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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 안창남, 열여섯 살 때 미국인 조종사의 곡예비행 본 뒤 비행기에 매료
⊙ 일본으로 건너가 자동차 운전면허 취득한 뒤 오쿠리 비행학교 졸업 후 비행사 자격 따… 스무 살 때 오쿠리 비행학교 조교수 되면서 조국에 이름 알려져
⊙ 영국제 복엽기 몰고 와 여의도~남산~창덕궁~여의도 코스 완주
⊙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 학살하자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 시작… 국민당 휘하 비행학교 교장 지내다 추락사
⊙ 최근 엄복동 다룬 영화 개봉… 자전거포 점원으로 혜성처럼 등장해 대회마다 우승
⊙ 일본인들이 잔꾀 부리자 우승기 내동댕이치며 저항… 중국 다롄에서 열린 국제대회도 우승
⊙ 은퇴 후 자전거 절도로 두 차례 언론에 보도… 6·25 때 동두천에서 북한 전투기에 폭사
올해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다. 3·1만세운동 직후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조선 민중 사이에 유행한 노래가 있다. 경기민요 ‘청춘가(靑春歌)’를 개사(改詞)한 것인데 이 민요에 1920년 암울했던 조선 민중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준 두 젊은이의 이름이 등장한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 자전거
간다 못 간다 얼마나 울었나
정거장 마당이 한강수 되거라
싫거든 두어라 너 하나뿐이냐
산 넘어 산이 있고 (좋다)
강 건너 강이 있다.’
‘여의도 비행장 역사의 터널’이다. |
민요에 등장하는 안창남(安昌男·1901~1930)은 서울 상공을 난 최초의 비행사다. 엄복동(嚴福童·1892~ 1951)은 최고의 자전거 선수였다. 나라 빼앗긴 지 10년 만에 등장한 두 ‘혜성’에 국민은 환호했지만 운명은 엇갈렸다. 한 명은 독립운동을 하다 최후를 맞았지만 다른 한 명은 도둑으로 몰락해 살다 6·25 때 폭사(爆死)했다.
안창남은 한반도 상공을 난 첫 비행사지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는 아니다.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미주(美洲) 한인 비행사가 여섯 명이나 있었다. 한장호, 이용선, 이초, 오림하, 장병훈, 이용근이다. 공군이 이들을 ‘한국 최초’로 공인한 것은 1992년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안창남의 팔자(八字)가 바뀐 것은 1917년 9월 서울 용산에서 열린 미국인 조종사의 곡예(曲藝)비행을 본 뒤였다. 용산은 현재 강북 최고의 요지지만 1920년 당시에는 일본군 주둔지였다. 통일교 본부가 있는 시티파크 일대가 바로 그곳이다. 경의선이 다니는 철도 바깥쪽은 모래벌판이었다.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에 매료된 안창남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 자동차학교에서 먼저 운전(運轉)을 배운 뒤 면허를 땄다. 이어 아카바네 비행제작소에 진학해 6개월간 비행기의 구조와 제작방법 등을 공부한 뒤 마침내 오쿠리(小栗) 비행학교에 입학, 무사히 졸업했다.
안창남은 1921년 5월, 일본 민간 비행사 시험에 합격해 비행면허증을 받게 된다. 당시 17명이 응시해 합격자는 2명뿐이었다. 한 달 뒤 지바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는 2등을 했다. 그는 중구 평동에서 출생해 미동국민학교를 마치고 휘문학교를 중퇴했는데, 상당히 두뇌가 명석했다고 한다.
안창남의 이름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그가 1921년 4월 오쿠리 비행학교의 조(助)교수가 됐을 때부터였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그를 ‘자랑스러운 조선 청년’으로 대서특필했고, 이어 그의 고국 방문 지원과 개인 비행기를 사주자는 모금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비행기 값은 당시 돈으로 2만원이었다.
