성읍을 세우고 궁궐도 제자리에 서게 하리라.
19 그들에게서 감사의 노래와 흥겨운 소리가 터져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지 않고
내가 그들을 영예롭게 하리니 그들이 멸시당하지 않으리라.
20 그들의 자손들은 옛날처럼 되고 그 공동체는 내 앞에서 굳건해지며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은 모두 내가 벌하리라.
21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고
그들 가운데에서 그들의 통치자가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도록 하여 나에게 다가오게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누가 감히 나에게 다가오겠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2.10-14
1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2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10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12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14 그들을 내버려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