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5](수) [동녘글밭] 교산 허균의 됨됨이
https://youtu.be/YKn6pJkJsps
한 일주일쯤 뒷면 교산 허균문화제가 열립니다.
강릉 초당의 교산난설헌 기념공원이 있는 생가터에서요.
보통, 가을 한가위 쯤에 열리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달 쯤 뒤에 열리는 셈입니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은 조선의 선조가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태어 났읍니다.
외가집인 강릉 사천 애일당에서요.
잘 알려진 대로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맨 처음의 한글 소설입니다.
전라도 함열로 귀양을 갔을 때, 43살인 1611년에 쓴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 까닭은 귀양을 간 1년 동안 문집을 엮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시평론집인 성수시화를 비롯하여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엮었으니까요.
이런 허균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5살 쯤에 글을 깨우치고, 9살 쯤에 글을 지을 정도로 명석했던 모양입니다.
26살 때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를 하여 처음으로 설서(說書)를 지냈읍니다.
29살 때에 문과 중시(重試)에 으뜸으로 급제한 후 예조 좌랑에 올랐읍니다.
30살 때에 집에 머물던 오명제에게 난설헌집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31살 때에 황해도 도사(都事)로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고 하여 파직이 됩니다.
42살 때에 과거시험의 대독관(면접관)에서 다시 파직되어 귀양을 가게 됩니다.
43살 때에 귀양지인 함열에서 한 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며 많은 책을 펴냈읍니다.
44살 때에 뜻을 함께했던 석주 권필이 광해군을 풍자한 시로 매를 맞아 죽습니다.
47살 때에 문신 정시에서 으뜸을 하여 동부승지에 이어 가정대부가 됩니다.
48살 때에 세자빈이었던 이이첨의 딸이 아들을 못 낳자 허균의 딸이 세자빈이 됩니다.
이때 형조판서가 되었지만 5개월 후 파직이 됩니다.
49살 때에 김윤황의 경운궁, 현응민의 남대문 격문 사건에 휩쌓이게 됩니다.
50살 때에 추섬과 하인준, 황정필이 허균이 거사를 꾸몄다고 진술을 합니다.
결국, 반역죄로 몰려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을 당하여 삶을 마감합니다.
이렇게 허균의 해적이를 가져 온 것은 허균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밖으로 드러난 허균의 모습인데 사실, 궁금한 것은 ‘허균의 됨됨이’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것이지요.
그래서 ‘교산 허균의 성정’이란 제목으로 글밭을 쓸 참이었읍니다.
하지만 성정(性情)이란 말은 많이 쓰지 않아 주저하게 되어 ‘됨됨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허균은 집안 내력으로 볼 때 ‘곧은 사람’으로 타고 난 듯이 여겨집니다.
또한 형인 허봉과 바로 위 누나인 허초희의 사랑을 받으며 커 사랑이 가득찬 삶으로요.
특히 공부에 큰 깨우침을 주었던 이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님의 옆에는 곧고, 사회적 약자인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또한 ‘도문대작’에서 밝혔듯이 ‘식욕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요, 생명의 노릇’이라고요.
이와 관련하여 ‘유교의 성인들은 욕망을 극복 대상으로 여겼지만, 그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
나는 성인들이 지어낸 가르침에 맹종할 까닭을 모르겠다’라고 했읍니다.
이즈음에 열린공감에서 더탐사, 뉴탐사에 이르기까지 헌신한 최영민 감독이 떠오릅니다.
구설수에 올른 최영민 감독이라 이렇게 허균을 풀어 내면서 든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둘만이 간직한 남녀의 문제를 꼭 나쁘게만 몰아가지는 말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산 허균문화제에 님을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오늘이기도 합니다.
연락처를 몰라 ‘오시라’고 직접 연락할 수 없어 아쉬움이 크지만 말입니다.
오늘도 고마움으로 교산 허균을, 허균의 얼을 그립니다. 정말, 고마워요.
첫댓글 교산 허균문화제를 일주일 쯤을 앞두고
문화제를 알릴 겸 최영민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글밭에 담았읍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두어야 하기에
조금 시간이 많이 걸려 일군 글밭입니다.
거기에 시민언론 더탐사, 뉴탐사을 헐 뜯는,
못된 짓거리도 담았읍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