여의도공원 지하에는 비행사 안창남의 얼굴과 여의도 비행장의 역사를 담은 동판이 붙어 있다. |
1922년 10월 《동아일보》가 그의 고국 방문 비행을 발표했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열린 도쿄~오사카 간 왕복 우편비행대회에서 안창남이 우승하자 한반도는 안창남이라는 이름으로 뒤덮였다. 그해 12월 10일 안창남은 오쿠리 비행학교 소속 영국제 1인승 뉴포트 복엽기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조국으로 왔다.
금강호의 조종간을 잡은 안창남은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한 뒤 남산~창덕궁 상공~여의도 코스를 비행했다. 당시 서울에 30만명이 살았는데 그의 비행을 보러 몰린 인파가 5만명이 넘었다. 안창남은 1923년 잡지 《개벽》에 그때 감동을 그린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란 글을 실었다.
空中에서 본 京城과 仁川
京城(경성)의 한울(하늘)! 京城 한울!
내가 어떠케 몹시 그리워햇는지 모르는 京城의 한울! 이 한울! 이 한울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京城 방문의 일(日), 12월 10일은 의외에 日氣(일기)가 차서 이번의 불완전한(防寒·방한의 준비도 없는) 비행기로는 도저히 비행할 수 업는 일이엇스나 그래도 날라본다고 南大門(남대문) 위를 넘어 光化門(광화문) 위까지는 왓스나 北岳山(북악산)에서 나리질리는 바람에 비행기가 南(남)으로 南으로 흘르면서 기계는 얼어 『프로페라』가 돌지를 아니하게 되어 기체는 중심을 닐코 좌우로 기웃둥 기웃둥 흔들리면서 그냥 낙하될 듯한 위험한 형세임으로 어찌하는 수 업시 급히 京城市街(경성시가)의 西半(서반)만 1廻(회)하고 곳 汝矣島(여의도)로 돌아왓습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여의도공원에 있는 금강호의 모형이다. 안창남이 이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를 출발해 남산~창덕궁을 돌아 다시 여의도에 착륙했다. |
안창남이 환호(歡呼)에 취해 평탄한 일생을 살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광복 후 ‘친일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또 한 번 그의 삶을 바꾼다. 일본인들이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며 조선인을 대거 학살하자, 분노한 안창남은 1924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하던 안창남은 몽양 여운형(呂運亨)의 소개로 산시성 군벌 옌시산의 군대에서 항공중장으로 근무하면서 장제스의 국민당이 벌인 2차 북벌(北伐)에 참전했는데 그 계급이 소장이었다. 북벌 후 안창남은 산시(陝西) 비행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중국인 비행사를 양성했다.
조국의 광복을 염원했던 안창남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28년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비밀 항일조직을 결성해 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천하대란(天下大亂)이 벌어지기 직전인 1930년 4월 산시 비행학교에서 비행교육을 하던 중 안타깝게도 추락사했다. 안창남 사후 사흘 뒤 옌시산은 장제스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안창남의 시신은 타이위안(太原)에 묻히고 ‘중화민국 제3집단군 항공학교 특별비행교관 안군창남지묘(安君昌男之墓)’라는 비석까지 있었지만, 1965년 문화대혁명의 소란 속에서 파괴돼 지금은 흔적도 없다. 안창남의 일생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1949년 9월 개봉한 윤봉춘 주연, 〈안창남 비행사〉가 그것이다.
2001년 정부는 안창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후손이 없어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안창남의 족적을 그나마 더듬어볼 수 있는 곳은 여의도공원이다. 김포공항이 세워지기 전 비행장 역할을 했던 이곳에는 안창남의 활동을 담은 동판과 각종 항공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안창남의 패기를 높이 사는 글을 적은 전시물이다. |
안창남 이후 수많은 ‘빨간 마후라’가 등장했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여성 전투기 조종사 권기옥(權基玉·1901~1988)을 비롯해 박경원(朴敬元·1901~1933), 이정희(李貞喜·1910~?) 등이 나라 잃은 한(恨)을 창공을 가르며 풀었다.
