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38~40)
여기에서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온'(semeion; a sign)은 어떤 인격이나
사물을 다른 것으로부터 두드러지게 구별해 주는 표시와 같은 것들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기적'이나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 주는 '징조'와 같은 것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유다 랍비들은 장차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면,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은 표징을 보여줄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메시야가 아닐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에게 표징을 구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능력있는 가르침이나
지금까지 일으키신 많은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앞서 마귀들린 자를 고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오히려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한 것이라고 공격하였으며(마태12,22~24), 이제는 또다시 표징을 요구하는
변덕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구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해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
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절개없는'으로 번역된 '모이칼리스'(moichalis; aduterous)는
'간음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모이큐오'(moicheuo)에서 유래한 형용사로서
'간음하는', '혼외(婚外)정사를 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과 그 백성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느님께 신실하지 못한',
'신앙을 버린'이라는 의미로 쓰인다(야고4,4; 에제16,15).
전에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말씀에
만족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찾게 된다.
지금 예수님께로부터 책망받고 있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인들 역시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불리울 만큼 악했으며(마태12,34), 눈에 보이는 기적으로 자신들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야 할 정도로 하느님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한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큰 물고기에서 삼키워져 죽은
줄 알았던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만에 온전하게 살아나옴으로써, 하느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세우셨음을 보여 주었던 표징을 가리킨다.
'요나에 관한 표징'이 예수님의 표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요나가 바로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표징은 B.C.8세기경 북부 이스라엘의 예언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간 갇혀 있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 당신도 죽어 땅 속에
사흘간 묻혀 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땅 속에'로 번역된 '엔 테 카르디아 테스 게스'(en te kardia tes ges; in
the heart of the earth)에서 '카르디아'(kardia)는 '마음', '심장'(heart)으로
번역되는데, '땅 속에'라는 말은 '땅의 심장 안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는 땅의 가장 중심부를 가리키지만, 비유적으로는 '죽음의 영역인
저승(스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스올의 뱃속'에 있었다고 표현하였으며(요나2,2),
이것은 그가 죽은 자의 영역에 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생명 자체이시고(요한14,6)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지만(요한1,4),
죄인들을 대신해 죽음에 이르렀으며(히브2,9), 완전한 죽음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었다(로마6,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므로(히브4,15)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매어 있을 수
없으셨고(사도2,24), 결국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1ㄷ)
여기서 '더 큰 이'로 번역된 '플레이온'(pleion; a greater)은 '폴뤼스'(polys)의
비교급으로서 양에 있어서 더 크거나 질에 있어서 더 우수하고 나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플레이온'(pleion)이 중성 단수로 쓰였다.
예수님께서 굳이 비교급 중성을 사용하신 것은 '요나'라는 사람과 예수님
당신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비교하시는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로부터 받은 심판의 메시지'
와 '유다인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의 메시지와 은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예언자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 하나만을 듣고도
회개했는데,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들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심판 때에 그들은 더욱 철저하게 단죄받게 될 것을
보여준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42ㄷ)
에디오피아 지역 스바에서 온 여왕은 단순히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만 듣기 위함이 아니라
그에게 있는 모든 지혜를 보고 듣고 알고 배우기 위해서 그에게 왔던 것이다.
그것도 유다인들이 생각하기에 유다 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완전한 지혜를 소유한 분이 그들의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혜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보여줄 수 밖에 없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유다인 자신들의
눈앞에서 가장 많은 지혜의 말씀과 기적을 베풀어도 믿지않는 그들의 불신앙과
완고하고 사악한 고집 때문에, 그들의 죄를 뒤집어 쓰고 무죄하신 당신이 십자가에
처형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