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昇天의 삶 - 증인의 삶, 강복의 삶, 찬미의 삶
2016.5.8.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사도1,1-11 에페1,17-23 루카24,46ㄴ-53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자 홍보주일입니다. 교회는 이 주님 승천 대축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40일째 되는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활 제7주일로 옮겨 지냅니다. 승천이란 뜻부터 기분이 좋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죽음을 일컫는 귀천歸天, 소천召天이란 말마디입니다. 모두 죽음이 무無에로의 허무한 환원이 아닌 하늘 본향에로의, ‘하느님의 집’으로의 귀가를 뜻하는 말마디이기에 우리에게는 한없는 위안이 됩니다.
부활과 승천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부활은 동시에 승천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천이 상징하는 바 참으로 심오합니다. 부활이란 단어가 담지 못하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체험시 이야기를 나눴던 구약의 인물들인 모세와 엘리야도 승천한 인물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이에 에녹까지 더하면 세분이 구약의 승천한 인물입니다. 특히 에녹의 승천 구절은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자 20세기 영성의 대가였던 트라피스트 수도승 토마스 머튼의 서품상본 구절입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Then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longer here, for God took him)’(창세5,24).
영어까지 곁들여 읽어보면 그 깊은 뜻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살았다’라는 말은 의역이요, 직역하면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이며 바로 하느님은 믿는 이들의 영원한 도반道伴임을 뜻합니다. 바로 승천은 우리 믿는 이들의 복된 죽음을 상징합니다.
아버지의 하늘 집으로의 귀가歸家를 상징하는 승천입니다. 얼마나 고무적이고 희망적인 주님 승천인지요. 죽음에 대한 승리, 세상에서의 평생 영적전쟁의 삶에서의 승리를 상징하는 승천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겹습니까? 말 그대로 우리도 두둥실 하늘로 올라가는 승리의 기쁨 가득한 분위기의 곡입니다.
“환호소리 높은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
오늘 화답송 가사와 곡 그대로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면서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우리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예수님 승천 후로의 하늘은 예전 하늘이 아닙니다. 예수님 승천하심으로 활짝 열린 하늘 길, 하늘 문이 되었습니다. 어디서나 눈들면 승천하신 주님이 계신 정다운 하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승천의 삶’을 살아야 할 곳은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승천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승천의 삶은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승천이 상징하는 바 참으로 심오합니다. 사탄이 추락한 것은 중력에 의해서였습니다. 무거지기는 쉬워도 가벼워지기는 어렵습니다. 살아갈수록 무거워지는 ‘자기Ego’의 무게입니다.
천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에고가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에고의 중력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던 것도 에고가 없기에 중력을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승천한 세 인물들 에녹, 모세, 엘리야 모두 자기가 없었던 하느님의 사람들이었기에 승천하신 것입니다. 아니 세 분은 평생 자기가 없는 승천의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바로 ‘승천의 삶’입니다. 자기가 없는 삶, 승천의 삶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저는 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증인의 삶입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 역시 매일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매일 죽고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늘 새롭게 시작하는 증인의 삶입니다. 결코 비상한 삶이 아니라 믿는 누구나 살아야 할 평범하나 비범한 삶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바로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우리 삶의 자리인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삶에는 증인의 삶이 제일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신비를 살 때 저절로 자기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가능한 승천의 삶입니다. 새삼 승천의 삶은 부활의 삶이자 끊임없는 회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자기의 무게, 삶의 무게도 점차 가벼워질 것입니다.
둘째, 강복의 삶입니다. 아름다운 강복의 삶입니다. 참 제가 많이 주는 것이 강복입니다. 고백성사 때도 고백성사 사죄경에 이어 강복을 줍니다. 산책 때에도 수도원 경내 곳곳에 강복합니다. 요셉수도원 로고를 휴대폰에 붙여드릴 때도 그대로 강복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아니 카톡으로 사진을 전할 때나 메시지를 전할 때도 꼭 기도하는 마음으로, 강복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복하시며 승천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자녀들 앞에서 강복하며 떠나는 임종이라면, 길을 떠날 때 가족들에게 강복하며 떠나는 가장이라면 참 멋있고 아름답겠다는 상상을 합니다. 부단히 강복하고 강복을 받는 삶이 자기가 없는 무사無私한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강복의 삶이 사람을 겸손케 함으로 자기의 무게를 알게 모르게 줄여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수행에 충실할 수록 하느님은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는 지, 승천하신 예수님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1,19-20).
끊임없는 하느님 강복의 은총이 자기ego의 중력重力으로부터 벗어나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정말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큰 축복 속에 살고 있는지 깨달아갈 때 점차 가벼워지는, 홀가분한 삶입니다.
셋째, 찬미의 삶입니다. 찬미의 기쁨이 자기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중력에서 벗어나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날게 하는 영혼의 양날개가 바로 찬미와 감사입니다. 세상에 자기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항구한 수행으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여 수도자들이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찬미와 감사의 성무일도와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묘사도 아름답습니다. 주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 제 삶의 자리로 돌아갔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합니다. 끊임없는 기쁨의 찬미가 우리 모두 자기의 중력을 벗어나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 승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승천의 삶을 앞당겨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증인의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매일 죽고 부활하는 파스카의 삶이 바로 증인의 삶이자 승천의 삶입니다. 둘째, 강복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강복을 받고 나누는 삶이 승천의 삶입니다. 셋째, 찬미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이 승천의 삶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리스도인은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삶의 전망을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증인의 삶, 강복의 삶, 찬미의 삶은 바로 승천의 삶이자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승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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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