한때 박경원을 다룬 영화 〈청연(靑燕·2005)〉으로 인해 안창남 때와 비슷한 ‘여성 비행사 1호’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으나 기록이 분명해 곧 정리됐다. 권기옥이 비행기로 하늘을 난 것은 1925년, 박경원이 일본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은 1927년이기 때문이다.
권기옥 역시 안창남처럼 독립운동가인 남편 이상정과 함께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했다. 이상정은 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권기옥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가 1925년 윈난(雲南) 항공학교를 졸업해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됐다. 중국 항공대 조종사로 1932년 상하이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자전거 대왕 엄복동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의 한 장면. 가수 비가 엄복동 역을 맡았다. |
엄복동은 최근 가수 비와 이범수 등이 출연해 개봉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으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1892년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태어난 엄복동의 가정환경과 성장과정, 출신 학교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증언에 따르면 엄복동은 어릴 적 자전거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자전거 선수로 활동한 인물은 대개 자전거 가게 점원이 많았는데, 이는 자전거가 매우 귀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전거 대회가 처음 열린 곳은 1906년 4월 22일 동대문 훈련원 자리였다. 처음 대회를 연 것은 대한제국의 군인인 권원식과 요시카와라는 일본인이었다.
엄복동이 자전거 선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13년 3월 10일 충청남도 조치원에서 열린 ‘육군기념제 자전거경주연합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부터다. 같은 해 4월 13일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주최로 열린 ‘전 조선자전차경기대회’는 공교롭게도 용산의 일본군 주둔 연병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일본인은 모두 7명이 출전했는데, 대회를 주최한 신문사들은 이 일본 선수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시내를 일주하는 환영식을 열었다. 더구나 재경(在京) 일본 상점들마저 후원에 나서자, 두 신문이 “우리도 조선인 선수를 후원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대회는 한일(韓日) 대결 같은 긴장감이 고조됐다.
4월 13일 오후 2시 남대문에서 용산의 일본군 연병장까지 이어진 도로에는 10만명 이상의 관중이 몰렸다. 경기는 선수들의 수준을 고려해 등급별로 열렸다. 최고가 참가하는 ‘일류(一流)경기’에 조선인은 엄복동·황수복이, 일본인 선수는 4명이 출전했다. 경기는 시작부터 이변을 자아내고 말았다.
엄복동이 처음부터 선두를 질주해 용산 일본군 연병장을 스무 바퀴 도는 동안 한 번도 뒤처지지 않았다. 3등 역시 황수복이 차지하자 4월15일자 《매일신보》는 조선인이 일본인을 이긴 데 대한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감정 듬뿍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십만 관객이 박수 응원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앞서나가다가 다른 선수가 쫓아옴을 보고 더욱 용맹을 내어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 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독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 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 군에게 떨어지고 황수복도 삼등을 점령하여 다정다한한 십만 동포의 박수갈채하는 가운데에 감사한 눈물로 동포의 다대한 열성을 사례하며 엄복동은 인천 공영사에서 기부한 우승기와 용천상점에서 기부한 라지 자전거를 받았으며….”
엄복동은 같은 해 4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대회에서도 우승했으며, 11월 2일 동대문 훈련원에서 열린 ‘추계 자전거 대회’마저 제패하면서 ‘자전거왕(王)’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1913년 11월 4일 《매일신보》는 “엄복동을 두고 ‘자전거 대왕’이라는 말이 자자하였다”고 보도했다.
엄복동은 이후에도 한일 대결의 상징처럼 됐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20년 5월 2일 경복궁에서 열린 ‘서울 시민을 위한 대운동회’다. 그날 경회루 앞에서 자전거 경주가 열렸다. 경주에는 조선・일본・중국 선수 70여 명이 참가했다. 우승 후보는 예선전 1등인 엄복동과 모리시타(森下正一)였다.
