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각과 예지는 삶이라는 광대놀음을 뚫고 어느 순간 갑자기 들이닥치지요. 자각과 예지가 오는 찰나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 현현(顯現)의 순간이겠지요. 사물과 의식이 돌연 환해지는 그때가 눈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어요. 실내에 두 사람이 함께 있어요. “두 사람은 다정하고, 두 사람은 충분하다”니, 사랑하는 사이겠지요. 한데 이 사랑의 끝이 선명하네요. 그것은 미래의 일인데, 현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 사람을 안아 줘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아, 그때가 눈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지요. 그런 저녁은 고갈과 상실, 그토록 불길하고 부정적인 예감들로 가득 찬 시각이니까요. 그런 저녁은 어딘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시각이니까요. 세상 저쪽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 시각이 눈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