결승전은 운동장을 40바퀴나 도는 것이었는데, 30바퀴를 넘었을 때 엄복동은 이미 2위 그룹을 몇 바퀴나 앞서고 있었다. 그때 심판석에서 돌연 ‘경기 중지’라는 신호가 울렸다. 일본인 심판이 일본 선수들의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해가 이미 졌다”는 황당한 이유를 댄 것이다. 이에 엄복동이 흥분했다.
분을 참지 못한 엄복동은 우승기가 있는 곳으로 가 “이것은 내가 1등 하는 걸 막으려는 수법이오. 이까짓 우승기는 뒀다가 뭐 하려는 것이오”라고 외치고는 우승기를 내동댕이쳤다. 이에 일본인들이 엄복동에게 달려들면서 난투극이 벌어지자 여기 조선인들이 가세하면서 경기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건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보도했다.
“여덟 사람이 용기를 다 바쳐 주위를 돌 때,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뒤떨어지고, 오직 선수 엄복동(嚴福童)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은 삼십여 바퀴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 선수보다 댓 바퀴를 뒤떨어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없이 엄 선수의 어깨에 떠러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별안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 선수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내게 일등을 아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짖으며 우승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까짓 우승기를 두었다 무엇하느냐!’고 우승 깃대를 잡아꺾으매, 옆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엄 선수를 구타하니 마침내 목에 상처가 나고 피까지 흘리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같이 달려들어서,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경관의 진압으로 군중은 헤치고, 대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말았는데, 자세한 전말은 추후 보도하겠으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엄복동은 1923년 5월 20일 중국 다롄에서 열린 국제 자전거대회에 출전해 우승했다. 이날의 경기를 《동아일보》는 1923년 5월31일자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자전거 대장 노릇하는 엄복동군이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지나간 이십일 대련시 봉판정 운동장에서 열린 자전거 대경주회에 원정 차로 떠났는데 개최일이 되는 이십일 아침부터 모여드는 관람자들이 무려 오만여 명에 달한 중에 특히 조선인 관람자가 많아서 엄군의 우승을 열광적으로 바라며 열심히 응원했다.
맨 나중 일류선수의 70주 경주가 시작되매 장내는 더욱이 긴장하여지며 엄 선수는 튼튼한 기상과 용맹한 자세로 출장하여 경기는 시작되었다. 일본서는 자전거 대왕이라는 일류선수 일본인과 또한 중국인, 조선인 연합의 경주이므로 조선인은 더욱 뛰놀았다.
이에 엄선수는 줄곧 다섯 바탕으로 앞서 놓고 돌매 일본인들은 하품을 하며 혀를 내두른 모양은 장관이었는 바 최후의 70주에 이르러 엄 선수가 일등 선착이 되고 일본인은 이착이 되고 중국인이 삼착으로 마치어….”
엄복동은 1930년대 초까지 선수로 활동했는데, 일제는 조선신궁(神宮)대회를 자주 열어 조선 선수들의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당연히 엄복동은 일제의 주요한 표적이었다. 1972년에 출간된 《한국인물대계》의 엄복동 편에는 엄복동이 일제가 주최한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인기가 상승되는 존재로 부각되자 일본인 각 자전거점에서는 그를 회유시켜 끌어오려 했지만 그는 결연히 거절함으로써 자기에게 보내진 민족의 기대를 헛되이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에서 개최되는 자전거 경기에는 참가를 거부했다.”
엄복동은 서른다섯 되던 해인 1926년 서울 장충단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의 높은 인기에 주최 측이 항상 그를 초청하면서 1932년 조선인이 개최한 ‘전 조선 남녀 자전거대회’까지 출전했다. 당시 그는 마흔한 살로 전성기를 한참 넘겼지만 1만m 경기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인생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생이 아니다. 엄복동은 안타깝게도 젊은 시절의 명성이 1926년 즈음해 오명(汚名)으로 바뀌게 된다. 그 첫 보도가 《동아일보》 1926년 7월10일자에 보도된 엄복동의 ‘절도 장물 판매에 관한 재판 결과’다.
“조선에서 자뎐거 선수로 유명한 엄복동이가 절도와 공범자가 되야 징역을 하게 되엿다. 경긔도 부천군 다주면 댱의리에 원적을 두고 시내 병목뎡 이백십번듸에 거주하든 리효진(35)은 절도전과 이범인 자로 금년 이월 이십오일 이래 또다시 시내 여러곳에서 남의 자뎐거 십여대를 훔처다가 시내쵸음뎡 백십일번듸에 원적을 두고 병목뎡 이백이십구번디에서 자뎐거 영업을 하든 엄복동(35)의 뎜포에 가서 그것을 팔아달라고 의뢰하야 엄복동은 리효진과 함께 그 절취하여온 자뎐거를 여러차례 원산으로 가지고 가서 팔다가 사실이 발각되야 두명이 모다 원산경찰서에 잡히여 함흥 디방법원에서 리효진은 절도죄로 엄복동은 절도장물사보죄로 예심에 결뎡을 밧고 지난 구월 이십일에 리효진은 징역 사년 엄복동은 징역 일년륙개월에 벌금 오십원의 판결언도를 밧고 모다 그를 불복한 후 수일전에 경성 복심법원으로 공소하여 올라와 당대 조선에서 자뎐거 선수로 그를 당할 자가 업다고 하든 용감한 엄복동도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 텰창 밋헤서 신음하고 잇는 중이더라.”
1950년 6·25가 일어나기 한 달 전 《동아일보》 1950년 4월1일자에 엄복동이 다시 등장한다.
“비행사 안창남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은륜계에 명성을 날리던 엄복동(61)씨는 그 옛날의 명성도 어디로 생활에 궁한 나머지 남의 자전거를 훔치려다 구속되었으나 인정검사의 따뜻한 온정으로 석방된 사실이 있다. 즉 왕년에 자전거 선수로 천하에 용명을 날리던 엄복동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육순이 넘은 노인이 되어 지금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날 그날의 끼니에 어려워 지난 22일 시내 종로구 청진동 575번지 박연이씨 댁 앞을 지나다 훌륭한 자전거 한 대가 박씨 문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 자전거가 대단히 훌륭한데 욕심이 나서 그 자전거를 훔치려고 하였으나 그만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지검에 송치되어 안희경 검사의 담당하에 취조를 받아왔는데 안검사는 엄의 과거지사와 현재의 사정에 동정하는 바 있어 30일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고 한다.”
엄복동이 탔던 자전거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
엄복동이 1926년 자전거를 훔칠 당시, 자전거 한 대 가격은 쌀 수십 가마니를 살 정도였고, 1950년 절도사건 보도에는 가격이 3만원이라고 명시됐다. 1950년 당시 쌀 8kg이 2300원이었으니 엄복동이 훔친 자전거는 쌀 한 가마니보다 비싼 것이며, 당시 공무원 월급 9300원과 비교하면 공무원 3명의 월급쯤 될 것이다.
이후 엄복동에 대한 보도는 일절 없다. 그의 죽음에 관련해서는 1951년 1·4후퇴 때 경기도 동두천 부근의 야산에서 북한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說)이 전해지고 있다. 엄복동의 아내와 두 딸도 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 혈육은 아들 엄만길이 유일하며 손자 엄재룡이 사이클 선수가 됐다.
엄복동의 자취는 1977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엄복동배 전국 사이클 경기대회’와 1987년 그가 한때 거주했던 경기도 의정부시에 엄복동의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뿐이다. 또 하나 엄복동이 탔던 영국의 ‘러지 휘트워스(Rudge Whitworth)사’가 제작한 경기용 사이클은 현존한다.
이 자전거는 엄복동이 1929년 은퇴 후 후배에게 전했다고 하며, 이를 다시 체육인 박성열씨가 받아 소유하고 있었다. 6·25 때 박성열씨는 피란할 때도 이 자전거와 함께했다. 이 자전거는 등록문화재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가장 오래된 자전거라는 가치가 있다.⊙
월간조선 2019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